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공작은 별다른 반용을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왕은 계속해서 그를 설득했다.
“이블린은 착하고 좋은 아이지. 하지만 출산이 너무 나도 천해 자식을 낳는다고 해도 결국 반쪽짜리 취급을 당할거다."
"······."
“그걸 그 똑똑한 아이가 모르겠느냐? 그 애는 은혜를 갚고 나면 훌쩍 떠날 거다. 네가 아무리 애원해도 돌아보지 않을 거야.”
왕은 예언의 까마귀처럼 불길한 미래를 늘어놓았다. 그러자 쓴웃음을 지은 공작이 물었다.
"폐하, 저는 폐하께서 왜 그렇게 먼 곳을 바라보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자식이나 결혼을 원한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까?"
왕은 한숨을 쉬었다.
누군가를 애틋하게 생각하게 된 지금도 공작을 둘러싸고 있는 절망은 전혀 옅어지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과거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었다.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어쩔 수가 없구나. 이블린에 대한 문제는 더 이상 거론하지 않으마.”
공작이 감시를 표하듯 고개를 숙였다. 왕은 공작을 호출한 이유로 넘어갔다.
"동부의 농가에서 보이지 않는 괴물이 가축을 잡아먹었다는 신고가 늘어나는 중이다.“
"보이지 않는 괴물 말입니까?"
“그래. 밭에 통나무를 끌고 지나간 것 같은 자국이 생겼다거나, 염소나 양이 한입에 잡아먹혔다는 목격담이다. 짐작 가는 것이 있느냐?"
공교롭게도 마차에서 입에 담았던 이름이 떠올랐다.
바실리스크. 왕관과 같은 뿔을 머리에 인 거대한 뱀.
어마어마한 덩치에도 은신의 능력이 있어 눈에 잘 띄지 않으며, 바위를 녹일 정도로 강한 독도 있다. 단단한 비늘은 일류 기사의 검으로도 베어 내기 힘들었다.
뱀답게 교활하고 영리하며, 동족애가 강해서 한 마리가 죽으면 계속해서 찾아와 복수한다.
바실리스크 한 마리가 나라를 멸망시킨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아니, 이 정도 단서 로 바실리스크라 확정할 수는 없다. 섣불리 판단하면 피해가 더 커지게 돼.’
공작은 마음을 가라앉혔다.
"은신형 마물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나머지는 현장을 보고 판단해야할 것 같습니다.”
“이번에도 네게 짐을 맡기는구나.”
왕이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그가 왕가에 저지른 짓을 용서해 준 것에 비하면 이 정도는 짐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공작은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이블린을 데려다준 후 현장으로 출발하겠습니다.”
“그래. 부탁하마.”
그때까지 공작은 마물이 노리고 있는 목표가 누구인지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
신성 왕국의 대신관 후보, 밸런타인은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
교만한 성품인 그는 대신관 후보 경쟁에서 제일 뒤 처져 있었다. 그래서 부족한 지지도를 올리기 위해 이블린 하인즈를 찾아왔다.
성녀의 힘으로도 어쩌지 못한 저주를 풀어 신전의 위신을 추락시킨 여자. 그럼에도 성물의 힘이라고 뻔뻔하게 거짓말까지 한 고약한 이교도.
‘교활한 계집은 매로 다스려야지.’
밸런타인은 이블린을 제 뜻대로 움직일 수 있다고 확신했다. 사방을 들쑤셔 논란을 일으키면 지쳐 버린 왕이 이블린을 내놓을 거라는 계산이었다.
그런데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왕실 근위 기사라는 놈들이 몰려와 생명의 은인을 건드리지 말라고 경고할 때부터 분위기가 안 좋았다.
그리고 뜬금없이 물의 신전까지 들고 일어났다.
“밸런타인은 자신이 손에 넣지 못하는 인재를 짓밟는 악독한자다! 피해자가한둘이 아니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였다. 그런데 상인들을 중심으로 안 좋은 소문이 빠르게 퍼져 나갔다.
“선전으로 오라고 강요하고 말을 듣지 않으면 축이 거나 폐인으로 만들어 버린대!"
"급사한 천재들은 모두 그가 뒤에서 손을 썼다는 소문이 있더라고."
“아니, 그런 자가 어떻게 대신관 후보가 됐지?"
“이건 비밀인데, 돈을 주고 자리를 샀다는 말이 있어.”
“세상에, 말세로군!”
너무 하찮아서 무시했던 말들이 화살로 돌아와 몸에 박히기 시작했다. 감히 그를 조롱하고 풍자하는 길거리 연극까지 생겼다.
자신을 연기하는 배우에게 욕설과 쓰레기가 쏟아지는 것을 본 밸런타인은 누군가의 강한 적의를 느꼈다.
‘이건 분명 뒤에서 주도하는 자가 있다. 나를 매장시키려는 속셈이야. 대체 누구지?'
밸런타인의 머릿속엔 온갖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지만 범인이라고 딱 짚이는 사람은 없었다. 그때 밸런타인을 수행하는 산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엘마이어 공작 아닐까요?"
"흥, 그럴 리가 없다."
밸런타인은 엘마이어 공작을 잘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 빛났던 영광스러운 모습에서 사검의 선택을 받아 신전에서 쫓겨나던 순간까지 모조리 지켜봤다. 한때는 그가 동경하고 질투했던 사람이었으니까.
"공작은 어머니처럼 길러 준 성녀님 때문에 신전에 해가 되는 일은 절대 못 하는 놈이다.”
“하지만 이번에 손에 넣으시려는 이블린 하인즈가 엘마이어 공작의 약혼녀라고 들었습니다.”
신관이 포기하지 않고 어리석은 말을 해 댔다. 밸런타인은 대놓고 그를 비웃었다.
“그 말을 믿나?”
“예?"
"출신도 모를 천한 여자가 진짜 공작의 약혼녀일 리가 없지. 뭔가를 가리기 위한 연막에 불과할 거다. 아 마왕이 억지로 갖다 붙인 거겠지.”
밸런타인은 자신의 예리한 안목과 판단력을 믿었다. 하지만 신관은 여전히 탐탁찮은 얼굴이었다.
“어쨌든 지금은 반전이 필요해. 배후를 잡지 못한다면 다른 일로 시선을 돌려서라도 분위기를 바꿔야 한다!"
“아, 그런 거라면 최근에 들은 소식이 하나 있습니다."
다른 수행 신관이 호들갑을 떨며 입을 열었다. 처음의 뻣뻣한 놈과 다르게 입맛에 맞는 이야기를 할 줄 아는 자였다.
"동부 시골에 마물이 나왔답니다. 보이지 않는 마물 인데, 그걸 용이라고 부르더군요.”
"흥, 용은 무슨 지나가는 구렁이를 잘못 보고 착각 한 거겠지.“
“시골 무지렁이들이야 워낙 아는 것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오히려 잘된 일이 아닙니까?”
뒤늦게 그 말을 알아들은 밸런타인의 얼굴에도 화색이 돌았다.
“그래. 잘된 일이군.”
멍청한 놈들이 용이라고 믿는 괴물을 그가 잡는다면 안 좋은 소문도 단숨에 사라질 것이다. 어차피 괴물 사냥이야 신전에서 데려온 성기사들이 알아서 할 테니 자신이 힘을 쓸 일도 없었다.
“그래서 그 괴물이 어디에 있다고?”
* * *
현재 밸런타인은 진흙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처음 괴물 사냥에 나설 때만 해도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성기사들은 잘 훈련된 개처럼 괴물의 흔적을 쫓았다. 밸런타인은 그 뒤를 따라가며 올통볼통한 시골길을 욕하기만 하면 됐다.
그런데 괴물이 있을 거라 추측되는 장소에 도착하니, 화려한 로브를 뒤집어쓴 일곱 명의 남자들이 바닥을 뒤적거리고 있는 게 보였다.
‘마법사! 더러운 이교도 놈들!'
이런 시골구석에 괜히 마법사들이와 있을 리가 없었다. 자신의 사냥감을 빼앗으러 온 것이다!
“저 더러운 흑마법사 놈들을 붙잡아라! 저놈들이 괴물을 조종하는 것이 틀림없다!"
“무슨 헛소리야!"
밸런타인이 누명을 씌우자 화가 난 마법사 중 하나가 공격을 해왔다.
견제용 마법이었지만 밸런타인은 신이 나서 소리쳤다.
“이것 봐라! 감히 대신관이 될 이 몸을 공격하다니! 악독하기 짝이 없는 놈들이다. 당장 죽여라!"
머뭇거리던 성기사들이 어쩔 수 없이 검을 뽑았다.
그때였다. 마법사들 바로 옆에서 무언가가 스르륵 움직였다.
“아악!”
주문을 외우던 마법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나자빠졌다. 제일 앞에서 달려들던 성기사 몇 명도 마찬가지였다.
"배. 뱀!"
밸런타인이 학질에 걸린 것처럼 몸을 떨었다. 거대한, 옆에 서 있는 나무가 작아 보일 정도로 거대한 뱀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머리에 숭숭 돋은 뿔은 가시처럼 흉측했고, 번들거리는 노란 눈에는 살의가 번뜩였다. 새카만 비늘은 그 자체로 흉기였다.
겁을 먹은 밸런타인은 이성을 잃고 소리쳤다.
“나를 지켜! 뭣들 하느냐! 당장 나를 지켜라!"
뱀의 눈을 보지 마라! 바닥에 물웅덩이가 있다! 물에 비친 그림자를 보고 공격해라!"
성기사들의 리더가 소리 높여 외쳤다.
자신을 먼저 보호하지 않는 것에 욕을 내뱉으려던 밸런타인은 몸의 이상을 느꼈다. 팔다리가 돌처럼 무거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독인가?'
신성력을 일으켜 자신을 치료하려던 밸런타인은 온 몸의 감각을 잃고 바닥에 나됭굴었다.
“지금 신성력을 쓰시면 안 됩니다!"
"닥······.“
닥치라고 말하려는 순간, 입 안에 진흙이 들어왔다. 밸런타인은 강제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가 쓰러져 있는 사이, ‘콰앙, 쾅!' 하고 뭔가가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점점 저항하는 소리가 줄어들다 마침내 뚝 그쳤다.
섬뜩한 정적 속에서 밸런타인은 뭔가가 스스슥 다가오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살기 위해 몸부림쳤지만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가 없었다.
습하고 눅눅한 뱀의 숨결이 코앞에서 느껴졌다. 밸런타인은 죽음을 예감하며 눈을 감았다.
그런데 바로 그때, 섬뜩한 기운이 다가와 뱀을 후려 쳤다
-카아악!
날카로운 비명을 지른 뱀이 밸런타인을 내버려 둔 채 도망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