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그리고 조만간 물의 신전도 당산을 도와줄 테고.”
"물의 신전이요?"
사실 나는 물의 신전이 있다는 사실도 오늘 처음 알았다. 세스를 포함해 아스트리아 왕국의 사람들은 대 부분 대지신의 신도니까.
"물의 선전은 유독 아스트리아에서 맵을 못 추는 종교라 어떻게든 이름값을 높이려고 애를 쓰고 있지. 그런데 당신이 방금 그들에게 길을 열어 줬잖아.”
“제가요?"
“생명을 키우는 것은 흙이 아니라 흙속에 들어 있는 영양이다. 물에서도 얼마든지 생명을 키울 수 있다. 그럼 그 말을 들은 물의 신전에선 앞으로 어떻게 나올까?”
어, 잠깐만 내가 방금 ‘대지의 신전 VS 물의 신전을 만든 건가?
“하지만 아직 사실로 증명된 건 아니잖아요.”
물론 내 말이 사실이라는 것은 전생의 기억이 증명했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그걸 입증할 수 있는지는 별 개의 문제다.
“이런 문제에서 진실은 중요하지 않아. 당신이 그렇게 주장하기만 해도 논란의 불씨는 던져지는 거지.”
음, 하긴 마탑에서 ‘영양'을 밝혀낸다고 해도 대지의 신전이 ‘아, 그러네요. 저희 흙은 별 볼 일 없는 거였군요.’ 하고 고개를 끄덕일 리 없었다. 온갖 난리를 피우며 아니라고 하겠지.
"물의 신전에서도 적극적으로 싸울 거야 미래의 공작 부인이 대지의 신전을 버리고 자신들의 손을 잡아 줬잖아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지. 당신의 명령이라면 끓는 물에라도 뛰어들걸?"
세스가 부드럽게 눈을 휘며 웃었다.
우와, 악당 같은데 멋있어. 나는 거의 홀린 것처럼 세스를 바라봤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대지의 산전과 완전히 척을 지는 거 아니에요?"
걱정스러운 내 말에 세스가 고개를 저었다.
“이쪽에서 먼저 시작한 일이 아니니까. 이 정도로 등을 돌린 것을 보면 외려 당황해서 당신을 달래려고 할 걸 그때 적당히 애를 태우다가 손을 잡아 주면 돼."
그러니 나는 그냥 가만히 기다리면 된다고 세스가 말했다.
자기들끼리 치고 박고 싸울 테니 구경이나 하다가 이득만 쏙쏙 골라 먹으라고. 먼저 시작한 것은 저쪽이니 꺼릴 것도 없다면서.
나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싱긋 웃은 세스가 언제 왔는지 멀찍이서 대기 중이던 제스터에게 손짓했다.
잠시 후, 향초를 넣고 구운 어린 양고기가 테이블 위에 올라왔다. 세스가 손수 고기를 썰어 내 접시 위에 올려 주었다.
민트 소스를 뿌린 양고기는 놀라울 정도로 맛있었다.
* * *
백탑주, 히페리온은 우선 공작에 대해 알아봤다
7년 전쟁의 영용. 학살자. 정복자.
공작에 대한 이야기에는 하나같이 죽음과 피비린내 가가득했다.
악마와 계약했다거나, 자신의 형을 죽였다거나, 약혼녀에게 검을 휘둘렀다는 끔찍한 소문도 있었다.
그중에서 약혼녀를 축일 뻔했다는 이야기가 히페리온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블린은 어째서 이런 남자와 약혼을 한 거지?'
생명력이 넘치는 이블린에게 공작은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상대였다. 히페리온은 고녀가 강요에 의해 묶여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고민 끝에 그는 이블린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몇 번을 고쳐 쓴 끝에 영혼의 짝 같은 말은 모두 빼버렸다 이런 중요한 말은 적어도 그녀의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결국 목숨을 살려 준 은혜에 감사하며 꼭 만나고 싶다는 평범한 편지가 되었다.
하지만 이블린의 답장은 정중한 거절이었다.
그의 목숨을 구한 것은 우연이며, 감사의 마음만 받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절망한 히페리온은 더욱 정성껏 편지를 썼다.
이번엔 일족과 저주에 대한 내용, 그리고 그녀를 회색 산맥으로 데려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담았다. 일족 모두가 그녀를 환영할 거라는 사실을 몇 번이나 강조 했다.
하지만 이블린은 이번에도 거절의 답장을 보냈다. 몇 번을 더 보내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되자 그녀의 약혼자가 만남을 막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그리고 고뇌하던 히페리온에게 마침 좋은 기회가 생겼다.
마탑에서 공식적으로 이블린에게 선물을 보내기로 한 것이다. 그는 재빨리 심부름꾼의 대표 자리를 꿰찼다.
하지만 떨리는 마음으로 프리지어 궁에 도착한 그를 맞이한 것은 차가운 얼굴의 시녀장이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께서 몸이 불편하시어 손님을 뵙기 힘들 것 같다고 양해를 구하셨습니다.”
“······.”
히페리온은 머릿속이 텅 비는 것을 느꼈다.
이블린은 분명 마탑의 방문을 허락했었다. 하지만 심부름꾼의 대표가 그라는 것을 알자 곧바로 만남을 거부해 버린 것이다.
이 정도로 자신을 피하다니, 그녀에게 무슨 큰 실수라도 했나싶었다.
멍하게 서 있는 그를 대신해 함께 온 마법사들이 시녀장을 설득했다.
“저희는 마탑의 심부름꾼입니다 그저 마탑의 친우가 되신 이블린 아가씨를 뵙고 은혜에 감사드리려는 것뿐, 다른 의도는 일절 없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아프신 분을 끌어내 이 자리에 세울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시녀장의 눈에서 느껴지는 것은 명백한 적의였다. 그녀는 새끼를 품은 짐승처럼 잔뜩 독이 올라 있었다.
결국, 마탑의 마법사들은 시녀장에게 가져온 선물을 내밀며 이블린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시녀장은 썩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대신 감사를 표하며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이블린을 만날 수 없다는 현실에 실망한 히페리온이 시무룩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는 회색 산맥으로 돌아가 오래된 저주가 풀렸다는 사실을 일족에게 알려야 합니다. 그래서 당분간 아가씨를 뵈러 올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순조로운 여행 이 되길 빌겠습니다.”
시녀장이 예의 바른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영원히 돌아오지 말라는 뜻을 전하고 있었다.
울컥한 히페리온이 쏘아붙이듯 말했다.
“전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생명을 구해 준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그녀와 만날 겁니다.”
“뜻대로 하시지요. 그때는 엘마이어의 가문의 문턱이 결코 낮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실 것입니다.”
싱긋 웃는 시녀장은 주인인 공작처럼 오만하고 불쾌한 모습이었다.
히페리온이 시녀장과 다투고 있을 때, 허름한 옷을 입은 남자가 정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마법사들을 따라온 마탑의 짐꾼이었다.
그는 연신 숨을 헐떡이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가슴 앞에는 하얗고 둥근 알을 꼭 껴안은 채였다.
"부모님을 살리고 싶다면 이 알을 프리지어 궁에 숨기세요.”
알을 준 여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메아리쳤다.
남자는 못 하겠다고 고개를 내저었다. 부모님의 목숨은 소중하지만, 귀족의 집에서 수상한 짓을 했다간 나머지 가족들의 목숨도 위태로워질 게 뻔했다.
여자의 말대로 알을 감싼 천을 벗겨 내자 아무도 그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장막이 그를 숨겨주는 느낌이었다.
남자는 연신 헐떡거리며 뛰듯이 걸음을 옮겼다. 바로 앞에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는 유리온실이 보였다.
목적지를 발견하자 안도감에 눈물이 나올 뻔했다.
“성공한다면 당신이 평생 일해도 벌 수 없는 돈을 상으로 받게 될 거예요.”
하지만 알을 내미는 여자의 얼굴엔 붉은 회초리 자국이 가독했다. 누군가 사정없이 매질한 흔적이었다. 그것이 꼭 그가 받게 될 대가를 상징하는 것만 같았다.
귀족인 게 분명한 여자의 얼굴까지 매질한 배후는 자신처럼 하찮은 평민은 아무렇지도 않게 없애 버리리라.
‘나만 죽이고 부모님은 살려 줬으면 좋겠다.’
코를 훌쩍인 남자가 유리온실 안에 알을 숨기기 위해 바삐 몸을 움직였다.
반쯤 쫓겨나듯 밖으로 나온 히페리온은 힘없이 걸음을 옮겼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탑주인 그가 묵묵히 걷기만 하자 마법사들도 차마 말을 걸지 못하고 그 뒤만 따랐다.
그때, 공작가의 경비병으로 보이는 자가 낯익은 사람을 끌고 왔다. 마탑에서 짐꾼으로 데려온 청년이었다.
“아니, 자네 대체 어디 갔다 오는 건가?”
수행원을 관리하는 마법사가 황당한 얼굴을 했다. 워낙 정신이 없어서 도중에 사람 한 명이 사라진 줄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죄송합니다. 주변을 구경하다가 그만 길을 잃었습니다. 이렇게 넓고 복잡한 곳은 처음이라…….”
짐꾼이 민망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이어서 경비병이 딱딱한 얼굴로 말했다.
“정원에 수상한자가 돌아다니고 있어서 붙잡았습니다. 일행이십니까?"
"예,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원래는 이렇게 경솔한 사람이 아닌데 이런 장소에 온 것이 처음이라 그만 흘려버린 모양입니다.“
마법사가 연신 사과를 했다. 귀족의 거처를 멋대로 돌아다니다니, 마탑에서 첩자를 심으려 했다고 오해를 받아도 할 말이 없었다.
"절차 때문에 몸수색을 했으나 딱히 발견된 것은 없었습니다. 원래는 위에 보고를 해야 하지만 실수라고 생각해서 넘어가겠습니다. 좀 더 조심해 주시기 바립니다."
차갑게 경고한 경비병이 짐꾼을 놓아주었다. 짐꾼은 연신 허리를 굽실거리며 일행 속에 섞여 들었다.
“멋대로 돌아다니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자네는 탑으로 돌아가서 나 좀 보세!"
“정말 죄송합니다.”
그때, 히페리온은 짐꾼의 몸에서 비릿한 기운을 느꼈다. 워낙 약해서 정신을 집중해야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무슨 기운인지 확인해 보려던 히페리온은 이내 그만뒀다. 뭔가를 의욕적으로 할 기분이 아니었다. 그는 짐꾼을 무심하게 지나쳐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