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나는 온몸으로 지네를 들이박았다. 허접한 내 공격에 얻어맞은 지네가 벌러덩 나동그라졌다. 나는 지네와 한 덩이가 되어 바닥을 떽떼굴 굴렀다.
“아가씨!"
기서들이 허겁지겁 나를 향해 달려왔다. 그래도 같이 싸운 동료라고 챙겨 주는 모양이다. 나는 벌떡 고개를 들고 소리쳤다.
“여긴 내게 맡기고 다들 도망가요!"
아까 부딪친 걸로 확신했다. 내겐 저 지네와 싸울 힘이 있었다.
“어서 일어나십시오.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아니, 날 두고 도망가라니까!"
기서들은 매우 자연스럽게 내 말을 무시하고 나를 일으켜 세웠다. 다시 지네에게 가려고 했지만 그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여긴 위험합니다. 안전한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잠깐만! 이럴 때가 아니라고요!"
기사들이 나를 달랑 들어 올려 후퇴하기 시작했다. 어찌나 힘이 센지 발버둥을 쳐도 벗어날 수가 없었다. 나는 다급하게 지네 쪽을 확인했다.
어느새 스윽 몸을 일으킨 지네가 나를 보고 있었다. 놈이 힐끗 백탑주 쪽을 눈짓했다.
-저걸 지키고 싶어?
마치 그런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아니, 그것은 새카만 악의에 가까웠다. 나는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하지 마!"
지네의 눈이 히죽 가늘어졌다.
-네가 싫어하니까 할 거야.
지네는 명백한 살의를 품고 백탑주에게 달려들었다. 백탑주가 급히 빛을 쏘아 냈지만, 지네의 집게 턱에 맞고 튕겨 나갔다.
"안 돼!"
나는 발작적으로 몸을 버둥거렸다. 싫어! 이런 건 싫어! 누가 좀 도와줘!
그때 하늘이 두 개로 갈라졌다.
백탑주에게 달려들던 지네의 몸에 세로로 긴 선이 생겼다. 아주 천천히 지네가 아래로 쓰러졌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그 광경을 지켜봤다. 쓰러진 지네 너머로 한사람이 보였다.
평소엔 단정하게 빗어 넘기던 은발이 헝클어져 이마로 흘러 내려와 있었다. 지네를 쏘아보는 푸른 눈에선 분노가 느껴졌다.
“세스?"
나는 홀린 것처럼 그의 이름을 불렀다. 세스가 지네를 훌쩍 뛰어넘어 나를 향해 걸어왔다.
"저, 전하?"
“아니, 전하께서 어떻게 여길······."
나를 붙들고 있던 기시들의 손이 느슨해졌다. 나는 그들에게서 벗어나 세스에게 달려갔다.
“이비.”
나를 본 세스가 팔을 벌렸다. 나는 있는 힘껏 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단단하고 익숙한 체온을 느끼자 갑자기 울음이 터졌다.
“흐어엉!"
꺼이꺼이 통곡하는 나를 세스가 꼭 안아 주었다. 다정한 목소리가 속삭였다.
"보고 싶었어.”
나도 그렇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울음 때문에 목소리가 안 나왔다. 세스를 끌어안고 엉엉 울던 나는 지쳐서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 * *
적탑주는 허겁지겁 자신의 연구실로 향했다.
그는 결계가 무너지는 순간부터 제정신이 아니었다. 머릿속엔 한시라도 빨리 모든 증거를 숨겨야 한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기록에도 없는 깨끗한 겁니다."
상급 마나석을 내밀며 싱긋 웃던 윌리엄 레이우드가 떠올랐다 지금 생각하니 음흉하기 짝이 없는 표정이었다.
적탑주는 뇌물로 받은 마나석을 결계에 사용하고, 마나석 구입비용은 모두 자신의 주머니에 챙겼다.
하지만 그 마나석이 폭발해서 결계가 무너지다니, 상상도 못 한 재앙이었다.
‘난 아무것도 몰랐어! 갑자기 쳐들어온 놈들과 아무 상관도 없다고 ! 그냥 뇌물만 받았을 뿐이야!'
하지만 마탑의 누구도 그의 변명을 들어 주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를 처형해서 이번 사건을 수습하려 들것이 뻔했다.
“이대로, 이대로 무너질 수 없어! 내가 어떻게 이 자리에 올라왔는데!"
적탑주는 이를 갈며 그동안 뇌물로 받은 물건을 모두 비밀 공간에 쑤셔 넣었다. 그간의 연구 자료도 마찬 가지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자선의 연구실에 숨겨진 문을 열었다. 문안은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어둠이었다.
잠시 후, 어둠 속에서 거대한 두 개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지독한 비린내와 함께 으르렁거리는 낮은 숨소리가 들렸다.
"호호. 너는 내 거야 누구에게도 안 뺏겨.”
정신 나간 사람처럼 히죽거리던 적탑주가 품속에서 황금색 덩어리 같은 것을 꺼내 어둠 속으로 던져 넣었다. 덩어리가 폭발하면서 고통스러운 비명이 들렸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얌전히 자고 있어라.”
꿈틀거리던 움직임이 점점 줄어들었다.
적탑주는 만족한 얼굴로 문을 닫았다. 문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마력으로 봉인된 문은 적탑주 자신이 아니면 누구도 열 수 없었다. 모든 작업을 마친 적탑주는 비틀거리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바로 그때, 연구실 문이 강제로 열렸다. 마도구로 무장한 마법사들이 지팡이를 겨누며 안으로 들어왔다.
"적탑주, 당신이 습격자들과 내통했다는 고발이 있었습니다."
"흥, 무슨 헛소리지? 증거라도 있나?"
“자세한 이야기는 가서 하시죠.”
마법사들은 마도구로 적탑주를 포박해서 강제로 끌고 나갔다.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적탑주는 고개를 돌려 봉인된 문을 확인했다.
하지만 그는 결계가 무너지면서 문이 조금 뒤틀렸다는 사실을 끝내 알아채지 못했다.
* * *
”실패?"
라리사의 얼굴이 표독하게 일그러졌다.
“다시 한 번 말해 봐. 실패했다고?"
백조처럼 우아한 손이 시녀의 머리채를 움켜잡았다. 단지 말을 전하러 온 죄밖에 없는 시녀가 덜덜 떨기 시작했다.
“어떻게 실패할 수가 있지? 이번 계획에 들어간 돈과 시간이 얼마인 줄 알아?”
“죄, 죄송합니다.”
확 당겨지는 머리채에 시녀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삼켰다. 그녀를 쓰레기처럼 팽개친 라리사가 붉은 입술을 질근거렸다.
“대체 어디서 실수가 있었지?"
변종 마나석을 몰래 들여오고, 마탑에 설치해 결계 룰 무너뜨리고, 저주로 왕과 기시들을 무력화하고, 결사대를 보내 마무리 짓는-그 모든 과정을 성공시키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던가.
실패해서는 안 되고, 실패할 수도 없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왕은 무사히 살아서 궁으로 돌아갔다.
‘이러다 그분이 나를 무능하다고 생각하시면 끝이야'
라리사는 곱게 다듬은 손톱을 짓씹기 시작했다.
“미겔 그 무능한 늙은이가 문제일까? 기껏 왕을 죽 일 기회를 줬는데도 곱게 살려 보내다니. 아니면 저주술사, 그놈이 원흉인가? 그 음흉한 놈이 돈을 아낀다고 엉터리 저주를 만든 게 틀림없어.”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던 라리사가 갑자기 홱 몸을 돌려 시녀를 쏘아봤다.
“너······ 뭔가를 숨긴 건 아니겠지?"
“네?"
"네가 그동안 소식을 전했잖니. 내가 실수하도록 잘못된 정보를 준거지?"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겁먹은 시녀가 고개를 휘저었다. 하지만 라리사는 이미 시녀의 잘못이라는 결론을 내린 듯했다.
"거짓말까지 하다니 나쁜 아이네. 벌을 줘야겠어.”
생긋 웃은 라리사가 한쪽에 걸린 회초리로 손을 뻗었다. 겁먹은 시녀가 다급하게 외쳤다.
“그 여자! 그 여자의 짓입니다!"
”뭐?”
“이블린 하인즈! 그 여자가 모든 계획을 망친 겁니다!"
마탑에선 이번 사건을 ‘정체 모를 습격자들의 어리석은 짓’으로 발표했다. 습격을 당한 건 사실이지만 아무런 피해 없이 끝났다고 자존심을 세운 것이다.
하지만 끝에 이블린 하인즈가 약간의 도움을 주었다고 덧붙였다. 마탑은 그녀와의 우정을 영원히 잊지 않는다는 형식적인 말과 함께였다.
"분명 이블린 하인즈가 뭔가를 한 겁니다. 아니면 자존심 강한 마탑에서 그런 발표를 할 리가 없습니다!"
시녀는 정신없이 떠들었다. 회초리를 만지작거리던 라리사가 한숨을 쉬었다.
“또 그 여자란 말이지. 정말 거슬리네.”
시녀는 겁먹은 얼굴로 눈치만 보았다. 다행히 라리사는 그녀를 때릴 생각이 사라진 것 같았다. 오늘의 실패가 자신의 실수 때문이 아니라는 생각만으로도 정신 적인 안정을 되찾은 듯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이번 기회에 그 거슬리는 여자를 치워 버리는 수밖에.”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라리사가 시녀에게 명령했다.
"비밀 금고에 넣어 둔 알을 가져와.”
"네? 하지만 그건 아직 주인님께 사용 허가를 받지 않은 물건입니다."
“기다릴 게 뭐 있어? 첫 번째가 실패했으면 두 번째 계획을 시작해야지.”
라리사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마탑에 아직 사용하지 않은 끄나풀이 있었지? 그자를 통해서 프리지어 궁에 알을 심게 해."
“프리지어 궁은 왕궁보다 더 경계가 엄중해서······.”
"뭐가 걱정이야? 마탑의 친우라고 발표했으니 마탑에서 온갖 선물을 보내겠지 마도구 속에 숨겨서 반입 해.”
라리사가 말한 ‘알’에는 은선 능력이 있었다. 마도구 속에 알을 숨긴다면 마탑의 탑주가 온다고 해도 쉽게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넌 아직도 이런 걸 가르쳐 줘야 하니?"
“아악!"
갑자기 떨어진 고통에 시녀가 비명을 질렀다. 라리사가 그녀에게 회초리를 휘두른 것이다.
"입 다물어 항상 말했잖아. 나는 게으름 부리는 아이를 싫어한다고.“
라리사의 얼굴에 짜증이 깃들었다. 시녀는 벌벌 떨며 또다시 떨어지는 고통을 참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체벌이 끝난 후, 피 묻은 회초리를 바닥에 던진 라리사가 나른한 한숨을 쉬었다.
"아, 이왕이면 이블린 하인즈가 알을 깨트리도록 설치하면 좋겠네. 프리지어 궁이 피로 물들면 내 기분이 좀 나아질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