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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아내로 취업합니다-76화 (76/240)

76화

"같이 안잘 거예요?"

"······.“

“침대 넓어서 괜찮은데. 저 잠버릇도 안 나빠요.”

이쪽으로 오라는 뜻으로 옆자리를 톡톡 치니 세스가 웃었다.

“당신 침대에 올라가면 시녀장이 나를 거꾸로 매달아놓고 회초리로 때릴 것 같은데.”

“제가 책임진다고 하면 되죠, 뭐.”

복실이 엄마가 내 말에 그르르 울음소리를 냈다. 왠지 지금상황을 재미있어 하는 것 같았다.

“어쨌든 서 있지 말고 이리 와요. 다리 아프잖아요.”

세스는 말이 없었다. 어두워서 그의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난감해한다는 것은 느껴졌다.

“세스가 싫어하는 짓은 안 할게요. 네?"

내가 살살 꼬드기자 세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내 옆이 아닌 바닥에 앉아 침대에 등을 기댔다.

“늦었으니 어서 자.”

나는 세스를 설득하는 대신 침대에서 내려와 그의 옆에 앉았다. 어깨가 스치니 움찔한 세스가 나를 돌아봤다.

“조금만 더 있다가 잘게요.”

"더 늦게 자면 내일 피곤할 텐데?"

“그래도 오랜만에 만났잖아요. 이대로 자기엔 너무 아까워서요.”

세스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걸 동의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지만 마음은 편안했다. 이대로 계속 세스의 옆에 앉아만 있어도 좋을 것 같았다.

그때, 우르릉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랐던 나는 그게 복실이 엄마가 코 고는 소리라는 것을 알아야겠다.

“엄청 피곤했나 봐요.”

“잠도 못 자고 돌아다녔겠지. 새끼를 찾아서 안심한 것도 있을 테고.”

내 속삭임에 세스도 소곤소곤 답했다.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니 간지러워서 웃음이 나왔다.

”······왜?“

“세스가 좋아서요.”

“갑자기?”

"음, 일단 목소리가 너무 좋아요. 제 취향이거든요. 그리고 은근슬쩍 남을 배려해 주는 점도요. 그럴 때마다 참 괜찮은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솔직하게 말하자 세스가 침묵했다. 한참이 지난 후 에야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당선은 가끔 날 당황스럽게 해.”

“그래서 싫어요?"

“전혀.“

나는 세스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가 어떤 감정인 지 느끼고 싶었다.

내 손을 잡은 세스가 손끝에 입술을 눌렀다가 놓아 주었다. 뜨겁고 간지러운 느낌에 손가락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이비, 내가 달라지면 당신은 날 싫어하게 될까?"

“음, 어떤 쪽으로요?"

“지금보다 더 잔인해지면?"

뜻밖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잔인한 세스라니, 본 적이 없어서 그게 어떤 느낌인지 잘 모르겠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게 아니라, 죽이는 걸 더 좋아하게 되면 어떨 것 같아?”

“세스, 출장이 그렇게 힘들었어요?"

걱정스럽게 묻자 세스가 웃었다. 이번엔 확실히 즐거워서 웃는 게 아닌 것 같았다.

“싫어하지 말아 줘.”

"······.“

"부탁이야. 나를 싫어하지 마.”

나는 다시 손을 뻗었다. 세스는 내가 만지는 것을 피하지 않았다 맞닿은 피부로부터 괴로운 감정이 전해 져서 조금 울고 싶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지금 생각하는 건 절대 하지 마세요. 세상에 자신을 망가뜨리면서까지 해야 하는 일은 없더라고요.”

어차피 죽으면 다 헛짓거리다. 내가 해 봐서 안다니까.

“그러다 소중한 컬 잃게 되면?"

"방법 이 딱 그거 하나밖에 없는 건 아니잖아요. 그것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싶은 거 아니에요?"

"······."

세스는 뭐든 혼자서 하려고 해서 큰일이다. 굳이 그럴 필요 없는데. 남에게 도움을 청하면 더 좋은 방법도 생길 텐데 말이다.

“그래도 꼭 해야 한다면 제가 대신할게요. 세스가 억지로 잔인해질 필요 없어요. 그런 거 어울리지도 않거든요. 그냥 저한테 다 맡겨요.”

나는 세스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안 그래도 상처가 많은 사람이다 그러니까 더 이상 상처받을 일은 하지마. 내가 대신해 줄게.

"그리고 전 절대로 세스를 싫어하지 않아요. 앞으로 어떻게 변해도요.”

세스가 변하면 나도 같이 변하면 된다. 그가 살인마가 되면 나는 증거 인멸 전문가가 되지, 뭐.

“정말 좋아한다니까요.”

내 말 못 믿니? 정말 좋아한다니까 그러네.

그러자 세스가 나를 꼭 끌어안았다. 너무 세게 안아서 살짝 숨이 막힐 정도였다. 내가 콜록 기침을 토한 후에야 세스가 나를 놓아주었다.

"키스해도 돼?"

떨리는 속삭임에 나는 그의 목을 더듬어 안았다. 대충 입술이라 생각되는 곳에 입을 꾹 누르자 세스가 키득거렸다. 어라, 여기가 아닌가?

손으로 입술을 찾아서 더듬으니 세스가 내 손끝을 살짝 깨물었다. 적진을 찾아낸 나는 얼른 입술을 꾹 눌렀다. 맞닿은 입술로 세스가 웃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눈앞이 핑 돌았다.

꿀처럼 달콤하고 독한 포도주를 마시는 기분이었다. 엄청 좋은데 엄청 어지러웠다. 넋을 놓아 버린 나대신 부드럽게 입맞춤을 이어 가던 세스가 천천히 떨어졌다.

눈을 마주한 그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아?”

"하, 한 번 더…….”

나는 바들바들을 떨면서 세스를 잡아당겼다. 기질하기 전에 한번 더할 거야!

하지만 세스가 피라냐처럼 덤벼드는 나를 막았다.

“그만 당신 취했어.”

“아니, 아닌데? 안 취했는데?”

“이런 모습도 귀엽지만 더 하면 기절할 거 같군.”

진짜 치사하다. 자기가 하고 싶을 땐 했으면서 왜 나는 못 하게 해 나는 억울함에 눈물을 글썽였다.

내가 홀짝이는 소리를 들은 세스가 눈가에 살짝 키스해 주었다.

"주정뱅이 아가씨, 이제 자.”

“주정뱅이 아닌데?"

세스가 나를 안고 등을 토닥거렸다. 입을 삐죽이던 나는 작게 하품했다. 갑자기 졸음이 몰려왔다. 등을 토닥이는 손길을 느끼던 나는 어느 순간 잠들었다.

잠결에 삐익삐익 복실이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배가 고픈 것은 아니고 잠자리가 바뀌어서 불편한 것 같았다 일어나려고 꾸물거리는 내 등을 다정한 손길이 토닥거렸다.

“걱정하지 말고 자.”

나는 어느새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이불까지 야무지게 덮은 것을 보면 세스가 옮겨 놓은 모양이다.

포근한 이불 속에서 뒤척이는 사이, 복실이가 잠투정하는 소리가 줄어들었다.

살짝 눈을 뜨자 세스와 복실이 엄마가 바구니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둘이 똑같은 자세로 있으니 조금 닮아보여서 웃음이 나왔다.

"울지 마. 착하지?"

세스가 쓰다듬자 복실이가 짹짹 소리를 냈다. 안심한 나는 다시 깊게 잠들었다.

* * *

"······불린 일어나라!"

”으응, 5분만…….”

“일어나!"

누군가가 내 등을 찰싹 때렸다. 깜짝 놀라 눈을 뜬 나는 왕의 얼굴을 보고 경기를 일으킬 뻔했다.

"폐, 폐하?"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꿈이 아니란 정말 온실에 왕이 서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인지 몰라 어리둥절해하는 나를 보고 왕이 한숨을 쉬었다.

"이블린, 지금이라도 솔직하게 말하면 용서해 주마 넌 사실 카스티야의 첩자인 것 아니냐?"

"예?"

“내 수명을 줄이려고 작정한 것 같으니 말이다."

왕이 털썩 침대에 걸터앉았다. 신분상 왕과 같은 곳에 앉을 수 없었던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삐우우…….

그때, 바구니 속에서 자고 있던 복실이가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안 된다고 손짓했지만 녀석은 꾸물꾸물 침대를 가로질러 기어 왔다.

얼른 복실이를 안아 들자 왕의 눈이 한층 가늘어졌다.

“그건 또 뭐냐?"

“어, 제가 어쩌다가 키우게 된 복실이입니다.”

“그럼 저건?"

왕이 아직 꿈나라를 헤매는 복실이 엄마를 가리켰다. 복실이 엄마가 슬쩍 눈을 떴지만,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이내 다시 잠들었다.

"복실이의 친엄마입니다. 보시다시피 여기저기 다쳐서 제가 임시로 보호하게 되었습니다.”

”……넌 저게 바실리스크라는 사실을 아느냐?"

"네, 공작님이 뿔이 있는 뱀은 바실리스크라고 설명해 주셨어요.”

갑자기 걱정이 된 나는 왕의 눈치를 보다가 물었다.

“폐하, 혹시 바실리스크는 집에서 키우면 안 되나요? 개인이 키우면 불법 사육인가요?"

“하야 진짜 미치겠구나.”

왕이 골치 아프다는 듯이 침대에 드러누워 버렸다. 반용을 보니 불법이 맞는 것 같아서 조금 주눅이 들었다.

-뿌뿌?

불안해하는 나를 느낀 복실이가 꼬물꼬물 움직였다. 나는 괜찮다고 복실이를 달래며, 심각한 상황이면 왕이 준 반지를 써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때, 왕이 내 쪽으로 돌아누우며 툭 내뱉었다.

“신성 왕국에서 온 대산관 후보 말이다.”

“네? 아, 그 사람이요.”

나한테 저주를 푸는 힘이 있는지 확인하겠다고 난리치던 진상 말인가.

"바실리스크에게 당해서 전신 마비가 되었다. 더구나."

"예?"

생각지도 못한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신성력이고 마법이고 듣질 않아서 회복될 희망이 없다고 들었다. 그런데 네 집에 떡하니 바실리스크가 있으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신기하다?"

왕이 나를 찌릿 노려봤다. 움찔한 나는 머리를 굴려 그럴듯한 답안을 쥐어 짜냈다.

“제가 바실리스크를 조종해서 절 비난하는 대신관 후보를 공격 했다고요?"

“흥, 아주 잘 알고 있구나.”

나와 복실이 엄마는 어제 처음 만난 사이지만. 그걸 사람들이 믿어 줄 리가 없었다. 잘못하면 내가 대신관 후보를 습격한 용의자가 될 상황이었다.

“그런데 세스이 녀석은 이렇게 중요한 일을 내게 숨기고 말이야!"

침대를 탕탕 내리치며 화를 내던 왕이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쟁반을 들고 안으로 들어오던 세스가 왕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여기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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