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나는 서둘러 편지를 뜯은 후에 읽기 시작했다.
[친애하는 이블린, 휴가 중임을 알면서 이런 편지를 보내는 나를 용서 하세요. 재대로 예의를 갖추고 싶은데 정말 경황이 없군요.
면목이 없지만 당신의 도움이 꼭 필요합니다.
혹시 오늘 보고에 들러 줄 수 있나요?
자세한 이야기는 편지에 쓸 수가 없어요. 하지만 당신이라면 어느 정도 사정을 짐작하리라 생각해요.
이렇게 간절히 부탁할게요.
진실로 도움이 필요한 피오나가.]
피오나처럼 완고한 사람이 이렇게 너덜너덜해진 걸 보니 아무래도 성검이 또 사고를 친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왕궁에 가야 할 것 같아요.”
“폐하를 뵈어야 하는 일입니까?"
“아뇨, 그냥 보고에만 들렀다가 돌아올 거예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 시녀장이 시녀들을 닦달해 내 치장을 돕게 했다.
나는 주머니에서 슬쩍 복실이를 꺼내 녀석의 침대에 넣어 주었다.
"엄마 회사 다녀올게 잠시만 여기 있어.“
-뿌?
복실이가 이상하다는 듯이 머리를 흔들었다. 나는 그런 녀석에게 이불을 덮어 주고 몸을 돌렸다.
복실이가 내 관심을 끌려는 것처럼 짹짹 울었지만 애써 돌아보지 않았다.
* * *
"오랜만이야."
마차 앞에 서 있는 세스의 모습에 나는 반사적으로 도망칠 뻔했다. 세스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왜 그렇게 놀라?"
“아, 아뇨, 세스가 여기 있을 줄은 몰라서······.”
“나도 왕궁에 볼일이 있어서 같이 동행하려고.”
나는 그 말이 진짜인지 고민하며 세스를 바라봤다.
세스가 작게 웃었다.
“정말이야 폐하께서 부르셨거든.”
머쓱해진 내가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세스가 손을 내밀었다. 나는 얼떨결에 그의 손을 잡고 마자에 올랐다.
잠시 후 마차가 출발한 뒤에도 굉장히 어색한 공기가 우리 사이에 맴돌았다. 이마에서 진땀이 날 것 같았다.
‘아이고, 복실이 키운다는 말을 진작 할걸. 괜히 숨겨서 이게 뭐야.’
사람이 죄를 짓고는 못 산다더니, 괜히 찔려서 세스의 얼굴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
'지금이라도 이야기해 버리자. 복실이라고 우연히 주운 뱀인데 털이 나고 불도 있지만 착한 애라고. 아니, 일단 뿔이랑 털 이야기는 숨길까?'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는데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세스가 굉장히 괴로운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이비, 혹시 내가 당신을 서운하게 했어?”
"······네?"
“당신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해서? 아니면 백탑주에게서 제대로 보호하지 못해서? 어떤 게 당신을 화나게 했는지 모르겠어.”
아냐, 나는 당신이 삽질을 하고 있다는 걸 알겠어!
"잠깐만요. 그런 게 아니에요. 제가 다 설명할게요.”
다급하게 소리치는 순간, 주머니 속에서 뭔가가 꿈틀거렸다. 놀라서 악 소리를 낸 나는 주머니 속에 있는 것을 잡아 빼냈다.
“헉, 복실아!”
언제 내 주머니에 숨어 들어왔는지 모를 복실이였다. 뭐 때문인지 잔뜩 화가 난 복실이가 용수철처럼 내 손바닥에서 튀어 오르더니 세스에게 날아갔다. 그리고 세스는 매우 가볍게 복실이를 낚아챘다.
"악! 안 돼 ! 죽이면 안 돼요!"
나는 기겁하며 세스에게 매달렸다. 나를 힐끗 본 세스가 복실이를 쥔 손을 느슨하게 풀었다.
손에서 스르륵 빠져나온 복실이가 세스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러더니 난데없이 그의 손목을 꼬리로 휘감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복실아?"
방금 전까지 화난 거 아니었어? 너도 얼굴을 보니?
세스는 코브라처럼 춤을 추는 복실이를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반대쪽 손을 들어 올린 그가 복실이의 머리를 톡 건드렸다. 그러자 복실이가 그의 손을 입으로 콕 찍으며 애정 표현을 했다.
‘앗, 저건 나한테만 해 주던 건데.’
그동안 열심히 먹이고 재워서 키웠더니, 내가 아니라 처음 보는 잘생긴 사람에게 필살 애교를 떨고!
복실이, 너 그런 뱀이었어?
갑자기 자식을 빼앗긴 기분이 된 나는 침울해졌다.
“당신을 지키려고 나를 공격하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
나는 우울한 눈으로 반짝거리는 세스의 얼굴을 바라 봤다. 내가 일주일 동안 빡세게 노력한 것을 얼굴 하나로 무너뜨리다니, 역시 세상은 미모가 전부구나.
“이비?"
시무룩해진 나를 알아챈 세스가 움찔했다.
나는 그가 내 유치한 마음까지 눈치채기 전에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저, 그동안 제가 밖에 나오는 일이 뜸했던 건 사실 복실이 때문이에요. 복실이가 너무 어려서 돌봐 줘야 했거든요.”
나는 유리온실에서 알을 깨트린 이야기와 그동안 복실이를 어떻게 돌봤는지까지 모두 털어놓았다.
“다른 사람들이 열심히 도와줬지만 제가 손을 놓을 수가 없어서 조금 바빴어요. 그것 때문에 세스가 걱정 할 거라는 생각은 못 했어요. 정말 미안해요.”
그러자 긴 한숨을 쉰 세스가 나를 꽉 껴안았다.
나는 어쩐지 오랜만이라고 생각하며 그를 마주 안았다. 따뜻한 체온을 느끼자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세스의 손을 타고 내 어깨로 기어 올라온 복실이가 짹짹 소리를 냈다 고개를 든 세스가 웃었다.
“일주일이나 엄마를 독차지 했으면 아빠한테 양보할 줄도 알아야지.”
-뽑!
"······아빠요?"
“당신이 성수를 부어 준 것 때문에 날 아빠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
알고 보니 성수에 들어 있던 신성력은 세스가 자신의 힘을 불어넣은 거였다. 태어나자마자 성수를 받아먹은 복실이는 그게 아빠의 기운이라고 착각한 거고.
‘그럼 아까 세스에게 애정 표현을 했던 것도 아빠라고 생각해서였어?!'
세스가 복실이의 턱을 간질이자 녀석이 기분 좋은 듯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같이 키웠으면 좋았을 텐데.”
"매번 제가 사고를 치고 세스가 수습하니까. 이번에는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쉬운 일도 아니고, 번거로운 육아를 세스에게 맡기고 싶진 않았다. 세스는 이미 나를 돌본다고 고생하고 있으니까.
“다시는 그러지 마 당신이 멀어지는 것 같아서 힘들었어.
“미안해요.”
나는 세스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내 머리를 쓰다듬은 세스가 다시 한 번 긴 한숨을 쉬었다. 그걸 들으니 진짜 마음고생을 한 것 같아서 더 미안해졌다.
“당신이 산책을 나오지도 않고, 유리온실에도 나타나지 않아서 이젠 내가 싫어진 걸까 생각했어.”
“그렇게 걱정되면 찾아오지 그랬어요. 그럼 바로 들통 났을 텐데.”
“당신이 날 보고 기겁할까 봐 두려웠거든.”
나는 세스가 너무 바빠서 내게 선경 쓸 시간이 없는 줄 알았다. 하지만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렇게 땅을 파고 있었을 줄이야 이러다 지구 반대편까지 뚫고 나가겠다.
나는 고개를 들고 세스를 용서했다.
“우리 세스는 바보네요. 싫어하게 될 리가 없잖아요. 전 진짜 진짜 세스를 좋아하거든요?"
“······.”
나를 바라보는 세스의 푸른 눈이 살짝 일렁거렸다.
처음엔 빙하 같다고 생각했던 눈이 투명한 바다처럼 나를 담고 있었다. 너무나 아름다운 색이었다.
나는 충동적으로 몸을 일으켜 세스의 눈가에 입을 맞췄다. 움찔한 세스가 나를 붙잡았다. 나는 신경 쓰지 않고 그의 이마와 콧등, 뺨에 골고루 뽀뽀해 주었다.
뽀뽀하는 동안 조금 알딸딸해졌지만 그래도 세스가 나한테 해 줄 때만큼은 아니었다.
‘오, 그럼 이젠 내가 먼저 키스하면 되는 거 아냐?'
왠지 신이 난 나는 씨익 웃었다. 귀 전체가 빨개진 세스가 조금 원망스럽게 나를 쳐다봤다.
“부족해요? 더 해 줄까요?"
“이비, 지금 내가 키스하면 당신이 기절할 수도 있어.”
세스가 경고하듯 으르렁거렸다. 나는 얼른 어깨 위의 복실이를 건드렸다.
"복실아. 아빠가 엄마한테 화내는데, 어떡하지?"
-부뿌뿌!
복실이가 그러지 말라는 것처럼 세스에게 뿌뿌거렸다. 순간 난처한 표정이 된 세스가 허탈하게 웃었다.
"둘이 한통속이 군.“
“그럼요. 제가 일주일이나 더 복실이를 키웠거든요.”
나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러자 복실이가 몸을 쭉 빼서 내 뺨에 입을 콕 찍었다. 귀엽고 하찮은 애정 표현에 나는 풋 웃어 버리고 말았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것을 세스에게 물어봤다.
“세스, 전에 복실이랑 비슷한 뱀을 본 적 있어요?"
“아니, 이렇게 영리한 녀석은 처음 봐.” 복
실이 아버지 이제야 복실이 존재를 알게 됐으면 서 왜 팔불출 같은 소리를 하는 거죠?
“그럼 비늘 대신 온몸에 털이 있고 머리에 뿔이 있는 뱀이 뭔지 알고 있어요?"
”뿔?“
"복실이 머리에 뿔이 있어요. 처음엔 없었는데 오늘 보니까 돋았더라고요.”
내 설명에 세스가 복실이의 머리를 만져 뿔을 확인 했다. 복실이는 그가 쓰다듬는 줄 알고 꼬리를 휘저으며 좋아하고 있었다.
“정말 뿔이 있군.”
불 모양을 확인한 세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 모습을 보자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왜 그래요? 안 좋은 거예요?"
“아니, 잠시 다른 생각을 했어.”
"숨기지 말고 말해 줘요. 네?"
뭔가를 망설이던 세스가 입을 열었다.
“내가 알기로 뿔이 있는 뱀은 한 종류뿐이야. 바실리스크라는 이름의 1급 괴수지.”
"바실리스크요?"
어디선가 들어 본 이름인데. 해리포터에 나오는 거대한 뱀이 그런 이름 아니었나? 하지만 개는 뿔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