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참, 공작님께 소개시켜 드릴 손님이 있어요.”
세스의 시선을 착각한 이블린이 그를 뱀의 앞으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모리스는 이번에야말로 소리없는 비명을 질렀다.
당황한 것은 뱀도 마찬가지였다. 세스의 눈에는 뱀의 비늘이 올올이 일어서는 것이 보였다.
"복실이 친엄마예요. 복실이를 찾아서 여기까지 왔나봐요.”
"······."
“어? 왜 안 놀라지? 혹시 알고 있었어요?"
“아니 , 지금 무척 놀라는 중이야.”
세스는 진심으로 말했다. 뱀의 목적이 다름 아닌 복실이였다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새끼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진짜였군.’
두 뱀은 모자지간이지만 전혀 닮지 않았다. 바실리스크의 전형적인 외양을 가진 어미와 달리, 복실이는 털이 있는 작은 뱀처럼 보였다. 이런 경우는 딱 한 가지뿐이었다.
‘성장하면 진화할 수 있는 상위 개체.’
마수나 괴수 중엔 매우 드문 확률로 상위 개체가 태어나는 경우가 있었다. 이들은 성장을 마치면 진화하여 무리를 이끄는 우두머리가 된다.
복실이가 바로 바실리스크의 상위 개체였다. 지금은 작고 무해한 모습이지만 나중엔 어떤 모습으로 진화할 지 알 수 없었다.
-꾸우?
갑자기 심각해진 그의 분위기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복실이가 뺨을 비벼 댔다.
이블린을 만나기 전의 세스였다면 복실이가 상위 개체임을 아는 즉시 죽이려 했을 것이다. 미래에 어떤 위험이 될지 모르는 존재니까.
하지만······.
세스는 복실이의 머리를 살살 문질렀다. 그가 떠나 기 전보다 뿔이 조금 더 자라 있었다. 기분이 좋은지 뻑뻑 우는 소리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지금의 그는 그저 복실이가 튼튼하게 잘 자라 줬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이블린이 슬퍼하는 일이 없도록.
-구르르르
잔뜩 긴장하고 있던 뱀이 부드러운 울음소리를 냈다. 세스가 복실이를 해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 같았다.
"복실이를 찾으러 오다가 나쁜 사람들에게 많이 당했나 봐요. 여기 상처 좀 보세요.”
이블린이 뱀의 몸 여기저기에 파인 흔적을 가리켰다. 그중에서 자신이 직접 낸 상처를 발견한 세스가 슬쩍 눈을 피했다.
“그래서 말인데요, 치료를 위해서라도 당분간 복실이 엄마를 여기 두면 안 될까요? 네?"
이블린이 두 손을 모으고 간청했다. 분홍색 머리카락 여기저기에 톱밥이 붙어 있어서 꼭 톱밥의 요정처럼 보였다. 누구든 지금의 그녀를 보면 그게 어떤 부탁이라도 들어 줄 것이다.
세스는 충동적으로 이블린의 이마에 키스했다.
“정말 보고 싶었어, 이비."
떨어져 있는 5일 동안 그녀를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돌아오고 싶었다.
“당신이 원하는 건 뭐든 해도 돼.”
소식을 들은 시녀장이 쫓아온 것은 바로 뒤였다.
시녀장은 무사히 돌아오신 것을 환영하며 시종장이 목욕 준비를 해 두었다는 말로 그를 온실에서 쫓아냈다.
밖으로 나온 세스를 공작가의 주치의인 켄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전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켄트는 온실에 시선을 한번 두는 것으로 이블린에겐 비밀로 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고개를 끄덕인 세스가 함께 걷자는 제안을 했다.
“아가씨의 부탁으로 어미 바실리스크를 진찰했습니다. 그런데 몸에 특이한 상처가 있더군요.”
“어떤 상처지?"
"배를 한번 갈랐다가 꿰맨 상처입니다.”
켄트 박사는 자신의 배 위로 손가락을 그어 보였다.
"바실리스크는 배 속에서 알을 부화시켜 새끼를 낳는 생물입니다. 그래서 바실리스크의 알은 일반적인 상황에선 볼 수가 없지요.”
하지만 이블린은 자신이 알을 깨트렸고, 거기서 복실이가 나왔다고 말했다. 바로 그것이 문제였다.
"누군가 바실리스크의 배를 갈라서 알을 꺼낸 겁니다. 그걸 아가씨가 깨트리도록 유도했고요.”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바실리스크의 새끼는 그대로 죽었을 것이다. 새끼를 죽인 이블린은 어미 바실리스크의 공격을 받아 목숨을 빼앗기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도 함께 희생됐으리라.
“이건 아가씨를 노린 암살 계획입니다. 철저히 조사 해 주십시오.”
"반드시 그렇게 하지.”
세스의 확답에 안심한 켄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생각났는지 말을 덧붙였다.
“아, 배를 꿰맨 솜씨를 보면 의사는 아닌 것 같더군요. 분명 마법사입니다."
세스는 차갑게 웃었다. 어디로 가서 무엇을 파 봐야 할지 알 것 같았다.
“저희는 모릅니다! 적탑주가 비밀 공간 안에 바실리스크를 숨겨 뒀던 겁니다!"
"적탑수가 어디에서 바실리스크를 손에 넣었는지는 듣지 못했습니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
그의 손에 붙잡힌 마법사들이 뱉어 낸 정보였다. 그리고 나머지 단서는 켄트가 주었다.
적탑주는 비밀리에 알을 빼내는 수술을 하고, 그대가로 바실리스크를 넘겨받았을 것이다. 그것까지 상대의 계획에 들어 있는 줄도 모르고.
‘하지만 상대도 당황하고 있겠군.'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계획이 어이없이 무너져 버렸다. 아마도 분해서 길길이 날뛰고 있지 않을까. 피식 웃은 세스는 유리온실 쪽을 돌아보았다.
여기선 잘 보이지 않았지만, 이블린이 두 마리의 바실리스크와 함께 즐겁게 노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그리고 흐뭇한 미소를 지온 사람들이 그녀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원래는 불가능한 일이지'
바실리스크는 1급 괴수였다. 그건 절대로 길들여지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두 마리의 바실리스크는 순한 양처럼 이블린의 말에 따르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 또한 바실리스크에 대한 본능적인 불안감과 공포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친근한 이웃을 대하듯 먹을 것과 잠자리를 챙겨 주면서 돌봐 주려고 했다.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녀가 있으니 당연한 풍경처럼 느껴지는군.’
이블린은 자신의 힘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고 감정을 느끼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세스가 보기엔 그렇게 단순한 힘이 아니었다.
저주를 실체화하고 바실리스크를 길들인 것만으로도 그녀의 능력은 이미 기적에 가까웠다. 그것을 눈치 채고 이블린을 탐내거나 목숨을 노리는 자들도 늘어나리라
‘나도 이제 선택을 해야겠군.'
벌써 두 번째였다. 이블린에게 닥친 위험을 막지 못 하고 뒤늦게 후회하는 것이.
지금까진 운이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다음번엔 정말 그녀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
세스는 자신의 무력함을 절실히 느꼈다.
적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공격하고 있었다. 그걸 막기 위해선 감히 거역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힘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에겐 힘을 손에 넣기 위한 가장 빠른 수단이 있었다.
‘바리사다를 꺼내야겠어.’
그는 왕실의 보고에 봉인된 사검을 꺼내기로 마음먹었다. 죽음의 힘을 다루는 사검이라면 어떤 적이라도 베어 버릴 수 있으리라.
미래의 어느 순간, 이 선택을 후회할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세스는 결코 이블린을 잃을 수가 없었다.
* * *
나는 유리온실에서 잘 준비를 했다.
복실이 엄마는 복실이와 떨어지기 싫어하고, 복실이는 내가 없으면 불안해하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런 곳에서 어떻게 주무시려고요?"
시녀장은 질색하며 반대했지만 나는 지하실 바닥에 서도 잘 잤던 몸이다. 여기는 톱밥까지 소복하게 깔려 있으니 아무 문제도 없었다.
담요를 깔고 자려는 나를 보고 펄쩍 뛴 시녀장이 급하게 잠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짚으로 된 매트리스에 천을 씌우자 근사한 침대가 되었다.
“고마워요, 리드 부인"
“아가씨가 이런 짐승들 때문에 왜 불편을 겪으셔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시녀장은 한숨을 푹푹 쉬었지만, 그래도 복실이가 들어 있는 바구니를 내 옆에 놓아주었다.
복실이는 피곤했는지 몸을 둥글게 말고 자는 중이었다. 세상모르고 잠든 것 같아도 내가 없으면 바로 알아채고 울기 때문에 옆에 둬야 했다.
복실이 엄마는 그런 복실이를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자는 모습을 처음 봐서 신기한 모양이었다.
“아가씨께 조금이라도 해를 끼쳤다간 산 채로 구워 버리겠습니다. 명심하십시오.”
시녀장이 복실이 엄마에게 경고했다. 복실이를 보고도 기겁하던 사람이 지금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복실이 엄마도 그녀의 위엄에 짓눌린 듯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왜 혼나는 분위기지?”
그때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온실 안으로 들어왔다. 평소보다 편안한 차림의 세스였다. 나는 깜짝 놀라서 몸을 일으켰다.
"공작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
“당신을 지켜 달라는 시녀장의 부탁을 받았거든.”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시녀장을 바라봤다. 그러자 시녀장이 한숨을 쉬었다.
"저 뱀의 뭘 믿고 아가씨와 단둘이 남겨 두겠습니까. 그래도 전하께서 여기 계시면 저것이 무슨 짓을 해도 막을 수 있겠지요.”
짧은 설명에서 시녀장의 고뇌가 느껴졌다.
"날 믿어 줘서 감사해야겠군.”
“이런 곳에서 허튼짓을 하지 않을 만큼 자제심 있는 분이라 믿고 있습니다.”
경고 섞인 대답에 세스가 말없이 웃었다. 뭐라 더 말하려던 시녀장이 포기하고 나를 돌아봤다.
"문 밖에 경비를 세워 두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소리를 지르십시오.”
“걱정하지 마세요, 리드 부인."
세스가 소리를 지르면 모를까, 내가 도움을 청할 일은 없었다.
한숨을 쉰 시녀장이 절을 했다.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그녀가 램프를 들고 사라지자 온실 안이 어두워졌다. 그래도 바깥의 조명이 남아 있어서 아주 캄캄하지는 않았다.
나는 어둠 속에서 윤곽만 보이는 세스를 응시했다. 왠지 그와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났다. 내 시선을 느낀 세스가 말했다.
“난 여기 있을 테니까 안심하고 폭 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밤새도록 거기 서 있을 생각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