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 * *
손수건 공장은 아주 순조롭게 돌아가고 있었다.
의상부 시녀는 나를 포함해서 6명이었고, 하루에 찍어 내야 하는 손수건은 5장이었다. 그림을 그리는 나를 빼면 한 명이 한 장씩 수를 놓으면 됐다.
내가 그린 그림은 검지만 했기 때문에 손이 빠른 사람은 30분 안에 자수를 끝낼 수 있었다. 그 뒤에는 할 일이 없어서 다들 팽팽 놀았다.
심심했던 나는 오목이나 마피아 게임, 윷놀이를 의상부에 전수했다.
처음엔 이게 뭐나는 반응이던 시녀들도 나중엔 눈이 시뻘게져서 윷을 던졌다. 우아한 척하는 마리아까지 중간에 인격이 바뀌곤 했다.
그런데 너무 떠들썩하게 논 탓인지 시녀장인 피오나에게 딱 걸리고 말았다.
“이블린 당신에겐 할 일이 필요할 것 같군요 오늘부터 보고의 관리에 대해 배울 겁니다.”
결국 나는 왕실 보고에 유배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다행히 보고의 관리는 의외로 쉬웠다.
첫째 카탈로그를 읽고 캐비닛에서 물건 꺼내기.
둘째 목록을 보고 캐비닛 속의 물건이 제자리에 있는지 확인하기.
이 두가지가보고관리인이 해야 할 일이었다.
"카탈로그엔 물건의 위치가 적혀 있지 않아요. 그건 저기서 찾으면 됩니다.”
피오나가 가리킨 것은 커다란 책이었다. 크기가 거의 내 몸통만 했는데, 보고에 있는 물건의 위치를 기록 해 둔 것 같았다.
“그래도 자주 사용하는 물건의 위치는 꼭 외워 둬야 합니다. 일일이 찾다간 시간이 부족할 테니까요."
피오나는 책에서 암기해야 할 것들을 짚어 주었다. 행사별로 사용되는 왕관과 예복, 그와 짝이 되는 홀과 보주와 반지, 특별한 의미가 있는 액세서리 세트까지 거의 백 가지는 넘을 것 같았다.
“한 번에 다 외우긴 힘들 겁니다. 오늘의 카탈로그로 연습해 보죠.”
오늘 보고에서 꺼낼 물건은 ‘황금 사자 왕관’과 ‘자수정이 박힌 십자반지'였다.
나는 책에서 두 물건의 위치를 찾고, 그것을 쪽지에 메모한 다음 달려갔다.
그런데 힘차게 캐비닛의 문을 연 나는 당황했다. 왕관이 있어야 할 자리에 웬 단검 한 자루가 놓여 있었다.
‘뭐지?'
나는 다시 한 번 캐비닛 번호를 확인했다. 하지만 제대로 찾아온 것이 맞았다. 단검이 놓인 곳을 살피던 나는 진열대 뒤쪽에서 나동그라진 왕관을 발견했다.
‘전에 넣을 때 실수했나?'
별생각 없이 왕관을 집어 든 나는 반지를 가지러 갔다. 그런데 반지 진열대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아까와 똑같은 단검을 보자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우선 자수정 반지를 꺼낸 뒤 문을 닫았다. 그리고 처음 왕관을 꺼낸 캐비닛으로 돌아갔다. 캐비닛 안은 텅 비어 있었다.
‘하, 왠지 예감이 안 좋더라니.'
차라리 똑같이 생긴 단검이 두 개였다는 결론이면 좋았을 텐데 아무래도 캐비닛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녀석이 있는 것 같았다.
‘뭐, 마법도 있는 세계니까 단검이 순간 이동을 쓸 수도 있겠지.'
나는 애써 흐린 눈으로 문을 닫았다.
문제는 보고 점검을 배우면서 일어났다.
목록에 적힌 물건이 모두 있는지 확인해야 하는데 캐비닛 문을 열 때마다 단검이 떡 하고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었다.
‘이 자식이 은근히 일거리를 늘리잖아?'
원래 있어야 할 물건은 구석에 밀려나 있거나 다른 캐비닛에 쑤셔 박혀 있었다. 이러다가 흠집이라도 나면 전부 내 잘못으로 몰릴 판이었다.
나는 얼른 피오나에게 일러바쳤다.
“시녀장님 웬 검이 절 쫓아다니는 것 같은데요?"
“이블린, 장난치지 마세요."
아니, 진짠데.
시무룩해진 나를 보고 피오나가 한숨을 쉬었다.
“무슨 이야기인지 자세히 들어 보죠."
나는 내가 겪은 일올 설명했다. 처음에는 반신반의 하던 피오나가 그게 어떻게 생긴 단검인지 물었다.
“은색 손잡이에 붉은 칼집이었고, 칼집 위는 작은 상징 같은 게 단추처럼 한 줄로 쭉 달려 있었어요."
내 묘사를 들은 피오나의 얼굴이 갑자기 새파래졌다. 그녀는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이더니 마치 쥐어짜듯이 말했다.
"절대로 그 단검을 건드려선 안 됩니다. 만약 다시 보게 되어도 못 본 척하세요.”
”······네.”
당황한 나는 얌전히 고개를 끄떡였다.
이마를 짚은 피오나가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며 나를 내보냈다 나는 귀신에 홀린 기분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 단검 느낌이 꼭 전에 본 성검 같았는데.'
내 앞에 나타난 것도 왠지 나를 홀려서 세스에게 가려는 것 같단 말이지.
‘검 주제에 스토커라니, 절대 상종하지 말아야겠다.’
하지만 다음 날 출근한 나는 상황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보고의 캐비닛이 전부 열린 채로, 안에 들어 있던 보물들이 모조리 쏟아져 나와 있었던 것이다!
충격을 받은 피오나가 쓰러지는 바람에 오전 내내 나 혼자 보고를 정리해야 했다.
‘안 되겠어, 이 미친놈을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아무리 열심히 정리해도 자리를 비운 사이 또다시 어지르면 답이 없었다.
나는 왕에게 이 미친 검을 보고 밖으로 퇴출시켜 달라는 청원서를 올렸다. 하지만 매우 단호한 거절의 답변이 돌아왔다.
[그렇게 할 수도 없지만, 그래서도 안 된다.]
아니, 왜죠?
다시 재고해 달라고 청원해 봤지만 이 문제는 더 이상 거론하지 말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결국 나는 무한 의 정리 지옥에 빠지게 되었다.
* * *
“이블린, 왠지 피곤해 보여요.”
모여서 점심을 먹는 도중 다이애나가 나를 걱정해 주었다. 실제로 피곤했던 나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어떤 애가 절 자꾸 괴롭혀서요.”
“네? 누가요?"
"좀 말귀를 못 알아듣는 애인데, 공작님을 너무 좋아 해서 저를 못살게 굴어요. 매일 물건을 어질러 놔서 진짜 죽겠어요.”
성검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안 된다고 들었기에 이렇게 두루뭉술하게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놀란 표정으로 내 이야기를 듣던 핀이 중얼거렸다.
“그거 혹시 사생아…… 아악!”
“미쳤어요? 어떻게 그런 걸 물어볼 수가 있어요?"
그의 다리를 걷어찬 다이애나가 화를 냈다. 나는 펄 펄 뛰는 그녀를 말렸다.
“걱정하지 마세요. 피 한 방울도 안 섞였어요."
아예 종족 자체가 다르다.
나는 애가 세스에게 첫눈에 반했고, 세스는 키우기 싫다고 거절했으나, 애는 계속 집착하고 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두 사람의 얼굴이 아주 묘해졌다.
“그냥 다른 집에 보내면 안 됩니까?"
"폐하께 여쭤봤는데 안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아니, 폐하까지 관련 있는 문제였습니까?"
깜짝 놀란 핀이 몸을 뒤로 뺐다. 아무래도 아이가 왕족의 사생아라고 착각하는 것 같았다.
"뭐, 한 가지에만 집착하는 아이라면 다른 쪽으로 관심을 바꿔 주는 것도 좋겠죠.”
“어떻게요?"
"같이 놀아 준다든가, 운동을 시킨다든가, 다른 취미를 만들어 준다든가. 다양하게 해 보면 좋을 겁니다.”
검이랑 같이 놀아 주려면 뭘 해야 하지? 고민하는 나를 보고 곰탱이가 물었다.
“그냥 때리면 안 돼?”
“안 돼.”
때렸다간 내 손가락이 잘릴 거다. 한숨을 쉰 나는 핀에게 감사를 표했다.
"고마워요. 한번 시도해 볼게요."
“별말씀을 꼭 효과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씩 웃은 핀이 남은 빵을 입에 밀어 넣었다.
옆에 있는 컵을 집으려던 나는 한쪽 눈을 비비고 있는 다이애나를 발견했다.
“다이애나, 괜찮아요? 왠지 저보다 더 피곤해 보이는 것 같아요.”
“아, 어제 잠을 좀 설쳐서요. 이상하게 몸이 무겁네요.”
다이애나가 힘없이 웃었다. 목에 걸린 새까만 목걸이 때문일까. 오늘따라 유독 얼굴이 더 창백해 보였다.
“점심시간이 아직 남았으니까 잠시라도 눈을 붙여요. 얼굴이 너무 창백해요.”
“그래야겠어요."
그때, 몸을 일으키는 다이애나의 어깨에서 뭔가가 팔랑거렸다.
반사적으로 손을 뻗은 나는 그것을 움켜잡았다. 손바닥 안에서 뭔가가 빠드득 부서졌다.
‘뭐지?'
무심코 손을 펴니, 시커먼 날개가 달린 나방 같은 것이 퍼드덕거렸다.
"으아악!"
나는 반사적으로 그것을 팽개쳤다.
정자 바닥에 툭 떨어진 나방이 퍼덕퍼덕 날갯짓을 했다. 분명 손안에 들어올 정도로 작았던 것이 어느새 비둘기만큼 커져 있었다.
"까악!"
비명을 지른 다이애나가 나방을 발로 밟으려 했다. 한데 펄쩍 뛰어오른 나방이 그녀의 치마에 달라붙었다.
“내가 잡을게!"
곰탱이가 용감하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나방이 푸드덕 날아올라 곰탱이의 손을 물어뜯었다.
“이게!"
나는 다급하게 손을 내질렀다. 내 주먹에 맞은 나방 이 퍽 하고 튕겨 나가더니 바닥에 떨어져 바르르 떨었다. 검을 뽑아 든 핀이 나방을 찔러 확인 사살을 했다.
“꽤, 괜찮아?"
나는 황급히 곰탱이에게 다가갔다. 피가 똑똑 떨어지는 손을 들여다보던 곰탱이가 눈을 깜빡였다.
“나비가 날 물었어.“
“그거 나비 아니야."
아마 나방도 아닐 거다. 나방에겐 사람의 손을 물어뜯을 이빨이 없으니까.
“손 주세요. 지혈부터 해야겠어요."
하얗게 질린 다이애나가 곰탱이의 손에 손수건을 묶어 줬다. 다행히 상처가 깊진 않았는지 금방 피가 멎었다.
“여기도 양호실 같은 거 있나요?”
“기사단에 의무실이 있을 텐데. 정확한 위치는 모르겠어요."
“그럼 핀이 알겠네요.”
핀 쪽을 돌아보자 그는 몸을 깊게 숙인 채로 나방의 사체를 관찰 중이었다.
“핀?”
“아가씨, 이것 좀 보셔야겠습니다.”
고개를 든 핀의 얼굴이 어느 때보다 심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