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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아내로 취업합니다-64화 (64/240)

64화

나는 왠지 얼굴이 빨개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별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부끄럽지.

"다른 것도 먹어 봐.”

나는 세스가 권하는 빵을 꾸역꾸역 삼키다가 콜록 기침을 토했다. 곧바로 오렌지 주스가 담긴 잔이 입가에 대어졌다.

“······.”

왠지 강아지 물 먹이는 것 같은 분위기에 원인 모를 부끄러움이 스르르 사라졌다. 한숨을 쉰 나는 호박 수프를 듬뿍 떠서 세스에게 내밀었다.

“자요, 저만 먹는 건 정 없잖아요.”

싱긋 웃은 세스가 순순히 수프를 받아먹었다.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니 평소보다 많이 먹어 버리고 말았다.

배가 불러서 앉아 있는 게 힘들어진 나는 슬그머니 세스에게 기댔다. 세스는 자연스럽게 나를 안아 올려 품에 기대도록 해 주었다. 한층 여유가 생긴 나는 궁금 한 것을 물었다.

“참, 출장 갔던 일은 어떻게 됐어요?"

“잘 마무리됐어. 빨리 끝나서 당신에게 갈 수 있었지.”

약속보다 하루 전에, 그것도 마탑에 뿅 나타난 세스 때문에 얼마나 놀랐던가. 설마 나 때문에 출장도 때려치우고 달려온 건가 싶었는데 그건 아닌 듯했다.

조금 안심한 나는 주변의 안부도 물어봤다.

“폐하는 무사하시죠? 제가 기절한 뒤에 무슨 일이 있었어요?"

“폐하께선 마탑을 등쳐먹을 생각에 신이 나셨지 당신이 기절한 뒤에 워낙 많은 일이 있어서 뭐부터 말해야할지 모르겠군."

내가 기절한 뒤엔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던 것 같았다. 이번 일이 누구의 책임인가부터 시작해서 습격자들을 누가 데려갈 것인가, 죽은 지네를 어떻게 배분할 것 인가, 보상은 어떻게 할 것인가로 물고 듣고 싸운 모양이었다.

“그래서 결론이 났어요?"

“아니, 지금도 싸우고 있지.”

누구 책임이든 상관없었던 세스는 나만 집어 들고 집에 온 것 같았다. 너무 쿨해서 추울 정도였다.

"혹시 저에 대한 말은 없었어요?"

“무슨 말? 당신이 모두에게 걸린 저주를 풀었다고?"

“아뇨, 사실······ 세스가 없애 버린 거대 지네요. 그거 제가 만든 거예요.”

나는 백탑주의 몸에서 지네를 꺼낸 일을 조심스럽게 고백했다. 내게 저주를 실체화시킬 힘이 있고, 그걸 얼마 전에야 알게 됐다는 사실까지.

별 놀란 기색도 없이 묵묵히 내 이야기를 듣던 세스가 물었다.

"저주를 만질 때 괴롭지 않았어?“

“······.”

나는 괜히 코끝이 찡해졌다. 세스가 내 능력 때문에 나를 혐오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럴 때에도 제일 먼저 내 걱정을 해 줄 줄은 몰랐다.

“전혀요. 오히려 사람을 만지는 것보다 더 편했어요.”

불순물 없는 감정이라서 그런지 토할 것 같은 기분도 없었다. 백탑주의 저주를 만질 때는 좀 아팠지만 이건 굳이 말할 필요는 없겠지.

“그래도 무리하진 마. 누군가가 저주를 받았다고 해서 당신 이해결해 줄 이유는 없으니까.”

“그거야 당연하죠. 그런데······ 저 안 혼내세요?"

“혼나고 싶어?"

눈을 쓱 내려뜨는 모습에 나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무모했다든가, 그러지 말아야 했다든가. 한소리 들을 줄 알았어요.”

"무모하지 않았다면 당신과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르니까.”

세스의 목소리에서 괴로움이 느껴졌다. 일이 잘못됐으면 내가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당신을 탓하기엔 내가 너무 늦게 도착했지.”

“제가 제일 필요할 때 나타나 줬잖아요.”

"······."

"언제나 그랬어요.”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세스는 내 앞에 나타났다. 마치 거짓말처럼 웃으며 손을 내밀어 주었다.

나는 그런 그에게 보답하고 싶었다. 세스가 내가 죽길 바라지 않는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아남을 것이다.

“걱정 마세요. 전 절대 세스를 혼자 두고 죽지 않을 테니까요. 운명의 상대잖아요?"

그러자 희미한 미소를 지온 세스가 나를 꼭 껴안았다.

어휴, 이렇게 마음이 약해서 어떡하지? 이 험한 세상에 세스 혼자 놔두기엔 너무 불안하다. 내가 옆에서 잘 지켜 줘야지.

"참, 제가 불러낸 거대 지네요. 개가 마탑의 건물도 때려 부쉈는데  제가 물어 줘야할까요?"

“당신이 불러낸 걸 마탑은 모를 테니 괜찮아.”

“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다 본 걸요.”

걱정스러운 내 말에 세스가 작게 웃었다.

“폐하의 즐거움에 초를 치는 그런 멍청이는 없을 것 같은데 있어도 곧 없어질 예정이고.”

마탑에게 더 큰 보상을 뜯어내기 위해 모두 입을 꾹 다문 모양이다. 괜히 양심에 찔린 나는 손을 꼬물 거렸다. 그때 세스가 경고했다.

“이비, 당신이 저주를 실체화시킬 수 있다는 건 절대 고백하면 안 돼. 마탑의 마법사들이라면 당신을 산 채로 해부하고도 남으니까.”

"······."

나는 양심 따윈 쓰레기통에 넣기로 했다.

내가 그때 지네를 안 꺼냈으면 마탑에도 더 끔찍한 결과가 생겼을 거다. 그렇게 치면 벽이랑 바닥을 때려 부순 것은 봐줘야 하는 거 아닐까.

"문제는 백탑주군.”

"백탑주요?"

“당신이 진실한 사랑으로 자신의 저주를 풀었다고 믿는 남자를 설득할 수 있겠어?"

"안 만나겠습니다.”

나는 딱 잘라서 말했다. 미친놈은 피하는 게 상책이다. 내 대답에 만족한 세스가 멋진 미소를 보여 주었다.

* * *

백탑주 히페리온은 태어났을 때부터 저주에 걸려 있었다. 그의 일족에서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저주였다.

한 대에 한 명씩 저주를 짊어진 아이가 태어났고 천 천히 죽어 갔다.

진실한 사랑과 믿음만이 저주를 풀 수 있을 것이다.

저주를 풀 수 있는 조건은 또 다른 저주가 되었다.

저주받은 아이를 낳은 부모는 자신들의 사랑이 진실 하지 않아서 저주가 풀리지 않는다고 괴로워했다. 저주받은 자의 형제, 친구, 연인 또한 저주를 풀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고통 받았다.

결국, 희생자를 늘리고 싶지 않았던 일족은 저주받은 아이를 부모와 떼어 내어 홀로 자라게 했다.

히페리온이 일족과 멀리 떨어져 인간의 세상에서 살게 된 것도 그런 이유였다.

한때는 그도 저주에 저항하려고 애썼다.

빛의 마법을 익혀 마탑의 탑주가 된 것도 저주를 풀기 위한몸부림이었다.

하지만 심장에서 자라난 저주가 온몸을 뒤덮자 그도 체념하는 법을 배울 수밖에 없었다. 흉측한 모습을 감추기 위해 온몸에 붕대를 감으며 곧 다가올 죽음을 기다렸다.

그래서 한순간에 저주에서 해방되었을 때는 오히려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자신의 운명일지도 모르는 사람을 어이없이 놓쳐 버린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블린 하인즈.’

달콤한 분홍색 머리카락과 눈처럼 흰 피부. 아이처럼 천진난만한 붉은 눈동자. 가만히 있어도 생긋 웃는 것 같은 귀여운 입술.

그가 이블린에 대해 아는 것은 죄다 단편적인 것들뿐이었다. 하지만 히페리온은 그녀와 자신의 영혼이 연결되어 있다고 믿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끌리고 있었으니까'

마탑의 마법사들 틈에 아무렇지도 않게 끼어들던 당 한 아가씨 . 하지만 히페리온의 관심을 끈 것은 무심한 그녀의 시선이었다.

다른 이들이 그를 신기해하거나 끔찍하게 바라보는 것과 달리, 이블린의 시선은 굉장히 담백했다. 그녀의 눈은 ‘아, 저기에 붕대를 감은 남자가 있네.’라는 사실만을 담고 있었다.

그것이 왠지 기묘한 충동을 일으켰다. 그녀의 손을 잡아당기며 나를 보라고 강요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블린은 놀라울 정도로 선뜻 그가 내민 손을 잡아주었다.

두 사람의 손이 맞닿은 순간, 어쩐 일인지 숨 쉬는 게 편해졌다. 저주의 독기로 가득 찬 폐가 선선한 공기를 마음껏 빨아들였다.

하지만 그녀의 손은 아쉬울 정도로 빨리 떨어져 나갔다.

“지팡이 말고 끈 같은 선 없을까요? 아니면 제 소매를 잡고 걸으실래요?"

상냥한 목소리에 불쑥 붕대를 내민 것은 나를 봐 달라는 유치한 마음 때문이었다.

히페리온은 좀 더 그녀의 관심을 끌고 싶었다. 이블린이 떨떠름해하거나 놀라거나 갸웃거리는 모습에 기묘한 만족감이 들었다.

그것 또한 운명의 이 끌림이었을 텐데, 히페리온은 너무 어리석어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나 이블린이 두 번이냐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순간 진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녀가 내 영혼의 짝이었어.'

그의 일족은 모든 영혼엔 짝이 있다고 믿었다.

일족의 하나로서 히페리온은 자신의 짝을 찾기를 간절히 바랐다. 동시에 저주받은 자신은 짝을 만날 기회가 없을 거라고 믿었다.

그것을 깨부수듯 나타난 이블린은 일족의 저주를 너무 쉽게 풀어 버렸다.

일족에서 대대로 전해진 저주를 풀 수 있는 조건.

진실한 사랑과 믿음만이 저주를 풀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저주라고 생각했던 그것은 사실 영혼의 짝을 뜻했던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그저 한번 스쳐 지났을 뿐인 그녀가 자신을 구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히페리온은자신의 짝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자신을 위해 괴물에게 덤벼드는 모습은 또 얼마나 용맹하고 아름답던지. 그녀의 손을 잡고 당산을 위해 뭐든 바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히페리온은 ‘이블린의 약혼자'라는 거대한 암초에 부딪쳤다.

“착각하지 마라. 그녀가 네 목숨을 구해 준 것이 네가 접근할 이유가 될 수는 없으니까.”

이블린의 약혼자인 공작은 싸늘한 눈으로 그를 노려봤다. 마치 적을 보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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