79화
* * *
이블린이 다시 입궁한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크게 술렁거렸다. 이블린의 입궁을 가장 반긴 것은 근위 기사들이었다.
“대장님, 저희가 마중을 가야하지 않겠습니까?"
“아직 아가씨를 의심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저희가 가서 응원하는 모습을 보여야합니다.”
그들에게 이블린은 왕을 구하고도 핍박받은 영웅이었다. 많은 이들의 목숨을 구해 준 그녀에게 어떻게든 보답하고 싶었다.
“우리의 임무는 폐하를· 지키는 것이다. 하지만 비번인 사람은 마음대로 해도 좋다.”
근위대장은 아쉬운 얼굴로 허락했다. 왕의 옆을 지켜야 하는 그는 어떻게 해도 자리를 비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원자가 많았기 때문에 기사들은 제비를 뽑아 갈 사람을 정했다 그런데 ‘영광의 문’에 도착하자 뜻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저 여자들은 아가씨와 같은 소속인 것 같군. 그리고 수비대 녀석들도 보이고. 저쪽은 또 누구지?'
드문드문 로브를 입은 남자들과 귀족 가문의 사병인 것 같은 자들도 섞여 있었다. 서로를 탐색하는 시선이 바쁘게 오갔다.
그때, 4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귀부인이 부채를 팔락거리며 등장했다.
“이쪽입니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도착할 겁니다.”
“아니, 시녀란 에가 왜 이렇게 늦게 다니는 거야? 빨리 빨리 와야 얼굴을 볼 거 아냐.”
귀족 가문의 사병은 모두 그녀가 끌고 온 것 같았다.
-러셀 백작 부인. 진상.
-이블린 아가씨와 트러블 있음.
기사들은 수신호로 그녀에 대한 정보를 전달했다.
-시비를 걸러 온 것으로 추정.
-공격이 들어오는 즉시 방어할 것.
기사들은 러셀 백작 부인이 이블린과 부딪치기 전에 손을 쓰기로 합의했다.
“어, 저기! 금사자 기사단이다!"
눈이 밝은 누군가가 소리치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옹성거렸다.
공작 가문의 기사단이 나타났다는 것은 곧 이블린이 왔다는 뜻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가득 찼다.
금사자 기사단의 뒤로 거대한 핑크색 마차가 동장했다.
”······저게 뭐지?“
사람들의 시선이 빨려 들어가듯 마차에 고정됐다. 마치 홀린 것처럼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세상에 망측해라! 누가 저런 요란한 색깔을 마차에 칠한다고?"
그러나 호들갑을 떨며 부채질을 하는 러셀 백작 부인도 정작 마차에서 시선을 돌리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 후 마차가 멈췄다. 시종이 열기도 전에 안쪽에서 문이 열리며 엘마이어 공작이 내렸다.
기사들은 거의 동시에 마른침을 삼켰다. 공작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압박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정말 인간인가?'
‘전장에서 적과 검을 맞대고 있는 것 같군.'
그때, 마차 안에서 귀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세스. 무슨 일 있어요?"
“아니.”
공작이 몸을 돌리는 것과 동시에 어깨를 짓누르던 압박감이 사라졌다. 기시들은· 겨우 숨을 쉴 수 있었다.
잠시 후 공작의 손을 잡고 분홍색 꽃송이 같은 것이 마차에서 튀어나왔다.
모두가 기다리던 이블린이었다. 그녀가 등장하는 순간 얼어붙은 공기가 확 풀어지는 듯했다.
“이, 이블린 아가씨!"
근위 기사 중 한 명이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이블린이 그를 돌아봤다.
"앗, 안녕하세요!"
얼굴이 확 밝아진 이블린이 강아지처럼 달려왔다. 기사는 그녀의 뒤에서 서늘한 시선을 보내는 공작을 발견하고 어깨를 움츠렸다.
“그때 이후로 처음이죠? 몸은 좀 어떠세요?"
“아가씨의 도움으로 무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기사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감사를· 표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이블린이 활짝 웃었다.
"저도 여러분의 도움을 받았는걸요. 다 같이 무사히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꽃 같은 미소에 기사의 마음이 훈훈해졌다. 물론 뒤에서 노려보는 공작의 시선은 전혀 훈훈하지 않았지만.
"잠깐 비켜 봐 아가씨, 저를 기억하십니까?"
“전 아가씨와 함께 지네를 물리쳤던…….”
한 명이 물꼬를 트자 우르르 몰려든 기사들이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이블린은 인내심 있게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결국 먼저 인내심이 바닥난 쪽은 공작이었다.
“이비, 이러다 늦겠는데?"
“앗, 맞다. 죄송해요. 저 이제 가 봐야겠어요.”
이블린의 말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기서들이 자세를 바로 했다.
“이블린 아가씨, 궁에 돌아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희 근위 기사대는 끝까지 아가씨를 지지하겠습니다!"
기사들이 예를 표하자 이블린은 이번엔 당황하지 않고 우아하게 답했다.
잠시 기다리던 공작이 그녀의 손을 이끌었다.
“그만 가지.”
“잠깐!”
그때 후다닥 뛰어나온 귀부인이 그들의 앞을 가로 막았다. 공작의 눈썹이 절로 꿈틀거렸다.
"러셀 백작 부인, 감히 내 앞을 막는 건가?"
"오, 오해십니다. 이런 곳에서 우연히 만나다니. 반가운 마음이 앞서 실례를 저질렀답니다.”
백작 부인이 씨도 먹히지 않을 거짓말을 하며 부채를 팔랑거렸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노려보던 공작이 픽 웃었다.
"실례라는 것을 아니 다행이군. 그럼.”
“자, 잠깐만요. 이블린 하인즈 양. 잠시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백작 부인이 간절하게 소리쳤다. 커다란 눈을 깜빡인 이블린이 공작의 손을 톡톡 두드렸다. 공작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러니까 저, 그것이…….”
하지만 정작 이블린을 마주한 백작 부인은 제대로 된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녀의 손에서 쥐어 짜인 부채가 엉망이 되어 가고 있었다.
사실 백작 부인은 이블린에게 사과를 하러 왔다.
공작에게 물어뜯기고 있는 친정 오르센 공국의 피해가 너무 크기도 했고, 이블린의 명성이 갑자기 너무 높아졌기 때문이다.
왕의 목숨을 구하고 대신관 후보마저 치워 버린 이블린은 새로운 권력의 별로 떠올랐다. 이런 상황에서 이블린과 척을 져서는 아들인 테오에게도 좋을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이블린과 얼굴을 마주하자 자존심 때문에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테오 어머니,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하얗게 질린 그녀의 손끝을 본 이블린이 상냥하게 말을 걸었다. 백작 부인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 그래요. 하인즈 양이 우리 테오와 친하게 지낸다는 소리는 들었어요.”
"네, 테오는 착하고 좋은 친구예요. 제가 항상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어머, 그렇군요.”
백작 부인의 얼굴에 진심 어린 미소가 떠올랐다. 부족한 아들 때문에 항상 마음 졸이던 그녀는 이런 말을 들어 본적이 없었다.
어느새 스르르 마음이 풀어진 백작 부인이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다.
“일전엔 내가 정말 실례가 많았어요. 별것도 아닌 일에 오해해서 화를 냈지요. 정말 품위 없는 짓이었어요.”
내뱉고 나니 정말 별것도 아닌 말이었다. 괜한 자존심 때문에 지금까지 버티고 있었던 것이 후회스러울 정도였다.
“그렇게 오해하신 것도 당연하죠. 아무리 테오와 친한 친구 사이라도 예의를 지켰어야 했는데. 다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겠습니다.”
이블린도 자연스럽게 사과를 돌려주었다. 그렇게 두 사람 사이의 다툼은 오해와 실수라는 말로 포장되었다.
백작 부인은 이블린의 배려에 눈물이 핑 돌았다. 자 존심을 굽힌 것이 처음이라서 어떻게 될지 몰라 무서웠다.
그런데 예상 밖의 상냥한 대답을 돌려받자 고마운 마음과 호감이 절로 솟아났다.
‘그래, 내 아들이 부족해 보여도 사람 보는 눈만큼은 나보다 정확했던 거야.'
부채로 엉망이 된 얼굴을 가린 백작 부인이 이블린의 손을 슬그머니 잡았다.
“앞으로 친하게 지내요, 하인즈 양. 내가 그래도 사교계에선 이름이 좀 통하는 사람이랍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릴게요.”
활짝 웃은 이블린이 깍듯이 대답했다. 친근한 표정과 달리 예의 바른 태도였다.
백작 부인은 멍하게 이블린의 얼굴을 바라봤다. 보면 볼수록 이런 아가씨를 왜 싫어했지 싶었다.
‘이런 또 귀찮은 게 늘어났군.’
완전히 홀려 버린 고녀를 눈치챈 공작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게 이블린은 뜻밖의 아군을 또 하나 얻었다.
* * *
곰탱이 엄마는 곰탱이와 성격이 비슷했다.
갑자기 내 손목에 집착하기 시작한 그녀는 무슨 말을 해도 손을 놓아주질 않았다. 그러면서 악의는 전혀 없다는 점이 곰탱이와 아주 판박이였다.
“저, 부인 전 이만 가야 할 것 같은데요.”
“벌써요?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지금 안 가면 지각이거든요.”
이 대화도 벌써 다섯 번이나 반복했다. 다시 망나니로 돌아갈까 고민하는데 곰탱이 엄마가 긴 한숨을 쉬었다.
“이대로 보내긴 너무 아쉽군요. 다과회 초대장을 보 낼 테니 꼭 참석하겠다고 약속해 줘요.”
”······네.“
"꼭! 꼭이에요! 알겠죠?"
"······네에.”
곰탱이 엄마는 그제야 나를 놓아주었다. 붙잡혔던 손목에 멍이 들지 않은 것이 선기할 정도였다.
그런데 곰탱이 엄마가 물러서자마자 내 주변을 맴돌던 사람들이 우르르 다가왔다.
"아가씨! 안녕하십니까!"
"꼭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잠시만 저와 이야기를······.“
먹이를 노리는 매처럼 번뜩이는 눈에 몸이 절로 흠칫했다.
“그만, 환영은 충분하다. 이제 물러서도록.”
한 걸음 앞으로 나선 세스가 그들을 막았다. 이어서 금사자 기서들이 달려와 우리 주변을 둥글게 둘러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