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저를 적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블린과 저는 영혼의 짝이니까요. 당신이 그녀의 약혼자라면 저와도 친구가 될 수 있을 겁니다.”
히페리온은 어떻게든 공작의 적대감을 줄여 보려고 애썼다. 사실 그도 이블린에게 자신 외의 남자가 있는 현실이 달갑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상황 이라면 서로 친해지려고 노력은 해야 했다.
“내겐 적과 친해지는 취미는 없는데.”
“저는 당신의 적이 아닙니다. 영혼의 짝은 모든 것을 나눌 수 있는 상대입니다. 이블린이 당신을 사랑한다면 저도 그러기 위해 노력할 겁니다.”
히페리온은 공작에게 영혼의 짝이 무엇인지 설명했다. 영혼의 짝은 연인을 의미하는 게 아니며 평생을 함께 할 친우에 가깝다는 것. 이성이 아니라 동성과도 짝이 될 수 있으며, 반드시 한 명이라고 정해진 것도 아니라는 것까지.
하지만 공작은 차갑게 조소할 뿐이었다.
"글쎄 내 귀에는 문란한 관계를 정당화하기 위한 핑계로만 들리는군.”
이쯤 되자 히페리온도 화가 나기 시작했다.
"신성한 관계를 당신의 편견으로 더럽히지 마십시오. 우리는 운명이 정해 준 한 쌍입니다."
순간 공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공작이 당장 그를 죽일 것 같은 눈으로 내뱉었다.
"네가 무슨 자격으로 그런 말을 지껄이지?"
“진실한 사랑과 믿음 그것이 내 저주를 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이블린은 저주를 푸는 것으로 내 운명의 상대라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히페리온은 자랑스럽게 말했다. 공작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녀가 왜 그런 걸 증명해야 하지? 네가 그녀에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어서?"
히페리온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에겐 너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기에 오히려 이유를 떠올리기 어려웠다.
“그게 우리의 운명이니까요. 그녀도 분명 영혼의 짝인 나를 만나서 기뻐하고 있을 겁니다.”
"백탑주, 내가 널 죽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나?"
살기가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에 몸이 절로 움찔했다. 히페리온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는 내 유일한 사람이다. 네가 아니라 그 누구에 게도 넘겨줄 생각이 없어.”
“이러지 말고 이블린을 만나게 해 주십시오. 그녀가 깨어나서 나를 보면 분명 내 말이 옳다고 해 줄 겁니다.”
히페리온은 당당하게 말했다. 공작이 아무리 날뛰어도 운명은 자신의 편이니 결코 두렵지 않았다.
"말로 해서는 안 되겠군.”
"······."
히페리온은 공작의 온몸에서 흘러넘치는 죽음의 기운에 경악했다. 어떻게든 방어해야 한다는 생각에 술식을 짜려했지만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었다.
평생을 바친 마법도 압도적인 죽음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이미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봐주는 것은 이 번뿐이다.다음엔 목숨을 잃을 각오를 하고 덤벼.”
공작이 사라진 뒤에도 히페리온은 선뜻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마치 죽음 바로 앞까지 갔다가 겨우 살아 난 기분이었다.
‘그건 대체 뭐였지?'
끔찍하고 불길한 기운.
떠올리기만 해도 덜덜 떨리는 몸에 히페리온은 비참함과 패배감을 느꼈다. 몇 번을 다시 싸워도 공작을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다.
실의에 빠진 그에게 때마침 일족이 보낸 서신이 도착했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아들, 히페리온이여.
일족의 오랜 저주를 물리쳤다는 인간 여인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위대한 분께서 그 여인을 직접 보고 저주를 물리친 힘을 확인하길 원하신다.
회색 산맥으로 돌아올 때 그녀와 동행하도록 해라.
너의 저주가 풀린 것에 모두가 기뻐하고 있다. 하루라도 빨리 건강해진 네 모습을 보고 싶구나.]
서신을 읽은 히페리온은 마치 악몽에서 깨어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고향으로 그녀를 데려간다.’
대대로 내려온 일족의 저주를 푼 이블린은 모두에게 감사를 받아 마땅했다. 분명 일족들은 그녀의 순수함과 용기를 존경하고 사랑할 것이다.
히페리온은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고 포기할 순 없다고 다짐하며 주먹을 굳게 쥐었다.
***
나는 왕의 생명을 구해 낸 상으로 유급 휴가를 얻었다. 보석과 상금도 함께였다.
백화점에 식품관을 추가하고 싶었던 나는 기쁜 마음으로 상금을 챙겼다. 백화점 총책임자인 마커스 씨에 게 당장 편지를 써야할 것 같았다.
반면 내 주변 사람들은 고작 돈으로 입을 닦은 왕을 몹시 괘씸해했다. 특히 총관 할아버지는 당장 궁에 쫓아가 지팡이를 휘두를 기세였다.
"원래라면 훈장을 받고도 남았을 일입니다. 그걸 이렇게 단순하게 넘겨 버리다니요!"
할아버지는 왕의 처사가 불공평하다며 계속 분통을 터트렸다. 하지만 나는 왕에게 전혀 서운하지 않았다.
‘지금 이름으로 훈장 받아 봐야 뭐 해. 어차피 2년 뒤엔 쓸 수도 없을 텐데.'
훈장으로 딱지 칠 게 아니면 굳이 집착할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왕이 이렇게 한 이유도 대충은 짐작이 갔다.
‘아마 얌생이 가문에서 날 물고 늘어지는 거겠지.’
세스의 방에 있을 때, 얌생이 가문에서 내가 누명을 씌웠다고 난리를 친다는 소리를 들었다. 이런 논란이 있는 상황에 내게 훈장을 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왕은 이번 일이 잠잠해질 때까지 나를 입궁시키지 않을 생각인 것 같았다. 언제까지라고 딱 정해지지 않은 휴가 기간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어, 손수건 공장은 어떡하지?’
뒤늦게 손수건 공장을 떠올린 나는 다이애나에게 사정을 알리는 편지를 썼다. 내가 출근을 하지 않아서 작업이 멈춰 버렸을까 봐 걱정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무려 5장이냐 되는 답장이 도착했다.
[손수건 작업은 아무 문재도 없었어요. 이블린이 그려 둔 도안이 있으니 똑같이 만들 수 있었거든요.]
내가 성검에게 시달리는 동안 의상부 시녀들은 캐릭터 그리기를 연습했던 모양이다.
다이애나의 말에 따르면 앤이 가장 열심히 연습해서 이젠 나와 비슷할 정도로 능숙하게 그린다고 한다. 반면 카밀라는 여전히 캐릭터 그림에 적응을 못 해 고생 중인모양이다.
내가 없어도 공장이 잘 돌아간다는 사실에 기쁘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했다.
[그리고 손수건 주문이 늘었어요. 근위 기사대와 왕실 수호 기사단까지 예약을 하러 왔답니다. 유명한 기사들까지 나타나서 다들 난리였어요.]
다이애나는 기사 누구누구가 왔었다고 이름을 적었지만 나는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제아무리 유명한 기산도 거대 지네를 단숨에 갈라버린 세스만큼 멋있을 것 같진 않았다.
[참, 이블린이 국왕 폐하의 목숨을 구했다는 소문이 짝 퍼졌어요. 다들 그게 사실인지 열심히 토론 중이에요.]
심지어 다이애나에게도 뭐가 사실인지 묻는 편지가 몇 통이나 왔다고 했다.
[전 사실이 아니길 원하고 있어요. 이블린, 당신이 반역자들의 검 앞에 몸을 던지다니. 그런 일은 없었지요?]
이어서 다이애나는 내게 너무 무모하다, 폐하께 충성을 다하는 것도 좋지만 자신의 몸도 생각하라며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잔소리만으로 편지 한 장이 훌쩍 넘어갈 정도였다.
[핀은 이블린을 따라 자신도 마탑에 갔어야 했다고 아쉬워하지 뭐예요. 자기가 가면 큰 도움이라도 될 줄 아나 봐요. 정신 차리라고 한마디 해 줬어요.]
마지막으로 핀을 신나게 헐뜯은 그녀는 내가 없어서 곰탱이가 쓸쓸해하고 있다고 전했다.
[저도 당신이 없어서 쓸쓸해요. 그렇게 큰일을 겪었으니 쉬어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너무 보고 싶은걸요.]
다이애나는 나만 괜찮다면 만나러 가는 것을 허락해 달라는 말로 편지를 마무리 지었다.
‘세스에게 다이애나를 초대해도 되냐고 물어봐야겠다.’
세스는 물론 괜찮다고 하겠지만 집주인의 허락도 없이 손님을 부를 수는 없으니까.
나는 부지런히 내 머리를 빗질 중인 안나를 불렀다.
“안나, 공작님은 지금 어디 계셔?"
“전하께선 지 금 폐하를 뵈러 입궁하셨어요, 아가씨.”
“어? 진짜?"
세스가 무슨 일로 입궁했지?
혹시 내 일 때문인가 싶어 불안했지만, 출장에 대한 보고를 하러 갔을 수도 있었다. 나는 세스가 돌아올 때 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 * *
"공작님!”
나는 세스가 보이자마자 신나게 손을 흔들었다.
산책을 하다가 우연히 세스와 마주친 것처럼 연출하려 했던 시녀장이 이마를 짚었다.
아이고. 미안해라. 그래도 반가운 걸 어떡해요.
고삐를 당겨 덩치 큰 흑마를 멈춰 세운 세스가 그림 같은 동작으로 말에서 뛰어내렸다. 위험하고 멋지고 아주 난리가 났다.
뒤따르는 사람들을 내버려 둔 채 성큼성큼 다가온 세스가 나를 답삭 안아 들었다. 나는 시녀장이 기겁하는 것을 모른 척하며 세스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다녀오셨어요?“
나는 세스의 뺨에 얼굴을 부비부비했다. 눈을 크게 뜬 세스가 살짝 웃었다.
“전하, 어서 내려 주십시오."
시녀장이 안절부절못하며 말했다. 망나니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나와 다르게 그녀는 아직도 내 평판을 신경 썼다.
나는 세스가 나를 내려놓기 전에 얼른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저랑 같이 점심 먹어요.”
세스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솔직히 말해 봐. 노리는 게 나야, 아니면 샐러드야?"
“당연히 둘 다죠.”
나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왜 하나만 노려야 하지?
피식 웃은 세스가 내 이마에 쪽 입을 맞췄다.
“옷 갈아입고 나올게. 정원에서 같이 점심 먹자.”
갑작스러운 뽀뽀에 해롱해롱해진 나를 시녀장에게 안겨 준 그가 유유히 사라졌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나는 시녀장의 매서운 시선을 받아야 했다. 이러면 나만 혼나잖아. 세스, 이 배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