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어쩐 일? 저런 것을 숨겨 두고 어쩐 일이냐고?"
왕이 복실이 엄마를 삿대질하며 소리쳤다. 세스는 간섭이 심한 부모를 보는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제게 첩자를 보내는 것은 이제 그만두십시오.”
“너는 지금 할 말이 그것뿐이냐!"
세스는 왁왁 화를 내는 왕을'무시하고 내 옆으로 다가왔다. 침대 위에 쟁반을 내려놓은 그가 상냥하게 물었다.
“아직 자고 있을 줄 알았는데. 피곤하지 않아?”
"네, 충분히 잤어요.”
왕이 두드려 깨운 거지만 사실대로 말할 순 없었다. 눈치를 보는 나를 세스가 쟁반 앞에 끌어다 앉혔다.
"배고프지?"
그는 손수 쟁반을 덮고 있는 뚜껑을 열었다. 맛있는 냄새에 배가 꼬르륵 울렸다.
쟁반엔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이 소담하게 담겨 있었다. 아침 식시를 침대까지 배달해 주는 약혼자라니. 왕이 없었다면 완전히 신혼 분위기였을 텐데 조금 아쉬웠다.
'근데 지금 이걸 먹어도 되나?'
뒤에서 화가 난 왕이 날뛰고 있는데 밥을 먹는 건 눈치 없는 짓이 아닐까. 고민하는 내 손에 스푼을 들려준 세스가 말했다.
“먹고 있어 나는 폐하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잠깐 나갔다 올게.”
“어, 네.”
세스는 말 그대로 왕을 달랑 들어서 밖으로 나갔다. 왕이 무서울 정도로 화를 냈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나는 수프를 떠먹으면서 그 장면을 구경했다.
“어떻게 된 거냐?"
온실의 문이 닫히는 순간, 버럭버럭 화를 내던 왕의 목소리가 침착해졌다. 정중히 왕을 내려놓은 공작이 응수했다.
"보시는 그대로입니다.”
“세스 엘마이어, 나는 이블린이 무슨 수로 바실리스크를 길들였는지 묻고 있다.”
공작은 대답 대신 왕을 조용히 바라보기만 했다. 짐승처럼 우두커니 선 조카의 모습에 왕은 가슴이 절로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저주를 정화하고 괴수를 길들이는 것을 사람들은 보통 기적이라고 부르지. 이블린은 차기 성녀 후보인 것이냐?"
“아닙니다.”
“정말 아니냐?"
의심스러워하는 왕의 눈빛에 한숨을 쉰 공작이 대답했다.
“그녀에겐 신성력이 조금도 없습니다. 그리고 신성 왕국의 차기 성녀는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차기 성녀가 이미 결정됐다니, 처음 듣는 소리구나. 대체 뭘 얼마나 숨기고 있는 것이냐?"
“폐하께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모두 말씀드렸습니다."
왕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그러나 지금은 괘씸한 조카를 추궁하는 것보다 다른 일이 더 중요했다.
“이블린의 정체는 대체 뭐지?"
“제 약혼녀이자, 폐하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던 충성스러운 신하입니다.”
“세스, 나는 말장난을 듣고 싶은 게 아니다."
왕이 짜증을 부리자 공작이 싱긋 눈웃음을 지었다. 그 낯선 모습애왕은 살짝 동요했다.
‘어딘지 달라졌다?'
지금의 공작에게선 소년 시절의 자신만만함이 엿보였다. 하도 잘나서 한 대 쥐어박고 싶은 느낌까지도.
“이블린은 이블린일 뿐입니다. 그녀가 어떤 힘을 갖고 있고, 왜 지니고 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한텐 중요하다.”
왕은 공작이 이블린에 대해 뭔가를 숨기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오늘은 끝까지 추궁해서 그것을 알아낼 생각이었다.
“폐하, 왕실 보고에서 사검 바리사디를 꺼내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하지만 뜻밖의 말을 듣자 왕의 머릿속은 텅 비어 버리고 말았다. 한참 동안 공작을 쏘아보던 왕이 입을 열었다.
“너, 제정신이냐?"
“유감스럽게도 그렇습니다."
공작의 표정은 어디까지나 담담했다. 왕의 목소리가 절로 높아졌다.
“왜 검을 봉인했는지 잊은 건 아니겠지?”
"······.“
"네게 신성력이 있어서 괜찮을 거라고 말하지 마라 역대 주인들은 어디 힘이 없어서 잡아먹혔겠느냐?"
공작은 아무 말 없이 웃기만 했다. 왕은 그의 눈에서 고집스러운 결심을 느끼고 허탈해졌다.
“이제 와서 검을 찾는 것은 이블린 때문이겠지?"
“만약을 위해서입니다. 최대한 힘을 쓰지 않고 옆에 두려고 합니다.”
“그게 기능할까?"
왕은 회의적이었다. 공작이 이제 와 사검을 꺼내려는 이유를 알기에 더욱 그랬다.
“내가 아는 것을 남들이 모를 거라 생각하지 마라.”
이블린의 힘에 대해 알게 되면 누구든 손을 뻗을 것 이다. 이미 충분히 힘이 있는 자들은 검을 내밀 것이다.
알 수 없는 능력은 위험과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세스. 이블린을 지키려고 하면 너는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이다."
"상관없습니다.”
왕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블린이 대역이라는 사실은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사람이 된 시점에서 이미 대역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이블린은 자신이 대역이라 굳게 믿고 있으니 언젠가 주저 없이 훌쩍 떠나 버릴 터.
왕이 직접 그렇게 만들었다. 헛된 꿈은 꾸지 말라며 이블린을 시험했던 과거를 떠올린 왕은 약간의 고통을 느꼈다.
“어차피 네 검이다. 주인이 찾아가겠다는데 내가 막 올 수 있는 방법은 없겠지.”
"감사합니다, 폐하.”
왕의 허락 따위는 형식에 불과했다. 두 사람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왕은 조금 허탈한 얼굴로 물었다.
“대신관 후보는 어쩔 생각이냐."
“걱정하지 마십시오. 신성 왕국에선 아무런 항의도 하지 않을 겁니다.”
담담한 태도를 보니 벌써 손을 써 둔 모양이다.
이렇게 빈틈없는 녀석이 왜 자기 마음은 말도 안 되는 상대에게 줘 버린 것인지.
‘하긴 나도 녀석을 욕할 때는 아니군.’
이런 상황에서도 이블린에게 손을 쓸 생각은 들지 않는 것을 깨달은 왕이 한숨을 삼켰다.
두 사람은 내가 식사를 마친 뒤에야 돌아왔다. 왕은 왠지 화가 난 얼굴이었고, 세스는 무슨 일이 있었나는 듯이 덤덤한 표정이었다. 뿌루퉁한 눈으로 나를 노려본 왕이 선언했다.
“이블린, 바실리스크를 숨겨 둔 것에 대해선 죄를 묻지 않겠다. 대신 저것이 일으킨 일은 네가 모두 책임지고 수습해라.”
“정말 감사합니다, 폐하!"
나는 뜻밖의 관대한 판결에 기뻐했다. 두 마리 다 야생으로 돌려보내라고 할까 봐 겁을 먹었기 때문이다.
활짝 웃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왕이 갑자기 내 뺨을 세게 꼬집었다.
“그리고 넌 내일부터 출근해라. 휴가랍시고 가만히 내버려 뒀다간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네.”
나는 뺨을 꼬집는 아픔에 눈물이 핑 도는 것을 참으며 대답했다. 코웃음을 친 왕이 내 뺨을 놓아주었다.
"못된 것 너는 짐이 보고 싶지도 않았느냐?"
"예?"
"궁에 와서 짐올 보지 않고 그대로 돌아가 버린 것, 절대 잊지 않겠다.”
“아니, 그건 시녀장님이 따로 부르신 거라…….”
나는 다급히 변명했지만 왕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듣기 싫다. 내일 입궁하지 않으면 잡으러 올 테니 절대 늦지 말도록 해라.”
"폐, 폐하?"
팩 몸을 돌린 왕은 갑자기 들이닥친 것처럼 순식간 에돌아가버렸다.
황망해하는 나를 세스가 다독였다.
“어떡하죠. 폐하께서 저한테 화나셨나 봐요.”
"화나기보단 토라지신 거겠지.”
토라져? 의아해하는 나를 보고 세스가 덧붙였다.
“당신이 없는 동안 많이 심심하셨던 모양이야. 방해꾼이 사라지자마자 입궁하라고 재촉하시는 것을 보면.”
방해꾼이라는 말에 대신관 후보가 떠오르자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그러자 세스가 움찔했다.
“왜 그래?”
“아, 대신관 후보가 생각나서요. 몸이 마비된 건 복실이 엄마에게 부탁하면 풀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뒤가 문제네요.”
풀어주자마자 더 활기차게 난리를 치며 나를 공격할 것 같아서 걱정 이었다. 책임을 지라는 왕의 말만 아니면 영원히 모른 척하고 싶을 정도였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세스가 말했다.
"당신만 괜찮으면 대신관 후보 쪽은 내가 맡고 싶어. 아는 사이니까 교섭하기도 편할 거야.”
“아는 사이라서 더 불편하지 않을까요?”
“내가?”
아······. 그렇죠. 불편한 건 에어컨 바람을 맞는 상대 쪽이겠죠. 납득해 버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사실 그 사람이랑 만나는 게 좀 부담스러웠거든요. 억지로 신전으로 끌고 갈 것 같아서요.”
“걱정하지 마. 다시는 당신을 귀찮게 굴지 못하도록 할 데니까.”
세스가 안타까운 듯 내 뺨을 쓰다듬었다. 왕이 날 꼬집을 때 자국이 남은 모양이다. 뺨을 타고 전해지는 간지러운 애정에 나는 어깨를 움츠리며 웃었다.
* * *
헥터는 신성 왕국의 성기사였다.
출신은 미천해도 뛰어난 검술 실력을 가진 그는 대신관 후보인 밸런타인을 모시 게 되었다.
"무능한 새끼! 날 데리고 도망치라고 했잖아!"
그것이 불운임을 깨닫는 것엔 그리 긴 시간이 필요 하지 않았다.
“이건 다 네놈 때문이다! 네놈이 잘만 했어도 내가 이 꼴이 되진 않았어! 천하고 더러운 새끼!"
사지가 마비되어 드러누운 밸런타인은 똑같은 꼴이 된 헥터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괴물을 사냥하라고 고집을 부리고, 혼자 도망치겠다고 성기사들을 회생시킨 자신의 잘못은 조금도 떠오르지 않는 듯했다.
억울한 일이었으나 헥터는 눈을 감고 묵묵히 굴욕을 견뎠다.
“이 돼지, 정말 시끄럽네.”
그때 낯선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가느다란 눈과 뾰족한 얼굴 때문에 여우같은 인상의 남자가 마치 바닥에서 솟아난 것처럼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