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핀은 테이블 위에 나방의 사체를 올려놓았다.
다이애나가 대놓고 싫은 티를 냈지만 그는 아랑곳 않고 나방의 날개를 잡아당겼다.
“이거 보아십니까?"
“나방날개요?"
“자세히 보십시오. 이거 전부 글자입디다.”
핀의 말에 흠칫한 나는 나방의 날개를 자세히 들여다봤다. 진짜였다. 깨알 같은 글자들이 촘촘하게 모여 서 나방의 날개를 이루고 있었다.
‘글자로 이뤄진 생물이라고?'
갑자기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핀이 창백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평범한 글자도 아닙니다. 누군가의 축음을 바라며 쓴 저주문인 것 같습니다.”
핀의 시선이 내 옆에 서 있는 다이애나에게 닿았다.
"분명 해밀턴 양의 어깨에서 나방이 나타났었죠."
“설마 제가 저주받은 건가요?"
다이애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의 반응에 당황한 핀이 허둥거렸다.
“아니, 가능성입니다. 가능성. 아직 확실하지 않아요!“
나는 나방의 사체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누군가 다이애나를 죽이기 위해 나방을 보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처음엔 보이지 않던 나방이 내가 손을 댄 순간 나타났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핀 저주는 어떻게 거는 거죠?"
‘예?"
“정확하지 않아도 좋아요. 일반적인 상식 수준에서 말해 주세요.”
”……글쎄요. 특정한 매개체에 상대를 해치려는 마음을 담아서 보내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여기서 한번 가정을 해 보자.
저주는 사실 상대를 죽이고 싶은 생각이 겹치고 겹쳐져서 하나로 집중된 것이라고.
누군가 다이애나를 죽이고 싶어서 매개체에 저주를 담아서 보냈다.
그런데 내겐 다른 사람의 생각을 글자로 바꾸는 능력이 있다.
그래서 내가 저주를 건드리는 순간, 그것이 글자로 변해버렸다
‘종이와 천 없이 바로 글자로 변해 버린 게 이상하지만 가능성은 충분해 일단 확인해 보는 수밖에'
나는 다이애나의 목걸이를 바라봤다. 기분 나쁠 정도로 새카맸던 목걸이는 전보다 색이 많이 옅어져 있었다.
“핀, 지금 다이애나가 걸고 있는 목걸이가 무슨 색이에요?”
"황금색······ 아닙니까?"
나는 예상 그대로의 대답에 탄식했다. 처음부터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제 눈에는 검은색으로 보여요."
내 말에 모두가 움찔했다. 나를 보는 눈이 겁에 질려 있었다. 흠흠 헛기침을 한 나는 적당히 말을 지어냈다.
“사실 제 약혼자가 예전에 신전에 있었는데…….”
나는 세스가 내게 아주 많은 성물을 줬으며, 그중 하나가 저주를 보고 실체화시키는 능력이 있는 것 같다고 둘러댔다.
“제가 볼 때는 다이애나의 목걸이에 저주가 걸려 있는 것 같아요. 한번 시험해 보는 게 어떨까요?"
놀란 다이애나가 목걸이에 손을 올렸다.
"재, 제 목걸이에요? 하지만 이건 종고모님이 선물로 보내 주신 건데……."
“제 착각일 수도 있어요. 확인해 보고 아니면 정말 좋은 일이잖아요.”
울상을 지은 다이애나가 목걸이를 풀어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나는 핀과 곰탱이에게 경고했다.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니까 다들 긴장해요."
검을 뽑아 든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을 위해 다이애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 대기시켰다.
“자, 그럼 갑니다!"
나는 손을 내밀어 목걸이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어 낼 때처럼 정신을 집중했다.
그 순간, 목걸이에서 검은 불꽃같은 기운이 화르륵 일어났다. 그것은 내 손을 감싸고 공처럼 부풀어 올랐다.
“아가씨! 손을 때십시오!"
다급한 핀의 목소리를 들으니 다른 사람 눈에도 이 새까만 공이 보이는 것 같았다. 나는 목걸이의 기운이 다 모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손을 핵 옆으로 부렸다.
내 손에서 떨어져 나간 공이 툭 바닥조로 떨어지면 서 점점 커졌다. 잠시 후 그것은 거의 테이블 만 한 도마뱀으로 변했다.
“징그러!"
곰탱이가 사정없이 도마뱀의 목을 내리쳤다. 하지만 검이 지나가자마자 잘린 목이 도로 붙어 버렸다.
이어서 핀이 도마뱀의 다리를 베었다. 이번에도 잘 린 부분이 순식간에 아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는 듯이 혀를 날름거린 도마뱀이 갑자기 다이애나 쪽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거긴 안 돼!"
나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포도주 병으로 도마뱀의 머리를 후려쳤다. 병이 깨지면서 도마뱀의 머리가 바닥에 처박혔다.
“둔기! 둔기 공격은 통하나 봅니다!"
핀이 검집으로 도마뱀을 때렸다. 마치 젤리를 친 것처럼 검집이 통통 튀어 올랐다. 그사이 정신을 차린 도마뱀이 머리를 흔들었다.
“성물을 가진 사람의 공격만 통하는 것 같습니다!"
핀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덩달아 마음이 급해진 나는 손에 잡히는 것을 들었다. 그것이 하필 포크였다.
나는 포크로 도마뱀을 마구 찔렀다. 도마뱀이 머리를 흔들며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이 자식! 여긴 왜 왔어? 너희 집에나 가!"
나는 발을 구르며 도마뱀을 위협했다. 그러자 원망스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본 도마뱀이 갑자기 몸을 핵 돌려 달아났다.
어어 하는 사이, 도마뱀은 나무 벽을 기어올라 사라져 버렸다.
“어떡하죠? 도망가 버렸는데요?"
“자신을 만든 사람에게 돌아갔을 겁니다. 저주 대상을 죽이는 데 실패하면 저주를 건 사람이 대가를 치르게 되거든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확인은 해 봐야겠어요.”
도망친 도마뱀 때문에 애꿎은 사람이 다칠까 봐 걱정이 되었다. 고개를 끄덕인 핀이 경비 초소에 연락해 서 사고가 생겼는지 알아보겠다고 했다.
일단 한숨 돌린 나는 다이애나를 확인했다.
“다이애나, 괜찮아요?”
"네? 네, 전 괜찮아요."
하얗게 질린 다이애나가 고개를 끄떡였다. 하지만 상태가 좋아 보이지는 않았기에 부축해서 의자에 앉혔다.
“이제 다 끝났어요. 목걸이도 정상으로 돌아왔고요.”
나는 다이애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테이블 위에 있던 목걸이를 보여 주었다. 불길한 검은색이 사라진 목걸이는 황금색 태양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하지만 다이애나의 눈에는 전과 다를 게 없다는 게 문제였다. 더 시무룩해져 버린 다이애나가 말했다.
“저 때문에 모두를 위험하게 만들어서 정말 미안해요. 목걸이가 문제라는 이블린의 말을 믿었어야 했는데……. "
“다이애나의 잘못이 아니잖아요. 미안해하지 말아요.”
다이애나를 다독인 나는 다른 사람들을 힐끗 쳐다봤다. 핀이 자신은 괜찮다며 씩 웃었다. 곰탱이는 별 관심 없다는 얼굴로 남은 빵을 주워 먹고 있었다.
반쯤 울먹이는 표정이 된 다이애나가 고맙다며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누가 해밀턴 양에게 저주를 건 걸까요?"
나는 핀이 눈치가 없다는 말에 공감하고 말았다. 애가 머리는 좋은데 감성이 좀 부족하다고 해야 하나.
"눈으로 욕하지 마시고요. 일단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잖습니까. 아가씨가 워낙 잘 때려잡아서 그렇지, 이거 살해 시도입니다?"
“그건 그렇지만요.”
나는 걱정스럽게 다이애나를 바라봤다. 치맛자락을 움켜잡은 다이애나의 손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제일 의심스러운 건 목걸이를 준 사람입니다만.”
"종고모님이 저를 저주하실 리가 없어요. 원래 사이도 나쁘지 않았고, 타국으로 시집가신 지 오래라 최근엔 얼굴도 뵙지 못한 걸요."
다이애나가 펄쩍 뛰었다. 확실히 종고모는 유산 같은 문제로 얽히기에도 촌수가 애매했다.
“그러고 보니 생일도 아닌데 생일 선물로 목걸이를 받은 거였죠?"
”······네."
“그럼 다른 사람이 다이애나의 종고모님을 사칭했을 가능성도 있네요.”
다이애나의 종고모가 두고두고 벼르다가 날을 잡은 게 아니라면 다른 사람의 소행일 가능성이 더 컸다.
“혹시 짐작 가는 사람 있어요?”
“자, 잘 모르겠어요. 누가 절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하는지."
“최근에 싸우거나 원한을 산 사람은 없습니까?"
다이애나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내가 보기에도 그녀가 누군가에게 죽이고 싶을 정도로 원한을 살 것 같지는 않았다.
“우리끼리 이럴 게 아니라 전문 기관에 맡겨서 조사 해 보는 건 어떨까요?"
내 제안에 잠시 고민하던 핀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주가 해결되지 않았다면 그랬겠지만, 지금은 비밀로 하는 게 나올 것 같습니다.”
“왜요?"
"잘못하면 해밀턴 양이 저주받았다는 소문이 날 테니까요. 이미 해결되었다는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평판만 망치려고 들 겁니다."
아니, 피해자에게 왜 그래? 아무리 인권이 바닥인 동네지만 너무 심하잖아.
완전히 겁먹은 다이애나를 보니 범인을 꼭 찾아야 한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해밀턴 양, 이 문제는 저한테 맡겨 주실 수 있습니까?"
뭔가를 생각하던 핀이 진지한 얼굴로 설명했다.
"마탑에 작게나마 연줄이 있습니다. 그쪽을 통하면 저주술사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조금 전의 도마뱀이 주인에게 돌아갔다면 분명 사망자나 부상자가 나왔을 테니 범인에게 닿을 수 있습니다."
“아, 다이애나가 아니라 그쪽부터 파 볼 생각이군요?“
"예, 그게 실패해도 이것이 있으니까요. 마법사의 도움을 받으면 추적하기 쉬울 겁니다.”
핀이 죽은 나방을 가리켰다 나방이 계속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던 걸 깨달은 나는 깜짝 놀랐다.
아무리 정신이 없었다지만! 핀 보고 눈치가 없다고 욕할게 아니었어!
"해밀턴 양의 신원은 비밀로 하겠습니다. 저를 믿고 맡겨 주시겠습니까?"
진지한 핀의 얼굴은 내가 보기에도 좀 멋있었다.
멍한 얼굴로 핀을 바라보던 다이애나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전 계속 피어슨 경에게 심술궂게 굴었는데, 왜 이렇게까지 도와주시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