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사교계의 중심이 될 사람은 새로운 변화를 일으켜 야 하지요. 이건 아가씨의 첫걸음이 될 겁니다.”
“채소 키우는 걸로 첫걸음이라니······.”
“고기만 먹으면 물린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귀족의 체면에 채소를 탐할 수가 없었던 것뿐이지요. 하지만 먹어도 안전한 채소가 나온다면 다들 못 이기는 척 따라할 겁니다. 이건 분명 듭니다!"
갑자기 채소 예찬자로 돌변한 할아버지가 두 눈을 반짝거리며 장담했다. 제스터가 역시 귀족은 제멋대로라고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할아버지를 막을 수가 없었던 나는 도움을 청하듯 세스를 바라봤다. 하지만 세스는 거기서 한술 더 떴다.
"물의 신전에 기부금을 보내고 채소를 키울 신관을 파견해 달라고 요청해야겠어.”
“그것 참 좋은 생각이십니다, 전하. 신관이 직접 키운 채소라면 감히 천하다고 말하지도 못하겠지요. 물의 신전과 싸울 생각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할아버지가 껄껄 웃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약간 당황해서 물었다.
“저, 그러면 대지의 신전 쪽에서 싫어하지 않을까요?"
지금은 탈덕했다지만, 세스는 대지의 신전에서 성기사가 되기 위해 수련했던 몸이다.
그런데 갑자기 경쟁 업체나 다름없는 곳에 돈을 내고 사람을 부르다니. 느닷없는 배신에 대지의 신께서 분노할까 봐 걱정이었다.
하지만 세스는 싸늘하게 웃었다.
“괜찮아. 그쪽에서 먼저 내 체면을 봐주지 않았으니 당해도 할 말은 없겠지.”
은은한 분노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나는 멍하게 눈을 깜빡이다 물었다.
"혹시 대지의 신전과 무슨 일이 있었어요?"
"······."
그때, 제스터가 매우 부자연스럽게 헛기침을 했다.
“전 새로 스테이크를 구워 올게요.”
“앗, 아니에요. 그냥 이거 먹으면 돼요.”
손도 대지 않은 고기에게 미안해진 나는 그를 말렸다. 하지만 제스터는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미 식었잖아요. 이런 건 식으면 맛이 없어요.”
사슴 고기 집시를 번쩍 들어 올린 제스터가 그것을 할아버지에게 떠넘겼다.
“자, 방해꾼인 우리는 이만 사라지자고.”
“식사를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할아버지의 말에 세스는 고개만 끄덕였다. 짧게 목례한 둘은 마치 도망치듯이 멀어졌다.
나는 약간의 초조함을 느꼈다. 왠지 세스의 기분이 푹 가라앉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비, 리처드 프림로즈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어?"
“대충은 알아요.”
얌생이 녀석이 자신은 결백하다며 난리를 친댔지.
“결론만 말하자면 그는 반역자들에게 협조했어. 하지만 일방적으로 정보만 뜯긴 쪽이었던 것 같아.”
얌생이는 생긴 것보다 더 덜떨어진 녀석이었다.
술집에서 친해진 친구에게 왕에 대한 정보를 나불거릴 정도로 멍청하기도 했다. 친구가 준 성물이 비싸 보이자 품에 넣고 다닐 정도로 아무 생각이 없었다.
내가 이 녀석의 가족이라면 머리통을 연달아 후려쳤을 것 같았다.이런 멍청한 형제를 가진 마리아 프림로즈가 진심으로 불쌍했다.
"반역자들이 리처드 프림로즈에게 성물을 준 이유는 아직 확실하지 않아. 멀쩡히 살려서 인질로 삼을 생각 이었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어.”
“우와아······."
확실히 그런 상황이라면 얌생이가 억울하다고 난리 칠 만도 했다. 자긴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할 테니까!
“그럼 그 사람은 무죄예요?"
“그럴 리가 진실로 몰랐다고 해도 국왕에 대한 정보를 반역자들에게 팔아넘긴 죄는 그리 작지 않지.”
이건 반역죄도 아니고 멍청죄다. 어떤 의미로는 정말 감탄스러웠다.
“폐하께선 이번 일을 고삐 삼아 프림로즈 가문을 길들이려 하셨어 하지만 새로운 변수가 생겼지.”
“아, 그게 혹시 대지의 신전인가요?"
“맞아. 신전에서 당신을 요구했어.”
찍었는데 맞았다는 기쁨을 느낄 새도 없었다.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나 자신을 가리켰다.
"저요?"
대지의 주신전은 신성 왕국에 있었다.
왕국의 우두머리는 대지신의 최고위 사제인 성녀였다.
다만 성녀는 상징적인 존재에 가까웠고, 실질적인 권력자는 나라를 다스리는 대신관과 성기사단장이었다.
그리고 나를 달라고 왕에게 요구한 사람은 바로 자기 대신관후보 중하나였다.
“오, 그럼 세스도 어릴 때 신성 왕국에서 살았어요?"
뜬금없는 내 물음에 세스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제일 궁금한 게 그거야?"
"다른 건 제가 안 물어도 설명해 줄 거잖아요.”
어차피 말해 줄 거 입 아프게 왜 물어본단 말인가. 내 말에 허를 찔린 표정이 된 세스가 피식거리며 답해 줬다.
“맞아. 주신전에서 자랐어. 달리 궁금한 건?"
“어릴 때 성기사단장 후보였어요?"
“······왜 그렇게 생각해?"
"그야 제가 본 사람 중에서 세스가 제일 강하니까?"
히히 웃으며 말하자 세스의 얼굴이 미묘해졌다. 귀 끝이 빨개진 것을 보면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다.
“그것도 맞아."
“어느 게 맞아요? 후보였던 거? 제일 강한 거?"
"둘 달."
세스가 애써 뻔뻔한 척 답했다. 그래 봤자 귀가 더 빨개지면 소용없는데요, 김세스 씨.
"친구는 많았어요?"
“이비, 계속 나에 대한 것만 물어볼 거야?"
친구가 없었군.
내가 다 이해한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얄밉다는 듯이 나를 흘겨본 세스가 입을 열었다.
"친구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아니었던 사람은 많았지.”
왠지 상처가 느껴지는 말이었다. 뜨끔해진 나는 재 빨리 화제를 돌렸다.
"취미는 뭐였어요? 검 말고 좋아하는 건 없었어요?"
내 질문에 세스는 한참을 고민했다. 아니, 자기가 좋아했던 게 뭔지 그렇게 고민할 정도야? 엄청 팍팍하게 살았나보다.
"노래 부르는 걸 좋아했던 것 같아. 성가대에 있었는데 그리 싫진 않았거든.”
“오, 성가대요?"
순간 내 머릿속에 성가대복을 입은 어린 세스가 열심히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떠올랐다. 내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하는 게 한이 될 정도로 귀여웠다.
"저도 세스 노래 듣고 싶어요.”
초롱초롱한 눈으로 쳐다보자 세스가 당황했다.
“이젠 안 불러."
"왜요!”
"불이 났을 때 연기를 마셔서 목소리가 이상해졌거든.“
"······."
세스의 인생엔 왜 이렇게 지뢰가 많단 말인가. 과거를 팔때마다 함정에 걸리는 느낌이었다.
“그렇지만 저는 지금 세스의 목소리가 좋은걸요.”
“그렇게 생각하는 건 당신뿐일걸.”
아니, 당신 목소리가 얼마나 섹시하고 미쳤는지 몰라? 음, 생각해 보니 나만 알아도 될 것 같았다.갑자기 침착해진 나는 세스를 살살 꼬드겼다.
“그럼 저한테만 불러 주면 되잖아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그러지.”
"좋아요, 약속한 거예요?"
나는 오늘부터 세스가 불러 줬으면 하는 노래 리스트를 만들기로 했다. 갑자기 야망에 활활 타오르는 나를 보고 세스가 헛기침을 했다.
“다시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서, 대신관 후보가 당신을 만나게 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어.”
알고 보니 원인은 이번에도 백탑주였다.
과거 대지의 신전에서 백탑주의 저주를 풀겠다며 나섰다가 망신을 당한 일이 있었다.
심지어 성녀의 성물까지 동원했지만 실패해서 체면을 구기고 말았다. 그래서 성물로 저주를 풀었다는 내 말을 믿지 않고 사실을 추궁하러 온 것이다.
성녀의 성물보다 내 성물이 더 성능이 좋다는 사실 올 믿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대신관 후보는 당신에게 저주를 느끼고 풀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직접 검증하고 싶다더군.”
“검증이요?”
"말이 검증이지 능력이 있으면 신전에 귀속시키고, 능력이 없다면 신성 모독이라고 짓밟을 생각이겠지.”
세스는 굉장히 자존심이 상한 것 같았다.
멀리 떠나왔지만, 자신의 친정집이라고 생각했던 곳에서 갑자기 뒤통수를 때렸으니 화가 날 만도 했다.
“그럼 얌생이네 집에서 또 난리를 쳤겠네요.”
“신전의 검증이 끝날 때까진 당신의 말을 믿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중이야. 사실 리처드 프림로즈의 죄는 이미 밝혀져서 명백한 사실인데도 말이야.”
내 능력을 검증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자 얌생이가 누명을 쓴 게 아니냐는 의견도 커지고 있다고 했다. 물론 얌생이네 집과 대지의 신전 쪽에서 열심히 부추기는 중이었다.
‘와, 이게 이렇게 또 뒤집힐 수가 있네.’
명백한 사실을 거짓으로 만들다니. 여론의 힘이 대단하긴 하다.
“상황은 알겠어요. 그럼 전 뭘 하면 돼요?"
얌생이 쪽을 쥐어 팰까? 아니면 신전 쪽에 가서 깽판을 칠까? 뭐든 말만 해!
의욕으로 넘치는 나를 보고 세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할 필요 없어”
"네? 하지만…….”
“당신이 이미 모든 수를 다 뒀으니까. 더 손을 대면 역효과가 날거야.”
내가 뭘 했지? 열심히 머리를 굴려 봤지만 떠오르는 게 없었다. 내가 어리동절해한다는 것을 깨달은 세스가 작게 웃었다.
"당신이 목숨을 구해 준 기사들, 특히 근위대장이 반격에 나섰어. 현장에 없었던 사람은 입을 다물라고 강경하게 나온 거 같더군. 그래서 중립이었던 쪽도 빠르게 당신에게로 돌아서는 중이야.”
오오, 역시 함께 싸운 동지는 다르구나. 근위대장님 최고! 의리의 싸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