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 * *
마탑은 손님맞이 준비에 한창이었다.
마탑이 자리 잡은 나라, 아스트리아의 국왕은 그들의 가장 큰 물주였다. 마법사들은· 왕에게 아주 약간의 흠도 보이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마지막 점검을 위해 돌아다니던 마법사가 허름한 차림의 노인을 발견하고 눈을 부라렸다.
"거기! 여기서 뭐 하는 거지? 하인들은 모두 숙소로 이동하라고 명령했을 텐데!"
노인은 마법사의 호통에도 불구하고 허리를 굽힌 채로 풀을 뽑고 있었다.
화가 난 마법사가 손을 치켜드는 순간, 하인장이 달려와 고개를 숙였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이 노인네는 귀가 먹어서 마법사님이 오산 줄도 몰랐을 겁니다."
마법사가 의심스럽다는 눈빛을 보냈다. 하인장이 노인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강제로 고개를 들게 했다.
백태가 낀 허연 눈과 어리동절한 표정이 보였다. 노인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보다시피 눈도 반쯤 안 보이고, 말도 못 합니다. 그래서 기밀 유지가 필요한 곳에서 일하지요."
"흥, 그 말을 들으니 더 수상해 보이는구나."
"수상한 놈을 어떻게 마탑에 들이겠습니까. 이 노인네가 여기서 일한 지 20년이 넘었습니다.”
마법사는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이었지만, 20년이나 마탑에서 일했다는 말에 더 이상 트집을 잡지는 못했다.
"손님 눈에 띄기 전에 놈을 데리고 사라져라.”
"예 자비로운 처사에 감사드립니다."
"빨리 꺼져!"
하인장은 얼른 노인을 잡아끌며 멀어졌다. 마법사가 사라진 후, 그가 조그맣게 속삭였다.
"죄송합니다, 미겔 님.“
“괜찮다. 모든 준비는 끝났느냐?"
말을 못 하는 척하던 노인이 물었다. 하인장은 낮고 빠르게 보고했다.
"예, 마나석의 폭발로 결계가 무력화되는 것과 동시에, 결사대가 이곳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두었습니다."
“결계를 무력화할 수 있는 시간은 길어야 10분일 거다. 폭발을 확인하는 즉시, 워프 스크롤로 탈출해라.”
노인의 명령에 하인장이 고개를 저었다.
“미겔 님, 저는 결사대와 운명을 함께하겠습니다. 부디 허락해 주십시오."
“이건 대의를 위한 일이 아니다. 레베카 님을 위한 복수일 뿐이다."
“저도 레베카 님께 은혜를 입은 몸입니다. 끝까지 함께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인장의 간절한 호소에 노인이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눈을 뜬 노인이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뜻이 그렇다면 좋다. 더러운 찬탈자의 딸과 함께 지옥으로 가자."
* * *
처음 마탑에 대해 들었을 때 나는 해리포터 세계관 의 호그와트 학교를 떠올렸다. 패게 있어 마법사 세계의 이미지는 그것이 가장 강렬했기 때문이다.
‘게이트’라고 불리는 이동문을 건너 눈 깜작할 사이에 마탑에 도착했을 때는 기대감으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근사한 것은 게이트가 끝이었다.
마탑은 왜 탑이라고 부르는지도 모를 정도로 평범한 건물이었고, 마법사들은 그냥 로브 입은 사람들이었다. 재미있거나 흥미롭거나 특별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럼 올해 있었던 위대한 성과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급기야 대강당이라는 곳으로 이 동해서 장황한 발표를 듣자, 꼭 대학교에서 교수님의 강의를 듣는 것 같았다.
‘아앗, 의식이 흐려진다. 자면 안 되는데…….’
나는 필사적으로 허벅지를 쥐어뜯었다. 하지만 점점 내려오는 눈꺼풀을 막을 수가 없었다.
“이블린, 정신 차려라. 그러다 앞으로 꼬꾸라지겠구나.”
"허억!"
나는 왕의 목소리에 놀라 번쩍 눈을 떴다.
왕이 웃음 띤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폐하.”
“아니, 덕분에 잠이 깼다. 너는 조는 것조차 평범하지가 않구나."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눈만 깜박였다. 그런 나를 본 왕이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눈치 보지 마라 짐은 화나지 않았다.”
"네? 정말이세요?"
“그럼 네가 백탑주를 개처럼 끌고 온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반응해야 했느냐? 화를 내서라도 일단 수습을 해야 할 것 아니냐."
아앗, 소가 아니라 개가 되니까 상황이 더 이상해졌다!
마탑의 주인을 개처럼 끌고 다니는 여자라니. 확실히 망나니 같긴 하지만 이건 내 의도가 아니었다고.
“정말 죄송합니다, 폐하.”
“대체 어쩌다 그런 상황이 된 건지 좀 궁금하구나."
머뭇거리던 나는 결국 처음부터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백탑주가 붕대를 잡아 주길 은근히 원하는 것 같았다는 내 말에 왕이 분개했다.
“백석탑주, 감히 내 시녀를 희롱해?"
······사실대로 말한 건데 왜 누명을 씌우는 것 같지 씩씩거리며 백탑주가 있는 쪽을 노려보던 왕이 내게 명령했다.
“너는 여길 떠날 때까지 절대 내 옆에서 떨어지지 마라. 알겠느냐?"
“예, 폐하."
결국 나는 꼼짝없이 왕의 옆에 붙어 있는 신세가 되었다.
흑흑. 시녀장남 이건 약속이랑 다르잖아요. 재미도 없고 힘들기만 하다고요.
“그럼 마지막으로 간단한 실험을 통해 새로운 마법의 성괴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백탑주께서 시연에 협조해 주시겠습니다.”
그때, 지루하던 상황에 변화가 생겼다. 백탑주가 무대에 올라가자, 무대 뒤의 벽이 뻗어지더니 거대한 유리 공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유리 공은 성인 남자의 두 배 정도 크기였는데, 아무런 지지대도 없이 허공에 둥실 떠 있었다.
“저건······?"
“마나구라고 한다. 저 안에 마법을 사용하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보여 주지.”
하지만 나는 저게 무엇인지 궁금한 게 아니었다. 구역질이 나올 정도로 기분이 나빴다.
마치 다이애나의 목걸이를 봤을 때 같았다. 아니, 그때의 몇 배로 기분이 안 좋았다.
"폐하, 위험합니다! 지금 당장 피하셔야 해요!"
“이블린?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저건 그냥 마법 도구일 뿐이다."
왕이 황당한 얼굴로 나를 말렸다. 하지만 나는 머리를 울려 대는 위험 신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본능이 지금 당장 여길 벗어나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제 말을 믿기 힘드시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지금 당장 여길 벗어나셔야 해요. 진짜 위험하다고요!"
“폐하, 무슨 일이십니까?"
내가 난리를 치니 경호를 맡은 근위대장이 다가왔다. 그 뒤를 기서들이 따랐다.
왕이 무어라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콰앙! 하고 뭔가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몸이 내동댕이쳐졌다. 귀가 먹먹하고 삐이이 하는 이명이 들렸다.
어디에 긁혔는지 왼쪽 눈썹 끝이 화끈거리며 피가 후드득 흘러내렸다 피를 본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폐하!”
“짐은 괜찮다. 호들갑 떨지 마라!"
때마침 다가와 있던 기사들에게 둘러싸인 왕이 의자에 꼿꼿이 앉아 있었다. 조금 창백한 얼굴이긴 했지만 다행히 멀쩡해 보였다.
안도하던 것도 잠시, 주위에서 비명이 들렸다. 마법사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도망치는 중이었다.
무대 위의 유리 공은 어느새 새까만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정체 모를 뭔가가 안에서 난리를 치자 유리에 찍찍 금이 갔다.
백탑주가 온몸에서 빛을 뿜어내며 막고 있었지만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폐하! 피하셔야 합니다!"
근위대장이 소리치는 것과 동시에 유리 공이 깨졌다. 백탑주가 피를 뿜으며 나가떨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유리 공이 깨지는 순간, 안에서 난리를 치던 것들이 화살처럼 쏘아졌다. 검은 물체에 맞은 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시, 실드! 아악!"
“폐하, 킥!"
마법을 펼쳐 저항하던 마법사도, 방패로 막으려던 기사도 예외는 없었다.
한편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손을 내려다봤다. 가느다란 검은 뱀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 덜덜 떨기 시작했다.
뭔가가 날아오기에 손으로 움켜쥐었는데, 이런 걸 잡아 버리고 말았다.
“음, 넌 일단 여기 들어가 있자.”
나는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자루를 꺼냈다. 오늘 아침에 장난감을 담았던 것이었다.
검은 뱀은 매우 얌전하게 자루 안으로 들어갔다.
주변을 둘러보자 모두가 쓰러지고 나만 혼자 서 있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아니 , 왜 나만 살아남은 거야?"
나는 투덜거리며 왕에게 달려갔다. 왕은 창백한 얼굴로 눈을 감고 있었다. 다행히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들렸다.
"폐하, 빨리 일어나세요! 전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고요!"
그 순간, 왕의 이마에서 검은빛이 반짝였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나는 그 위에 손을 얹고 정신을 집중했다. 다이애나의 목걸이를 쥐었을 때처럼 새까만 뭔가가 내 손을 중심으로 모였다.
조심스럽게 잡아당기자, 검은 전갈 한 마리가 내 손바닥 위에 올라왔다 나와 눈이 마주친 전갈이 당황한 듯 꼬리를 움직였다.
“너도 친구랑 같이 있으렴.”
나는 얼른 전갈도 자루에 집어넣었다. 자루가 갑자기 거칠게 꿈틀거렸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그때 왕이 혁 소리와 함께 깨어났다
“이블린?"
“폐하, 긴급 상황입니다!"
막 정신을 차린 왕에겐 미안하지만 시간이 없었다.
"누군가가 건물 밖에서 폭탄을 터트렸어요. 유리 공 안에서 튀어나온 저주로 모두가 기절한 상태고요. 조금 있으면 폭탄을 터트린 범인이 이쪽으로 올 거 같아요."
그걸 어떻게 아냐고? 내가 범인이라면 그럴 테니까. 완전히 무력화된 목표를 죽이기 위해 달려올 것이다.
"다행히 제겐 성물이 있어서 쓰러진 사람을 깨울 수 있어요. 폐하, 제가 누굴 깨워야 할까요?"
아무나 깨울 순 없었다. 여기에 범인과 내통한 사람 이 있다면 나는 저항도 못 하고 죽을 게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