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 * *
어디선가 에어컨이 웅웅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내 약혼녀가 앞장서서 싸우는 걸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었단 말인가?"
“죄, 죄송합니다. 전하.”
"쓸모없는 팔다리는 왜 달고 있지?"
조금 추워서 코를 훌쩍이자 뭔가 따뜻한 것이 나를 폭 감싸 주었다. 나는 배시시 웃다가 다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다행히 상처가 심하지 않으셔서······.”
“이마에서 피가 나고 온몸에 멍이 들었는데 심하지 않아? 심하지 않은 상처 한번 입고 싶나?"
“아닙니다! 지금 당장 치유 마법을 준비하겠습니다!"
정신없이 조는 중에 차가운 물방울 같은 것이 내 이마를 톡 건드렸다. 움찔하며 몸을 움직이자 다정한 손길이 나를 다독거렸다.
“괜찮아. 눈을 뜨면 집에 있을 거야.”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깊게 잠들어 버렸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처음 보는 낯선 방에 누 워 있었다.
‘어, 여기는 어디지?'
깜짝 놀라 몸을 일으키는 순간, 뭔가가 무릎 위로 툭 떨어졌다. 커다란 남성용 코트였다.
코트를 집어 들고 쿵쿵거리자 물처럼 차갑고 싸한 향기가 느껴졌다. 세스의 품에 안겨 있을 때 맡은 냄새와 똑같았다.
나는 코트를 몸에 둘둘 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 안에 은은하게 떠도는 향기가 불안한 미음을 다독여 주었다.
‘여긴 혹시······ 세스의 방인가?'
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공작님의 방치고는 굉장히 소박했다.
투박한 책이 꽂혀 있는 책장과 실용적인 책상. 푹신해 보이는 소파와 내가 잠들어 있던 데이 베드까지.
누군가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 꾸민 게 아니라 편히 쉬기 위한 방이었다.
‘그런데 세스는 어디 있지?'
나는 살금살금 문으로 접근했다. 소리 나지 않게 살짝 문고리를 돌리고 문틈으로 밖을 엿보았다.
문밖은 또 다른 방이었다. 내가 있는 곳과 다르게 숨이 막힐 정도로 엄숙하고 무거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리처드 프림로즈는 아가씨가 자신에게 누명을 씌웠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자신도 아가씨처럼 성물을 가지고 있었을 뿐인데, 저주에 걸리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억울하게 공범으로 몰렸답니다.”
어? 이건 선배님의 목소리인데?
문을 살짝 더 벌리자 꼿꼿한 자세로 보고 중인 선배님이 보였다. 왠지 심각한분위기였다.
“그래서?"
“아가씨를 명예 훼손으로 고발할 생각인 것 같습니다. 아가씨가 전부터 자신의 공을 탐냈고, 또 마탑에게 은혜를 입히기 위해 자산을 이용했다면서 증인을 끌어 모으는 중입니다.”
반면 맞은편에 있는 세스의 모습은 역광을 받아서 잘 보이지 않았다. 잘생긴 얼굴을 보고 싶었는데, 왠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프림로즈 가문에 항의 서한을 보내 한 번만 더 그녀의 이름을 입에 올리면 내가 직접 가서 결투 신청을 하겠다고.”
하지만 목소리만으로도 위험하고 섹시하고 완전 미 쳤군요. 세스에게 꼭 동화책을 읽어 달라고 해야겠다.
"하지만 주군, 그건 협박으로 들릴 겁니다."
“지금 당장 실행할 마음이 있는데 어째서 협박이지? 통보라고 해야 하지 않나?"
"러셀에 이어 프림로즈까지 적으로 돌리는 건 그리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차라리 아가씨께 해명을······.”
“그만 놈의 수작에 놀아날 생각은 없다. 아들을 잘못 키웠으면 죄값을 치르라고 해.”
선배님의 말을 딱 자른 세스가 그만 나가 보라고 명령했다. 선배님은 뭔가 더 말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어쩔 수 없이 몸을 돌렸다.
나는 이럴 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선배님이 나가자마자 세스가 이쪽으로 올 것 같았다.
문을 살짝 닫은 나는 후다닥 원래의 자리에 누워서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문이 열리는 게 느껴졌다.
“이비?"
나는 쿵쾅거리는 가슴을 느끼며 숨을 죽였다 세스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자는 거야?"
쳇, 들켰네. 나는 괜히 자는 척했다고 투덜거리며 눈을 떴다. 그리고 바로 앞에서 나를 구경 중인 세스에게 놀라 굴러 떨어질 뻔했다.
“조심해야지.”
나를 붙잡은 세스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괜히 민망 해진 나는 코트를 끌어 올려 얼굴을 가렸다.
“저 왜 여기 있어요?"
“당신과 함께 있고 싶어서 데려왔지 깨어났으니 이제 보내 줘야겠지만.”
세스가 조금 아쉽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미적거리며 물었다.
“조금만 이따가 가면 안 돼요?"
나흘이나 못 만났는데, 깨어나서 얼굴 보자마자 가라니 좀 서운했다.
시무룩하게 올려다보자 세스가 손을 움찔거렸다.
“당신이 자고 있으면 안 가도 되겠지.”
천잰데? 나는 얼른 코트를 덮고 자는 척했다. 다정한 손길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힐끔힐끔 훔쳐보는 내 시선을 느낀 세스가 지적했다.
“이비, 자면서 눈을 뜨고 있잖아.”
“전 원래 눈 뜨고 자요.”
“자는 사람이 말도 하고?"
“이건 잠꼬대거든요?"
내 뻔뻔한 대꾸에 세스가 웃었다. 나는 그가 웃는 모습을 멍하게 바라봤다. 나와 눈이 마주친 세스가 웃는 것을 멈췄다.
“그런 눈으로 쳐다보면 위험한데.”
“왜요?"
“괴롭히고 싶어져.”
음, 그건 정말 심각한 문제군. 나는 얼른 눈을 감았다. 세스가 심술궂게 덧붙였다.
"안 쳐다봐도 괴롭히고 싶어지고.”
“아니, 그게 뭐예요?"
쳐다봐도 괴롭히고 싶고, 안 쳐다봐도 괴롭히고 싶으면 결론은 괴롭히겠다는 거잖아. 투덜거리며 눈을 뜨니 세스가 묘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세스? 무슨 생각해요?"
“당신이 괴물에게 달려드는 걸 봤을 때는 정말 화낼 생각이었는데, 왜 화를 낼 수가 없는지 고민 중이야.”
앗, 그거 보셨구나. 하긴, 봤으니까 지네를 두 쪽으로 찢으면서 동장한 거겠지.
세스의 입장에선 회사 출장을 다녀오니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가 코브라와 싸우고 있었다.!' 정도의 대사건이었을 것이다.
나는 미안한 마음에 얼른 두 손을 모으고 반성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내가 당신에게 백탑주와 무슨 관계냐고 추 궁할자격이 있는지도 좀 궁금하고.”
"백탑주요?"
있는 힘껏 반성의 기색을 쥐어짜던 나는 어리둥절해 졌다. 백탑주가 여기서 왜 나오지?
“아, 혹시 제가 백탑주를 개처럼 끌고 다녔다는 이야길 들으셨어요?"
“그건 또 무슨 소리지?”
세스의 눈이 한충 날카로워졌다. 어, 이게 아니었어? 괜히 지뢰를 밟았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움찔했다.
“내가 듣기로는 당신이 백탑주의 목숨을 두 번이나 구해 줬다고 하던데.”
"네? 제가요?"
완전히 처음 듣는 소리였다. 내가 언제 그런 훌륭한 일을 했지?
“첫 번째는 당신이 몸을 내던져서 괴물의 공격에서 구해 준 거고.”
아, 그 괴물을 내가 풀어 놨다는 말은 못 들으셨구나.
"두 번째는 백탑주가 받은 저주를 풀어서 시한부였던 생명까지 연장해 줬다더군.”
“네?"
유리 공이 깨질 때가 아니라 원래 저주를 받았던 거라고? 그것도 시한부가 될 정도로 지독한 저주를?
‘어쩐지 저주를 뜯어낼 때 좀 힘들더라니.'
손바닥은 아리지, 머리는 아프지, 코는 시큰거리지. 급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도중에 포기 했을 것 같았다.
"백탑주의 말로는 그게 진실한 사랑과 믿음으로만 풀 수 있는 저주라면서, 당신이 제 운명의 상대라고 주장하는 중인데.”
“······.”
“이비, 당선은 어떻게 생각하지?"
아무래도 백탑주가 나한테 크나큰 엿을 준 것 같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선 전쟁이 일어났다.
‘당장 그 사람 얼굴도 모른다고 잡아떼!'
‘그게 더 운명적이라고 생각하면 어떡해?'
‘에라이! 그냥 키스 칼겨!`
‘안 돼! 대답을 얼버무리는 거 같잖아!'
이성과 감성이 엉망진창으로 싸웠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머리에서 김이 날 것 같았다.
멍하게 눈만 깜빡이는 나를 보고 세스가 한숨을 쉬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의 팔을 덥석 잡았다. 세스가 움찔하는 것을 느낀 나는 마음을 정했다.
’이럴 땐 적반하장이다!'
벌떡 상체를 일으킨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래서 뭐라고 하셨어요?”
“······응?”
“다른 남자가 저한테 운명의 상대라는데, ‘아, 그렇군요. 정말 축하드립니다.’ 이러신 건 아니죠?"
말하다 보니 진짜 기분이 나빠졌다. 내가 인상을 쓰자 세스도 좀 당황하는 것 같았다.
“당신은 내 하나뿐인 약혼녀고, 누구에게도 넘겨줄 수 없다고 했지.”
“흐음.”
틀린 말은 아닌데 뭔가 2% 장도 부족한 느낌인데?
“그래서 그 사람이 뭐래요?"
“우선 당신과 만나고 싶다고 하더군. 깨어나면 직접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고 싶다고.”
세스는 어딘지 씁쓸한 얼굴이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공작님은 재가 그 사람을 만나길 원하세요?“
“······아니.”
“그럼 왜 이런 이야기를 해 주세요? 말하지 않으면 저는 몰랐을 텐데.”
솔직히 말해서 백탑주는 정상이 아니었다.
약혼자가 있는 여자에게 재 운명의 상대라고 지껄이는 무신경함은 둘째 치고, 그걸 약혼자에게 직접 말하는 당당함은 진짜 어이가 없었다.
‘물에 빠진 사람 건져 놨더니 강도짓을 하네?'
평소의 세스라면 이런 진상은 내가 알기도 전에 깨끗이 정리했을 텐데, ‘어떻게 생각해?’라고 의견을 묻는 것 자체가 이상했다.
한참을 침묵하던 세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내가, 당신의 기회를 뺏는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