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 * *
"······심심해.“
나는 침대에 축 늘어져 있었다.
너무 심심하고 할 일이 없어서 죽을 것 같았다.
잠은 안 오고, 책도 눈에 안 들어오고, 귀찮은 손님 때문에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아, 백탑주인지 뭔지 빨리 집에 좀 가 줬으면.’
아무리 봐도 정상이 아닌 것 같은 백탑주는 나를 자기 고향으로 데려가겠다는 예고장을 날린 상태였다.
그러고는 아주 뻔뻔한 얼굴로 프리지어 궁까지 찾아 왔다. 기겁한 시녀장이 놈을 상대하는 동안 나는 방에 꽁꽁숨어 있어야했다.
백탑주씩이나 되는 대단한 마법사가 갑자기 핵 돌아서 쳐들어오면 막을 사람이 없으니까.
‘빨리 세스가 왔으면 좋겠다.’
하필 세스는 왕의 부름으로 궁에 간 상태였다.
세스만 집에 있었으면 저런 미친놈 때문에 숨어 있지도 않았을 텐데, 억울했다.
“아가씨!"
그때 안나가 노크도 없이 후다닥 뛰어 들어왔다. 그녀는 손으로 승리 의 상징을 만들며 웃었다.
“시녀장님이 그 미친놈을 멋지게 쫓아내셨어요!"
“정말?"
"네, 사람을 붙여서 마탑으로 돌아가는 것까지 확인 하셨어요.”
안나의 말에 나는 겨우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벌떡 일어나서 기지개를 켜자 온몸의 뼈가 두둑 소리를 냈다.
"난 산책 갔다 올게. 계속 방에만 있었더니 몸이 영 찌뿌듯해.”
“제가 따라갈게요."
“아냐 유리온실만 확인하고 돌아올 거야.”
세스가 나를 위해 개조한 유리온실은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아직 채소를 심지는 않았지만 영양액 공급기나 배양 탱크 같은 것들이 조금씩 늘어나는 중이었다.
커다란 플라스크나 유리관이 연결된 배양 탱크를 보다 보면 채소가 아니라 다른 생물을 키워야 할 것 같았다.
‘왠지 갈수록 내가 아는 수경 재배랑 달라지고 있는데.’
세스의 예상대로 마탑에서는 이미 ‘영양'에 대한 개념도 있었고, ‘수경 재배'의 원리에 대해서도 연구를 끝낸 뒤였다.
다만 땅에 심는 것에 비해 돈과 비료가 많이 들고 실용성이 없어서 연구 결과가 그대로 버려졌다고 했다.
내가 영양액이 필요하다고 하자 선뜻 연구 자료와 도구들을 넘겨줄 정도였다.
이제 종자만 구하면 바로 재배가 가능했다.
그런데 이상할 정도로 이번 일에 열정적인 총관 할아버지가 꼭 자신에게 종자를 맡겨 달라고 부탁했다.
이곳에서 자라는 채소에 대해 잘 모르는 나는 선선 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뭐가 문제인지 아직도 종자가 도착하질 않아서 재배를 시작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할아버지 말로는 지금 배를 타고 오는 중이란다.
‘그냥 평범하게 양배추 같은 거라도 괜찮은데, 대체 뭘 심으려는 거야?'
강한 의문이 들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나는 정원용 마차를 타는 대신 뚜벅뚜벅 걸어서 유리온실에 도착했다. 그리고 문을 열고 안으로 한 걸음 들어서자마자 뭔가가 발에 차여서 퍽 하고 깨졌다.
“엄마야!”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서니 작은 멜론 크기의 알이 보였다. 분명 문을 열고 들어올 때만 해도 아무것도 없었는데,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이게 뭐야?"
나는 조심스럽게 알을 옆으로 치웠다. 그렇게 세게 찬 것 같지도 않은데, 껍질이 깨져서 내용물이 거의 다 흘러나온 상태였다.
‘누가 장난친 건가?'
그런데 엉망이 된 바닥에서 뭔가가 꿈틀거렸다. 손 바닥만한크기의 가느다란 아기 뱀이었다.
평소라면 기겁하며 피했겠지만 하필 내가 알을 깨 버리는 바람에 죽게 된 녀석이었다. 죄책감을 느낀 나는 조심스럽게 녀석을 주워 들었다.
꿈틀거릴 힘도 없는지 옆으로 누운 아기 뱀이 한쪽 눈 떠서 나를 바라봤다. 녀석의 눈은 루비처럼 붉은 색이었다.
“아이고, 진짜 미안해.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변명하던 나는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성수를 꺼냈다. 내 주변에서 수상한 일이 많이 일어나는 것을 걱정한 세스가 준 선물이었다.
‘이게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입으로 뚜껑을 딴 나는 아기 뱀의 몸에 조심조심 성수를 부었다. 죽은 듯 늘어져 있던 녀석이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더니 성수를 꿀꺽꿀꺽 받아 마시기 시작했다.
나는 녀석의 입 가까이에 병을 대 주었다. 그러자 아기 뱀은 병에 매달려 성수를 모조리 마셔 버렸다. 손가락처럼 가는 몸에 들어갈 양이 아닌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때 아기 뱀의 몸이 반딧불처럼 은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마치 세스가 신성력을 일으켰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잠시 후, 빛이 가느다란 몸에 스며들더니 보송보송한 흰털로 변했다.
“헉. 이게 뭐야?”
뱀 몸에 털이 돋다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요?
‘성수가 아니라 발모제였나?'
황당함에 굳어 버린 나와 달리 아기 뱀은 완전히 쌩 쌩해졌다. 녀석은 작은 머리를 코브라처럼 흔들면서 춤추었다. 루비처럼 붉은 눈이 반짝반짝 빛나며 내 얼굴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아니, 이걸 어떡하지?"
일단 살리긴 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잠시 머뭇거리던 나는 일단 녀석을 감싸 쥐고 방으로 돌아갔다.
* * *
마탑의 어둠 속에서 짐승이 눈을 떴다.
이곳으로 잡혀 오기 전에 소중히 몸에 품고 있었던 알 인간들에 의해 강제로 뜯겨 나간 그 알이 방금 깨졌다.
-크르르르······ 크아아악!
짐승은 사납게 울부짖으며 벽에 몸을 부딪쳤다. 너무 거세게 부딪쳐 비늘이 찢기고 피가 튀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몇 번이고 몸을 부딪치던 짐승은 어느 순간 낯선 공기가 흘러 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주 희미한 공기의 흐름. 짐승이 있는 공간에 작은 틈이 생겼다.
어둠 속에서 샛노란 눈알이 번뜩였다.
짐승은 아주 천천히 틈을 향해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 * *
나는 아기 뱀에게 복실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하얀 털이 복슬복슬해서 굉장히 귀여웠기 때문이다.
아직 아기라서인지 복실이는 2시간마다 한 번씩 밥을 달라고 짹짹 울어 댔다.
복실이의 밥은 곱게 간 날고기 였다. 복실이는 그걸 손가락만큼 먹고 따뜻한 물주머니 옆에서 잠을 잤다. 그리고 다시 2시간 후에 배가 고프다고 짹짹 울었다.
다행히 내겐 복실이의 육아를 도와줄 사람이 많았다.
온몸이 보송보송한 털로 뒤덮인 복실이는 뱀보다는 귀여운 인형처럼 보였다. 그래서인지 시녀들도 별거 부감 없이 복실이를 쓰다듬고 예뻐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목욕물을 데워 오거나, 침대를 만들어 오는 사람도 있었다.
모두의 보살핌과 애정 속에서 복실이는 무럭무럭 자랐다. 일주일이 지나자 손가락 굵기였던 몸통은 손가락 한 개 반 정도로 굵어졌다.
이제는 혼자서도 꿈틀꿈틀 잘 기어 다녔고 인형을 꼬리로 휘감고 머리로 툭툭 밀면서 놀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손이 많이 가는 것은 똑같았다.
복실이는 돌봄이 익숙한 시녀들보다 서툴기 짝이 없는 내 손길을 더 좋아했다. 시녀들과 잘 놀다가도 갑자 기 열심히 내 쪽으로 기어 왔다.
잠시라도 내가 사라지면 울면서 이리저리 찾아다녔다. 아무래도 나를 엄마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휴가가 끝나면 어떡하지? 데리고 출근해야 하나?'
복실이가 워낙 작아서 주머니에 넣고 출근해도 아무도 모를 것 같았다. 하지만 도중에 잃어버리면 찾을 수 없다는 게 문재였다.
그때 복실이와 놀아 주던 안나가 말했다.
“아가씨, 이제 전하께 복실이에 대해 말씀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응?"
“전하께서 복실이를 싫어하진 않으실 것 같아서요. 오히려 아가씨처럼 귀여워하실 것 같은데.”
나는 세스에게 아직 복실이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이유는 별것 없고 그냥 미안해서였다. 대역으로 살고 있는 주제에 팔자 좋게 반려동물을 기르겠다는 말을 하기가 멋쩍었다.
‘세스는 이미 눈치챈 것 같긴 하지만.’
내가 복실이를 기르는 건 모르지만 다른 곳에 한눈을 팔고 있다는 것은 아는 듯했다. 다만 지금은 바빠서 어쩔 수 없이 넘어가는 기색이었다.
‘고백을 하긴 해야 하는데…….’
그 순간, 복실이를 쓰다듬던 안나가 깜짝 놀라며 외쳤다.
“어머, 아가씨!”
“응?”
"복실이에게 뿔이 있어요!"
“뭐라고?"
나는 후다닥 안나에게 달려갔다. 복실이를 받아 들 고 머리를 슬슬 문질러 보니, 진짜 조그마한 불 한 쌍이 돋아나 있었다.
"······복실아, 너 왜 불이 있어?"
멍하게 중얼거리니 고개를 갸웃한 복실이가 부부하고 울었다. 그래, 생각해 보니 뱀은 ‘짹짹’이나 ‘부부' 하고 울진 않지.
“여기 뱀은 뿔이 있는 거야?"
“아뇨, 아가씨.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들려요.”
“저도요. 뱀은 원래 뿔이 없을걸요.”
확인을 위해 묻자 시녀들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혹시나 했던 나는 시무룩해졌다.
“그래도 귀여우니까 괜찮지 않을까요?"
“맞아요, 복실이는 뿔이 있어도 귀여워요.”
시녀들이 열심히 나를 위로했다. 아니, 표정을 보니 진심인 것 같았다.
“하긴, 복실이는 귀여우니까 괜찮아.”
나도 덩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복실이가 기쁜 것처럼 짹짹거렸다.
그때, 누군가가 똑똑 내 방문을 두드렸다. 지금 내 방에 올 사람은 시녀장밖에 없었다.
"네, 들어오세요!"
나는 얼른 복실이를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말했다.
시녀장은 뱀을 무서워해서 복실이를 볼 때마다 파랗게 질리곤 했다. 서로 마주치지 않는 것이 행복할 것 같았다.
복실이를 경계하듯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들어온 시녀장이 은쟁반에 담긴 편지를 내밀었다.
“아가씨, 왕궁의 시녀장이 긴급으로 서신을 보냈습니다. 급한 일인 것 같아 제가 직접 가져왔습니다.”
“시녀장님이요?"
피오나가 급하게 편지를 보내다니, 무슨 일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