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기회요?”
“백탑주의 손을 잡으면 당산은 평생 행복할 수 있을 거야. 내 옆에 있을 때처럼 위험하지도 않을 거고. 그와 결혼해서 미래를 꿈꿀 수도 있겠지.”
아니, 난 그 사람 얼굴도 모른다니까. 툴툴거리는 내 속도 모르고 세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와 한 약속 때문에 당신이 기회를 놓치는 건 불공평하니까.”
"······.“
응, 이대로는 안 되겠다.
나는 우아한 대화를 때려치우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데이베드 위에 우둑 서자 세스보다 내 키가 더 커졌다.
나는 그대로 두 손을 뻗어 세스의 양 뺨을 덥석 잡았다. 강제로 나와 눈을 맞추게 된 세스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공작님 버리고 백탑주랑 결혼하라고요? 진심으로 말하는 거예요?"
“아니.”
눈치 빠른 세스는 재빨리 정답을 골랐다.
김이 팍 센 나는 그를 놓아주며 투덜거렸다.
“거봐, 진심도 아니면서. 왜 저한테 심술부려요?"
"······."
그러자 세스가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못 이기는 척 그의 어깨를 마주 안아 줬다. 잠시 내 품에 얼굴을 묻고 있던 세스가 사과했다.
"잘못했어.”
“당연히 잘못했죠. 반성하세요.”
“······응.”
착한 아이처럼 대답한 세스가 나를 더 꼭 끌어안았다.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였다.
“그자가 당신을 제 운명의 상대라고 말하는데도, 반박할 수가 없어서 비참했어.”
아니, 뭐 그런 거 가지고 비참해. 진짜도 아닌데.
심드렁해하는 나와 달리 세스는 심각한 분위기였다. 나는 제자리에 풀썩 앉으며 옆을 두드렸다.
“그럼 우리도 하면 되죠.”
”응?”
“어려울 게 뭐가 있어요. 2년 동안 서로에게 운명의 상대가 되어 주면 되잖아요.”
얼떨떨한 표정을 짓던 세스가 내가 잡아끄는 대로 옆에 앉았다 나는 씩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빨리요. 손 주세요.”
세스가 머뭇거리며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장갑을 훌러덩 벗겨 내고 단단히 깍지를 꼈다.
세스의 손가락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움찔거렸다. 하지만 그의 손에서 전해지는 감정은 두근거림과 닮은 기대감이었다.
나는 흠흠 헛기침을 한 후 입을 열었다.
“자, 이것으로 세스 엘마이어와 이블린 그란은 2년 동안 절대 끊어지지 않는 실로 연결되었습니다. 앞으로 2년 동안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고 충실합시다. 땅 땅!“
"······. "
이게 뭐냐고 웃을 줄 알았는데, 세스는 더없이 진지 한 얼굴로 맞잡은 손을 보고 있었다.
나는 장난스럽게 물었다.
“이제 좀 안심돼요?"
그러자 세스가 눈을 깜빡였다. 마치 참에서 막 깨어난 사람 같았다. 깍지 낀 손을 끌어당긴 그가 내 손등 에 입을 맞췄다.
"응.”
살짝 휘어진 눈이 정말 기뻐 보였다. 나는 괜히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슬며시 손을 빼려고 했지만 그럴 때마다 세스의 손이 쫓아와서 떨어지질 않았다. 더 부끄러워진 나는 손을 꼼질거렸다.
“이비.”
다시 한 번 내 손등에 입을 맞춘 세스가 무어라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꼬르륵!
우렁찬 배꼽시계가 달달한 분위기를 박살냈다.
아니, 넌 눈치도 없냐.
나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내 배를 내려다봤다. 낮게 웃은 세스가 손을 놓아주었다.
“그렇게 뛰어다녔으니 배가 고플 만도 하지 먹고 싶은 거 있어?"
"음, 아무거나 괜찮아요.”
어차피 고기로 시작해서 고기로 끝날 테니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완두콩 수프, 레몬 가자미 구이, 구운 가지, 데친 아스파라거스. 이 중에서 먹고 싶은 게 있어?"
“어?"
나는 세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메뉴에 깜짝 놀랐다. 전부 내가 맛있게 먹었던 것들이었다.
"당신 식사량이 갈수록 줄어든다는 말을 듣고 조금 이라도 잘 먹는 음식이 있으면 알려 달라고 했거든.”
"아, 그게…….”
삼시세끼 채소도 없이 고기만 나와서 물렸던 건데, 세스가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줄은 몰랐다.
“뭘 좋아하는지 말해 주기 싫어?"
”으, 아뇨. 그건 아닌데요.”
머뭇거리는 나를 세스가 조용히 기다려 주었다. 결국 나는 버티는 것을 포기하고 몽땅 털어놓았다.
“익히지 않은 채소요! 닭고기 샐러드 먹고 싶어요! 피클도 좋고요. 쌈도 좋고요. 고기 좋아하지만 고기만 먹는 거 싫어요. 채소랑 같이 먹고 싶어요!"
"······."
세스가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내가 야만인처럼 생채소를 뜯어 먹겠다고 할 줄 몰랐던 모양이다.
‘괜히 말했나?'
이곳에는 익히지 않은 채소를 먹는 문화가 없었다. 채소는 무조건 굽거나 삶아서 국물만 먹었다.
또 채소는 가난의 상징이기도 했다. 남들은 몰라도 내가 재소를 먹는 것은 출신이 천해서 그렇다는 뒷말을 듣기 딱 좋았다.
‘그래서 지금까지 참고 참은 건데.’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이자 세스가 입을 열었다.
“사람들이 생채소를 먹지 않는 건 몸속에 벌레가 생기기 때문이야. 벌레 때문에 죽는 사람도 있거든.”
어쩐지 부모의 원수처럼 재소를 난도질해서 푹푹 삶더라니, 기생충 문제였던 모양이다. 나는 역시 말을 하지 말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하지만 나한테는 신성력이 있으니까 채소를 정화해서 깨끗이 만들 수 있어 문제는 생채소로 샐러드를 만드는 법을 모른다는 거야 아마 주방장도 모를 것 같은데.”
“헉! 제가 알아요!"
"적어 줄 수 있어?“
나는 목이 떨어져라 고개를 끄덕였다. 세스가 종이와 펜을 갖다 주었다.
나는 신들린 사람처럼 닭고기 샐러드 만드는 법을 적어 내려갔다. 이해하기 쉽게 열심히 그림도 그렸다. 완성된 레시피를 받아 든 세스가 내 이마에 살짝 키스했다.
"금방 돌아올게.”
잠시 명해졌던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땐 세스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나는 이마를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빨리 왔으면 좋겠다."
세스가 보고 싶은 건지, 닭고기 샐러드가 먹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었다. 나는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문을 바라봤다.
* * *
모리스는 서류 작업을 마치고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그림자 기사들을 불러 모았다.
"극비 임무다.“
“드디어 카스티야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 주는 겁니까.”
"저는 준비됐지 말입니다.”
기대감에 들뜬 기사들을 보자 가슴이 무거워졌다. 헛기침을 한 모리스는 엄숙하게 말했다.
“제타, 식료품 창고에서 설탕, 식초, 소금, 후추, 레몬, 면실유를 가져와라.”
“예?”
미소가사라진 제타가 주춤거리며 되물었다. 모리스는 모른 척 다음 기사를 바라봤다.
"산, 주방에서 크림을 넣은 호박 수프와 빵, 오렌지 주스를 가져와라.”
"······."
과묵한 기사인 산은 짧게 고개만 끄덕였다.
"카이, 육류 창고에서 손질된 닭 가슴살을 가져와라.”
눈을 껌뻑이던 카이가 이내 씩 웃었다.
"예, 즉시 시행하겠습니다."
“잠깐만요, 단장님, 극비 임무라고 하셨잖습니까. 이건 그냥 장보기 심부름인데요?"
제타가 한쪽 손을 번쩍 들며 물었다. 모리스는 강렬한 눈빛으로 그를 제압했다.
“기록도, 목격자도, 어떤 흔적도 용납할 수 없다. 누구도 모르게 지금 당장 다녀와라.”
“······네.”
머쓱해진 제타가 손을 내렸다. 그는 괜히 싱글벙글 웃고 있는 카이의 옆구리를 찔렀다.
“넌 뭐가 그렇게 좋냐?"
“전 바로 눈치겠지 말입니다. 이거 우린 아가씨가 드실 음식입니다. "
"응? 진짜?“
제타의 눈이 동그래졌다. 고개를 끄덕인 카이가 진지하게 설명했다.
“아가씨가 그때 사람들을 구하려고 계속 뛰어다니셨지 말입니다. 일어나시면 분명 배가 고프실 겁니다.”
지금 이블린은 공작의 집무실에 있었다.
공작의 품에서 떨어지면 잠결에도 훌쩍이는 바람에 엄격한 시녀장도 손을 쓰지 못했다. 그래서 깨어날 때까지라는 조건으로 공작의 옆에 있는 상태였다.
"주군께서 아가씨를 위해 손수 요리하시려는 게 틀림없지 말입니다.“
“그런데 왜 닭이야? 몸보신에는 사슴이 최고잖아. 이럴 게 아니라 내가 뛰어가서 사슴 한 마리 잡아 올까?"
제타가 안달이 나서 말했다. 하지만 카이는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가씨는 고기 안 좋아하시지 말입니다.”
“······아니, 어떻게 고기를 안 좋아하실 수 있지? 그래서 그렇게 키가 작으신가?"
충격을 받은 제타가 중얼거렸다. 노닥거리는 둘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모리스가 명령했다.
“거기 두 사람 지금 당장 출발하지 않으면 다른 기사에게 임무를 넘기겠다.”
“아니, 아닙니다!"
“지금 당장 갑니다!"
둘은 후다닥 밖으로 내 달렸다.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모리스가 한숨을 쉬었다.
‘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주군.’
그는 지금쯤 바구니를 들고 채소밭을 헤매고 있을 공작을 생각하며 쓰린 위를 부여잡았다.
* * *
세스는 정말로 닭고기 샐러드를 들고 돌아왔다. 나는 환호성을 지르며 세스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식기 전에 어서 먹어.”
흥분해서 펄쩍펄쩍 뛰는 나를 잡아 앉힌 세스가 수프부터 먹으라며 스푼을 쥐여 줬다. 하지만 나는 샐러드에 눈이 먼 상태였기에 반대쪽 손으로 포크를 들었다.
보들보들한 닭고기와 푸른 잎채소를 콕콕 찍어 입에 넣는 순간 진짜 눈물이 날 뻔했다.
"흑, 맛있다."
신성력 덕분인지 유독 파릇파릇한 채소들이 입 안에서 사각거렸다. 고소한 마요네즈와 닭고기와의 조화도 완벽했다.
행복해하는 내 얼굴을 세스가 엄마 미소를 지으며 지켜보고 있었다. 조금 민망해진 나는 샐러드를 찍어서 세스에게 내밀었다.
"저, 세스도 먹어 볼래요?"
당연히 거절할 거라 생각했는데 세스는 아주 자연스럽게 샐러드를 받아먹었다. 입가에 묻은 소스를 훔쳐낸 그가 눈을 휘며 웃었다.
“맛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