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누, 누구냐!"
“닥치고 있으라고. 너한테는 볼일이 없으니까.”
“무슨······ 우읍!”
더러운 천을 뭉쳐서 밸런타인의 입에 쑤셔 넣은 남자가 헥터 쪽으로 몸을 돌렸다.
"성기사들의 리더가 그쪽이지?“
“암살자냐?”
헥터의 눈이 부리부리해졌다. 비록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몸이 되었지만 정선까지 굴복한 건 아니었다.
“암살자라······. 뭐 틀린 말은 아니지만 오늘은 심부름으로 온 거라서 말이야.”
남자는 품속에서 아주 작고 투명한 병을 꺼냈다.
"해독재의 절반이야. 이걸 먹거나 뿌리면 마비가 반쯤 풀릴 거야 네 부하들의 몫도 있어.”
“······원하는 게 뭐지?"
“넌 저 돼지를 데리고 돌아가서 보고만 하면 돼. 바실리스크를 사냥하다가 이 꼴이 되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자연스럽게 마비가 풀린 것 같다고.”
헥터의 미간이 의혹으로 좁아졌다.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뒤에 내가 나머지 절반의 해독제를 보낼 거야. 그럼 너와 네 부하들은 완치되는 거지.”
“아.”
헥터는 뒤늦게 깨달았다. 상대는 밸런타인이 치료받을 기회를 빼앗을 생각이었다. 성기사들이 차츰 나아지는 모습을 보이면 신전에서
도 절실하게 치료법을 찾지는 않을 것이다. 내버려 두면 자연스럽게 마비가 풀릴 거라고 생각할 테니까.
하지만 치료받지 못한 밸런타인이 좋아질 리가 없었다. 후보 경쟁에서 탈락하고 차기 대신관이 결정된 뒤 엔 완전히 지워진 사람이 될 것이다.
“당신 주인이 누구인지 몰라도 대신관 후보에게 원한이 아주 깊은 가보군.”
가장 악랄한 점은 당사자에게 이 대화를 고스란히 들려주고 있다는 거였다. 핏발이 선 밸런타인의 눈이 데굴데굴 굴러가는 게 보였다.
헥터의 감탄에 남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원한은 무슨 그냥 성격이 더러운 놈이라서 그렇지 그래서 어떻게 할래? 내 제안을 받아들일 거야?"
“이 상황에서 거절할 이유가 없지.”
헥터가 밸런타인의 패악을 참았던 것은 충성심 때문이 아니었다. 밸런타인의 옆에 붙어 있어야 부하들을 치료할 기회가 있기 때문이었다.
"좋아."
남자가 병의 내용물을 헥터의 입 안에 흘려 넣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마비가 풀리기 시작했다.
"부하들의 몫은 여기에 두지. 혹시 모르니 부하들 입단속은 잘 시키라고. 일이 잘못되면 다음 해독제는 없으니까.”
“잠깐, 여기 입단속시킬 사람이 하나 더 있지 않나?"
헥터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단검을 뽑아 들고 밸런타인에게 다가갔다.
“아직 손의 감각이 온전하지 않으니 도와주게. 혀를 자르면 티가 날 테니 말을 못 할 정도로만 손을 쓰면 돼.”
“나 참, 성기사들은 사설 다 미친놈들인가?"
남자는 어이없어하면서도 헥터를 돕기 위해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읍으으읍!"
위기감을 느낀 밸런타인이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의 비명은 천에 막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
“아아악!”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동방에서 건너온 귀한 자기가 박살났다. 보석 박힌 거울과 귀한 마도구까지 사정없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어떻게! 어떻게 살아남은 거야! 아악! 악! 왜 안 죽었냐고!”
“라리사!"
그때 소란을 들은 누군가가 방으로 뛰어들었다.
온화하고 심약해 보이는 남자는 엉망진창이 된 방안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라리사,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바닥은 깨진 파편으로 엉망이었다. 그 엉망진창의 한가운데 귀신처럼 산발을 한 라리사 모어가 서 있었다.
남자, 조슈아 클라멘스 백작은 선뜻 아내에게 다가 가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무슨 일?“
산발이 된 머리카락 사이로 광기 가독한 눈동자가 드러났다.
“무슨 일? 무슨 일이냐고?"
라리사는 깨진 파편을 밟으며 조슈아에게 다가갔다. 발에서 피가 흘렀지만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오히려 그녀를 보는 조슈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라, 라리사! 당선 발이!"
“전부 당신 때문이잖아!"
조슈아의 가슴팍을 거세게 밀친 라리사가 소리쳤다.
“당신 때문이야! 조슈아, 당신의 거짓말이 내 인생을 망쳤다고!”
조슈아는 라리사가 밀치는 대로 맥없이 휘청거렸다.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는 결국 눈물을 글썽거렸다.
“미안합니다. 하지만 그때는 어쩔 수가…….”
“닥쳐!"
라리사의 손톱이 그의 뺨을 긁고 지나갔다. 피가 흐를 정도로 깊은 상처였다. 흠칫 놀란 조슈아가 뺨을 움켜쥐고 뒤로 물러섰다.
잠깐의 정적이 흐른 후, 라리사의 얼굴이 갑자기 천사처럼 변했다. 그녀는 언제 소리를 질렀나는 듯이 상냥하게 물었다.
“세상에, 조슈아 괜찮아요?"
”라리사?“
“그러게 조심 좀 하지 그랬어요. 내가 화를 못 참는 거 잘 알면서 .”
온화한 목소리와 달리 그녀의 눈은 여전히 광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멍하게 라리시를 쳐다보던 조슈아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깨진 파편이 무릎에 박혔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라리사, 제발 나를 용서해 주십시오.”
"좋아요. 용서해 줄 테니 이혼해 줘요.”
라리사가 생글거리며 말했다. 농담 같은 말투였지만 진심이라는 걸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조슈아는 간절한 얼굴로 그녀에게 매달렸다.
“이혼은 안 됩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이혼하면 내가 당신을 지켜 줄 수 없다는 것을요.”
“어째서요?”
라리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혼을 해도 당연히 자신을 지켜 줘야 한다는 태도였다.
순간 말문이 막힌 조슈아가 다시 그녀를 설득했다.
“당신이 내 아내가 아니게 되면 세스도 더 이상 참아 주지 않을 겁니다.”
“그럼 참게 만들어요. 그게 당신이 해야 할 일이니까."
“하지만······."
라리사가 그의 뺨을 달래듯이 쓰다듬었다.
“조슈야 앞으로도 계속 엘마이어 공작을 속이면 돼요. 그는 당신 말을 들어줄 수밖에 없잖아요?"
“나, 나는 세스를 속이려고 한 게 아니라…….”
라리사의 손이 뺨의 상처를 꾹 눌렀다. 아픔에 움찔 하는 조슈아를 본 그녀가 눈을 둥글게 휘었다.
"공작은 당신을 불구로 만들었다고 자책하고 있으니까 우리가 이혼한다고 해도 그건 마찬가지잖아요.”
“나는 세스를 속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내 아이를 가졌다고 거짓말을 해서······.”
조슈아가 소리치는 것과 동시에 라리사가 그를 핵 놓아 버렸다. 싸늘해진 그녀의 눈이 조슈아를 노려봤다.
“그래요. 제가 거짓말을 했죠. 당신과 결혼하고 싶어서 아이를 가졌다고 말했어요. 공작과 약혼한 제가 당신과 결혼할 수 있는 방법은 그것뿐이었으니까요.”
냉정한 눈빛과 달리 라리사의 목소리는 상처받은 것처럼 떨리고 있었다.
죄책감을 느낀 조슈아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당선도 모두를 속였죠. 전쟁의 부상으로 불임이 됐으면서, 공작과 결투하던 중에 그렇게 된 것처럼 꾸몄잖아요?"
“내가 한 게 아닙니다! 나는…….”
“조슈야 당신이 불임이라는 사실을 미리 밝혔다면 나도 임신했다는 거짓말은 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러니까 당신이 모두를 망친 거라고요.”
조슈아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라리사가 심판의 천사처럼 속삭였다.
“더 이상은 비겁한 당신을 견딜 수가 없어요. 그러니 이혼해요. 지금 당장.”
***
긴 휴가가 끝나고 다시 출근하는 날이 왔다.
‘어, 왜지? 출근하고 싶은데 하기가 싫어.’
이게 말로만 듣던 월요병인가 보다. 괜히 꾸물거리는 나를 시녀들이 재촉했다.
“아가씨, 이러다 늦으시겠어요.”
“전하께서 밖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헉! 정말?"
깜짝 놀란 나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행히 준비가 거의 끝난 상태라 신발만 갈아 신으면 됐다.
"복실아, 가자!"
-뿌우!
머리에 예쁜 리본을 단 복실이가 서둘러 내 팔을 타고 어깨 위로 올라왔다. 우리는 씩씩하게 밖으로 나갔다.
“앗, 오셨다!"
“다들 빨리 줄 서!"
밖에선 사용인들이 질서정연하게 대기 중이었다. 심지어 복실이 엄마까지 자연스럽게 뒷줄에 끼어 있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내가 멈칫하자 가장 앞에 서 있던 시녀장이 입을 열었다.
“명예를 되찾고 입궁하시는 것을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아가씨!"
모두가 박수를 치며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나는 괜히 코끝이 찡해 지는 것을 느끼며 활짝 웃었다.
“다들 정말 고마워요.”
-꾸우꾸!
사람들의 박수 소리에 기분이 좋아진 복실이가 머리를 치켜들었다. 내 옆으로 다가온 세스가 그런 복실이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비, 당신의 입궁을 위해 새로운 마차를 준비했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섯 마리의 백마가 끄는 마차가 금사자 기사단의 호위를 받으며 나타났다.
생각지도 못한 이벤트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새로운 마차는 눈에 띄는 연핑크색이었다. 장식 프레임과 문장은 검은색으로 칠해서 아주 세련된 느낌이 들었다. 마치 커다란 선물 상자를 보는 것 같았다.
"처음 입궁할 때 주문을 넣었는데, 당신이 원하는 색을 만드는데 시간이 좀 걸린 모양이야. 미음에 들어?“
그러고 보니 세스가 내 전용 마차를 만들어 주겠다며 원하는 색을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인지도를 올리고 싶은 욕심에 핑크&블랙 조합을 부탁했다.
그 뒤로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열심히 만들고 있었을 줄이야. 심지어 결과물도 내 예상보다 훨씬 멋있었다. 감동한 나는 세스를 덥석 끌어안았다.
“세스가 최고예요.”
그러자 사람들이 다시l 박수를 쳤다. 날카로운 헛기침으로 그것을 끊은 시녀장이 상냥하게 덧붙였다.
“아가씨, 이러다 늦으시겠습니다. 어서 마차에 오르시지요.”
“앗, 네!"
후다닥 세스를 놓아준 나는 얼른 마차 쪽으로 다가 갔다. 왠지 아쉬운 얼굴이 된 세스가 나를 에스코트했다.
-구르르르······.
그때 복실이 엄마가 나를 향해 긴 울음소리를 냈다. 마치 잘 다녀오라고 배웅하는 것 같았다.
“다녀오겠습니다!"
모두에게 손을 흔들어 준 나는 새 마차에 올랐다.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