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그저 눈만 깜빡였다.
“오늘 일은 내가 주는 상이라고 생각하세요. 당산이 마탑을 마음껏 구경할 수 있도록 폐하께 부탁드렸습니다. 폐하의 수행은 다른 사람이 맡을 테니 신경 쓰지 않아도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피오나의 호희라고 생각하니 더 이상 거절할 수가 없었다.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인 피오나가 지시했다.
"여긴 내게 맡기고 곧바로 폐하를 뵈러 가세요. 오늘 일정이 당겨져서 빨리 출발할 것 같으니까요.”
"무슨 일이 생겼나요?"
"마탑에서 폐하의 호위를 위해 백탑주를 보냈습니다. 지금쯤 백탑주와 마법사들이 왕궁에 도착했을 겁니다."
"백탑주요?“
내 무식함에 당황한 피오나가 마탑의 마스터 중 하나라고 설명해주었다.
마탑은 적탑, 청탑, 황탑, 백탑으로 나누어져 있는 데, 그중 백탑의 주인이 백탑주였다.
“어, 되게 높은 사람이네요.”
"간단히 말하자면 그렇지요. 마탑에서 백탑주를 여기까지 보낸 것은 최대한 성의를 표시한 거랍니다."
경박하다고 내 말투를 꾸짖지 않는 모습에서 피오나의 변화가 느껴졌다.
“그래도 기죽을 건 없어요. 당신은 내 대리인으로 가는 것이니, 국왕 폐하의 수석 시녀와 같은 신분입니다."
품에서 작은 패를 꺼낸 피오나가 그것을 내 허리띠에 달아 주었다. 상아로 된 패에는 ‘왕실 보고 관리관 이블린 하인즈’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누군가 당신에 대해 묻거든 이 패를 보여 주면 됩니다. 어디에서든 어깨를 펴고 당당한 모습을 보이세요."
“네!"
나는 배시시 웃었다. 마탑에 놀러 가는 것보다 피오나가 나를 믿어 주는 게 더 기쁘게 느껴졌다.
* * *
나는 알현실로 가는 길에 마탑에서 온 마법사들을 발견했다.
누가 봐도 저건 마법사라고 부를 것 같은 차림이었다. 황금색 마법진이 수놓아진 하얀 로브는 평범한 사람은 입을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로 튀었다.
그리고 그들의 제일 앞에서 차원이 다른 화려함을 자랑하는 사람이 바로 백탑주인 듯했다.
"백탑주, 이곳 역시 선대 폐하께서 직접 설계하신 걸작입니다. 천장의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섬세한 변화를 이루며 서로 이어지는 것을 봐주십시오."
얌생이처럼 생긴 남자가 백탑주 옆에 찰싹 붙어서 관광 가이드처럼 떠들어 대고 있었다. 마법사들이 멍하게 서 있는 것도 저 얌생이 때문인 모양이다.
‘강제로 뚫고 가기도 그렇고, 나도 일행이니까 뒤에서 따라가면 되겠지?'
나는 무리의 제일 끝에 붙어 섰다.
그러자 내 앞에 있던 마법사가 나를 힐끗 돌아봤다. 그가 깜짝 놀란 눈으로 나를 보기에 나도 멀뚱멀뚱 마주 봐 주었다. 뭔가를 느꼈는지 다른 마법사들도 하나 둘 뒤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급기야 제일 앞에 서 있던 백탑주까지 고개를 돌렸다.
“넌 뭐야?!"
마법사들의 관심이 내게 쏠리자 얌생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그를 쳐다봤다.
"누구세요?"
"뭐, 뭐?"
"누군데 저한테 소리를 지르시냐고요."
내가 고개까지 갸웃거리며 물으니 얌생이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나는 왕실 부의전관인 리처드 프림로즈다!"
“그러세요? 전 왕실 보고 관리관인데요?"
나는 보란 듯이 피오나가 준 신분패를 톡톡 건드렸다.
응, 내가 너보다 더 높아.
애초에 왕실 보고 관리관은 왕의 수석 시녀인 피오나의 자리였으니까. 부의전관이 아니라 부시종장이 와도 나한테 소리를 지를 수는 없었다.
나를 하급 시녀 정도로 생각하고 깔봤던 얌생이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
"보, 보고 관리관이 왜 내 일을 방해하는 거요!"
"네? 폐하의 부름을 받고 알현실로 가는 중인데 댁이 길을 막고 있잖아요. 전 손님 모시는 데 방해될까 봐 얌전히 뒤를 따라가고 있었을 뿐인데요.”
그런데 왜 길 막고 소리 질러, 이 자식아.
핀이 칭찬한 '눈으로 욕하기’를 선보이자, 얌생이의 얼굴이 울긋불긋해졌다. 보는 사람만 없으면 당장 날 한 대 칠 것 같은 기세였다.
"허허, 이거 저희가 급한 걸음을 방해했군요. 리처드 공, 이만 알현실로 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나이 지긋한 마법사 한 명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눈치를 보아하니 얌생이의 설명이 굉장히 지루했던 모양이다. 다른 마법사들도 기다렸다는 듯이 찬성했다.
“여기서 길을 막고 있는 것보단 그게 더 생산적일 것 같습니다."
“저희는 워낙 무식해서 왕궁의 건축 양식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어서 빨리 국왕 폐하를 뵙고 싶군요.”
너희 지금까지 어떻게 참고 있었니?
마법시들이 대놓고 면박을 주는 바람에 얌생이의 얼굴이 목까지 시뻘게졌다. 건드리면 톡 하고 터질 것 같았다.
“아, 알겠습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부들부들 떨던 얌생이가 핵 몸을 돌렸다. 그가 마치 도망치듯 걸음을 옮겼다.
그를 따라가려던 나는 멈칫했다. 마법시들이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고개를 갸웃하며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백탑주와 눈이 마주쳤다.
정확히는 눈이라고 할 순 없었다. 로브를 깊게 눌러 써서 몰랐는데, 백탑주는 얼굴 전체에 봉대를 둘둘 말고 있었다. 워낙 꽁꽁 싸매는 바람에 머리카락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눈, 코, 입을 다 막으면 숨은 어떻게 쉬고, 앞은 어떻게 보는 거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자 백탑주가 쓱 손을 내밀었다. 손가락까지 붕대에 둘둘 말려 있었다. 그런데 왜 나한테 손을 내밀어?
"손잡으라고요?“
혹시나 해서 묻자 백탑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망설이던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상대가 마법사이니 뭔가 깊은 뜻이 있을 것 같았다.
‘사실 나한테 엄청난 마법의 재능이 있나?'
마법 대천재의 꿈을 꾸는 내 손을 꼭 잡은 백탑주가 갑자기 알현실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
나는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반쯤 끌려가듯 걸음을 옮겼다 마법시들이 기다렸다는 양 우리 뒤를 따라왔다.
"잠깐! 이거 좀 이상한데요?"
나는 급히 백탑주를 멈춰 세웠다. 백탑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우리가 손을 잡고 걷는 것은 남들에게 매우 이상해 보일 거라고 설명했다. 그러자 백탑주가 소매 속 에서 보석이 박힌 짧은 지팡이를 꺼내 내밀었다.
아니, 지팡이 맞잡고 걷는 것도 이상하잖아. 이게 무슨 심청전도 아니고.
‘아, 붕대 때문에 앞이 안 보이는 건가?'
뒤늦게 사정을 눈치 채고 미안해진 나는 좀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팡이 말고 끈 같은 건 없을까요? 아니면 제 소매를 잡고 걸으실래요?"
내 말에 잠시 고민하던 백탑주가 로브 속에서 붕대 끝을 꺼내서 내밀었다. 표정은 보이지 않지만 그가 매우 뿌듯해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 게 정말 최선이야?'
잠시 망설이던 나는 그의 붕대를 쥐고 걷기 시작했다. 백탑주가 고삐 매인 소처럼 나를 따라왔다.
손을 잡고 걷는 모습이 스캔들감이라면, 이건 다른 의미로 이상한 소문이 날 것 같았다.
그런데 정작 말려야 할 마법사들은 아무래도 좋다는 얼굴로 뒤를 따라왔다.
나는 내가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건지, 아니면 마법사들이 너무 태평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 백탑주의 붕대를 잡아끌면서 알현실까지 오고야 말았다.
“이블린? 그게 대체 무슨 꼴이냐?"
옥좌에 앉아 있던 왕이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다른 사람들의 표정도 거의 비슷했다.
아, 역시 이러면 안 되는 거였구나.
“제가 말씀드렸잖습니까, 폐하 아주 제정신이 아닌 여잡니다!"
왕의 옆에 서 있던 얌생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어디 갔나 했더니 여기 뛰어와서 내 욕을 하고 있었던 듯했다.
“이분께서 저희를 위해 왕궁을 안내해 주셨습니다.”
그때, 마법사 중 한 명이 재빨리 내 편을 들었다. 다른 마법사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아주 편안하고 쾌적하게 올 수 있었습니다."
“저희를 지루함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졸지에 궁을 안내한 공을 빼앗긴 얌생이의 얼굴이 썩어 들어갔다. 골치 아프다는 듯이 이마를 짚은 왕이 버럭 소리쳤다.
“이블린, 당장 이리 와라!"
"네, 폐하!“
나는 얼른 백탑주의 봉대를 놓고 쪼르르 달려갔다. 왕이 대뜸 내 뺨을 꼬집었다.
“너는 대체 생각이 있느냐, 없느냐! 어딜 가서 안 오나 했더니 밖에서 사고를 치고 있어?!"
”으갸가, 잘모해씁니다, 폐하."
“얌전히, 꼼짝도 말고 내 옆에 있어라!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혼을 내 주겠다!"
잔뜩 으름장을 놓은 왕이 겨우 손을 놓았다.
나는 깽깽거리며 구석으로 도망쳤다. 아직 화가 풀리지 않은 왕이 백탑주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백탑주, 내 시녀와 노닥거리는 꼴을 보니 여기까지 오는 게 별로 힘들지도 않았나 보군. 곧바로 마탑으로 출발해도 되겠소?"
“······.”
붕대로 감싸인 백탑주의 머리가 짧게 움직이니, 다른 마법사가 대신 대답했다.
"저희는 괜찮습니다, 폐하. 언제든 게이트를 열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럼 당장 가지.”
왕이 기다렸다는 듯이 벌떡 일어섰다. 그러자 사람들이 급하게 왕의 뒤를 따랐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 황한 나만 주춤거리고 있었다.
“이블린, 내 옆에서 조금도 떨어지지 말라고 명한 것을 잊었느냐?"
왕이 나를 핵 돌아보며 소리쳤다. 깜짝 놀란 나는 왕 에게 달려갔다 못마땅한 눈으로 나를 째려본 왕이 다 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아이고, 눈치 보여서 죽겠다.
나는 오들오들 떨면서 왕의 뒤를 따라갔다. 나 때문에 한 줄 뒤로 밀려난 얌생이가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지만, 깔끔하게 무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