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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아내로 취업합니다-56화 (56/240)

56화

"근데 제스터는 주군의 명령이라도 순순히 따른 적 이 없지 않습니까? 무슨 바람이 분 걸까요?"

제스터는 엄청난 괴짜였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만 했고,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법이 없었다.

갑자기 기사단을 뛰쳐나가 디저트 가게를 차린 것만 봐도 정상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 주제에 또 이블린의 경호는 받아들였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후후, 제스터 그놈도 우리 아가씨의 매력 앞에선 별 수가 없었던 거지.”

기사 하나가 코끝을 쓱 홈치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다른 기서들도 역시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전원이 평민 출신인 그림자 기사들은 이블린의 쾌활한 성격과 솔직한 모습을 좋아했다. 무엇보다 이블린이 공작을 무척 좋아한다는 점을 높게 샀다.

공작의 앞에서 이블린은 마치 주인을 보고 팔짝팔짝 뛰는 강아지 같았다. 온몸으로 ‘나는 너를 좋아해! 정 말 정말 좋아해!’라고 외치고 있었다.

이 순수한 애정의 폭풍에 휘말린 주인이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수줍게 끌려가는 모습은 기사들에게 큰 즐거움을 주었다.

“사실 우리 아가씨처럼 사랑스러운 분은 드물지.”

“전 위장 신분으로나마 아가씨와 친해졌습니다. 요즘은 멀리서 절 보면 손을 막 흔드신다니까요. 진짜 너무 귀여우시지 말입니다.”

“아, 좋겠다. 난 평소엔 궁에서 일하지 않으니까. 호위할 때 빼고는 아가씨를 뵐 일이 없네.”

아무것도 모르고 재잘재잘 떠드는 부하들의 모습에 모리스는 위가 다 아팠다.

‘다른 나라의 공주도 주군께는 안 어울린다며 악을 쓰던 놈들이 대역에게 홀라당 넘어가?'

괜히 찌증이 난 모리스가 서둘러 손을 휘저었다.

"쓸데없는 잡담은 그만하고 보고서나 가져와.”

쪼르르 달려온 기사가 제스터의 보고서를 내밀었다.

모리스는 이 미친놈이 무슨 소리를 적어 놨을지 긴장하며 읽기 시작했다.

제대로 된 형식도 없이 자기 할 말만 잔뜩 적어 놓은 보고서였다. 그래서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 많았다.

‘이블린이 커다란 나방과 도마뱀을 물리쳤다는 게 대체 무슨 소리야?'

제스터는 약간 변명조로, 이블린이 너무 잘 싸우는 바람에 자신이 나설 틈이 없었다고 썼다.

‘고작 나방이 나타난 것 때문에 전서용 매를 보낸 건가?'

다음 내용은 더 가관이었다.

제스터는 이블린이 채소를 좋아하는 것 같으며, 특히 구운 가지와 아스파라거스를 잘 먹는다고 적었다.

이어서 이블린이 장난감을 잔뜩 사들였다고 했다. 종이 인형과 나무 블럭 조각 세트, 소꿉놀이, 병정 인형, 오르골이라는 구매 목록까지 있었다.

‘갑자기 웬 장난감이지? 설마 테오 러셀에게 줄 선물은 아니겠지?'

약간 모자라 보이던 테오 러셀이 아주 좋아할 것 같은 물건이긴 했다. 하지만 이블린이 테오 러셀에게 선물 준다면 공작의 기분이 매우 나빠질 것이다.

모리스는 이블린이 그렇게까지 무모하지 않길 바라며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다행히 조금 쓸 만한 이야기가 있었다.

왕이 마탑을 방문하는데 수행원으로 이블린을 데려 갈 예정이라고, 하지만 마탑은 결계 때문에 자신의 은신 능력이 통하지 않아 경호가 힘들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뭐, 마탑이면 어쩔 수 없지 마탑의 마법사들과 근위 기사들이 있으니 암살도 불가능할 데요·'

모리스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별로 중요한 내용도 아니니 공작이 돌아온 뒤에 보고하면 될 듯했다.

"단장님!"

그때, 공작과 함께 레이우드 일가를 심문하러 갔던 기사가 돌아왔다. 얼굴에 핏방울 몇 개가 튀어 있었다.

"변종 상급 마나석의 행방을 알아냈습니다. 추적을 염려해서 아예 기록으로도 남기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알아내서 다행이군. 주군께선?"

“씻고 계십니다. 월리엄 레이우드가 하도 끈질기게 버티는 바람에 피가 좀 튀었거든요."

모리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워낙 늙어서 고문 도중에 죽어 버리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공작의 유능함이 승리한모양이다.

"참, 주군께서 떠날 준비를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일을 마무리 지을 몇 명만 남겨 두고 곧바로 마탑으로 출발하실 거랍니다."

"······어디라고?"

"월리엄 레이우드가 마탑의 적탑주에게 변종 마나석을 넘긴 모양입니다. 적탑주가 이번 일에 관련이 있는 건지, 단순히 이용당한 건지는 조사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기사가 해맑은 얼굴로 보고했다.

모리스는 어지러운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손을 내저었다.

“그, 그럼 변종 마나석이 지금 마탑에 있다고? 그것도 상급 변종 마나석이?"

"예, 변종 상급 마나석 20개가 있다고 합니다."

기사가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

모리스는 떨리는 손으로 제스터의 보고서를 확인했다. 다음 순간, 그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단장님? 어디 가십니까?"

당황한 기사들의 부름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정신없이 공작이 머무는 곳의 문을 열었다.

"주군!“

막 씻고 나왔는지 젖은 머리를 한 공작이 그를 돌아 봤다. 무심한 얼굴에서 어쩔 수 없는 피로가 묻어났다.

“무슨 일이지?"

“국왕폐하가 놈들의 목표입니다!"

머릿속을 맴도는 말을 단숨에 내뱉은 모리스가 들고 있던 보고서를 내밀었다. 의아한 듯 미간을 살짝 찌푸린 공작이 그것을 받아 들었다.

"폐하께서 오늘 이블린 아가씨와 함께 마탑에 방문 하신다고 합니다. 놈들이 그것을 노리고 일을 꾸몄다면 아가씨까지 함께 휘말릴 겁니다!"

모리스를 바라보던 무심한 푸른 눈이 크게 흔들렸다.

* * *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나는 씩씩하게 인사하며 보고 안으로 들어갔다. 퀭한 얼굴의 피오나가 나를 맞이했다.

"어서 와요, 이블린 오늘도 일찍 왔군요.”

“헤헤, 시녀장님 보고 싶어서 빨리 왔죠.”

장난스럽게 말하자 피오나가 살짝 눈을 흘겼다. 그래도 처음처럼 딱딱한 반응은 아니었다. 사흘 동안 함께 보고 정리를 하면서 동지애가 쌓인 모양이다.

"시녀장님, 오늘도 당한 건가요?"

조심스럽게 묻자 피오나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성검은 여전히 보고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피오나가 보초를 서는데도 어떻게든 틈을 찾아냈다.

그래도 처음처럼 보고 전체를 뒤집지는 않았다. 내가 정리한 부분만 골라서 어지르는 걸 보면 나를 약 올리려는 목적인 듯 했다.

“역시 제가 보고 관리를 그만두는 게 좋지 않을까요. 이래서야 끝이 없을 것 같은데요.”

“그건 폐하께서 반대하셨습니다. 이블린이 사라졌을 때 검이 무슨짓을 할지 모른다고 염려하시더군요.”

"······."

차마 반박할 수가 없는 말이었다. 시무룩해진 나를 다독인 피오나가 몸을 돌렸다.

“그럼 옷을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그동안 이곳을 지켜 주세요.”

“네, 맡겨 주세요!"

그녀가 떠난 후, 나는 준비해 온 장난감을 하나씩 꺼냈다. 지금 최고의 인기라고 추천받은 것들이었다.

적당한 자리에 장난감을 늘어놓은 나는 흠흠 목을 가다듬었다.

"성검 아, 우리 협상하자.”

보고 안에 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혼잣말을 하는 것 같은 민망함을 참고 말을 이었다.

"네가 한 번만 더 보고를 어지럽히면 난 폐하께서 뭐라고 하시든 여길 떠나 버릴 거야. 그건 너도 싫지?"

내가 왕에게 배를 째지 못한다는 것을 검이 알 리가 없었다. 나는 장난감을 가리켰다.

“앞으로는 보물 대신 이걸 가지고 노는 게 어때? 너만 좋으면 내가 같이 놀아 줄게.”

당연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카탈로그를 보고 오늘 필요한 보물을 정리하고 있는데,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피오나가 돌아왔다 그녀는 한쪽에 놓여 있는 장난감을 보고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이블린, 이게 대체 뭔가요?"

“검이 보고를 어지르는 이유가 심심해서인 것 같아서요. 다른 곳으로 관심을 좀 돌려 보려고요.”

“그래서 검에게 장난감을 주겠단 말인가요?"

"네, 좀 어린애 같은 성격이잖아요. 종류별로 가져왔으니 하나는 좋아하지 않을까요?"

내 말에 깊은 한숨을 쉰 피오나가 정색했다.

“이블린, 당신은 오해하고 있어요. 그 검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사악하고 무서운 존재입니다.”

안 해도 되는 일거리를 매일 만드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사악한데? 왕은 월급이라도 주지만, 이 녀석은 날 부려 먹으면서 아무것도 안 준다! 어떻게 이것보다 더 사악 할 수가 있지?

“이번 한 번만 시도해 보게 해 주세요. 장난감을 여기 둔다고 해서 딱히 손해 보는 건 없잖아요, 네?"

”······알겠습니다. 하루만 저기에 두도록 하죠.”

”와아, 감사합니다!"

내가 팔짝 뛰면서 기뻐하자 피오나가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다시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온 그녀가 말했다.

“오늘의 일정은 알고 있죠? 폐하를 모시고 마탑에 다녀와야 합니다.”

어제 피오나가 마탑에 가고 싶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한 번쯤 가  보고 싶다고 답한 게 문제였다. 나는 정 말 순수하게 놀러 가고 싶다는 의도였다.

그런데 정신을 차려 보니 내가 왕과 함께 마탑에 가는 수행원이 되어 있었다.

"저,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제가 폐하를 잘 수행할 수 있을까요? 전 아직 의상부의 일도 서툰데요.”

"충분히 잘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번 방문은 형식적인 것이니 마음껏 줄기다가 돌아오면 됩니다."

아니, 그래도 내가 마탑에서 사고를 칠 수도 있잖아. 내 화려한 업적을 알면서 이렇게 보내도 되는 거야?

그때 내 머리에 부드러운 손길이 닿았다. 깜짝 놀라 쳐다보자 피오나가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블린, 지난 사흘 동안 정말 열심히 일해 주었어요. 당선은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내가 그동안 당신을 오해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머리에 닿은 손길에서 흘러 들어오는 감정은 미안함과 고마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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