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이만 가지"
불타 버린 흔적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은 세스가 걸음을 옮겼다.
그가 태어냐고 자란 엘마이어 가문의 저택이 가까워 졌다. 흉물스럽게 불타 버린 별재와 달리 고풍스러우면서도 위압적인 모습을 자랑하는 건물이었다.
‘그녀가 보면 .뭐라고 했을까'
동그란 눈을 부릅뜨고 나를 여기에 가둬 둘 생각이냐고 따지는 모습이 떠올랐다. 억울하다는 듯이 입을 삐쭉이면서도 손으로는 그의 팔을 꽉 잡고 있을 것 같았다.
“이런······."
생각하다 보니 진짜 보고 싶어졌다. 이상할 정도로 강렬한 충동에 당황한 세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동요를 느낀 모리스가 ‘주군? 왜 그러십니까?'라고 물었지만 대답할 수가 없었다.
케인 엘마이어는 낡고 오래된 홀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리 추운 날씨가 아닌데도 피워 둔 벽난로 때문에 홀 안의 공기는 그리 좋지 않았다.
태피스트리와 사슴 트로피로 가득 채워진 벽도 묘하게 답답한 느낌을 주었다. 홀 안의 모든 물건은 한때 영광스러웠으나 지금은 빛이 바래 낡아 보였다.
그건 벽난로 앞에 앉은 케인도 마찬가지였다. 아직 중년의 나이에 불과한 그는 워낙 마른 탓에 주름진 노인처럼 보였다.
호박색 눈으로 아들을 힐끗 쳐다본 케인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까마귀가 왔군."
그걸로 끝이었다 케인은 다시 벽난로 속의 불꽃만 바라봤다. 어서 오라는 말도, 왜 왔나는 물음도 없었다.
케인의 시중을 들던 청년이 난처한 얼굴로 자리를 권했다.
“어르신께서 오늘 기분이 좀 안 좋으신 것 같습니다. 어서 앉으십시오. 마실 것을 내어드리겠습니다.”
세스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 앉았다. 아버지의 옆모습이 정면으로 보이는 위치였다.
그의 시선이 테이블에 놓인 성서로 향했다. 진주와 은박으로 장식된 성서 또한 세월의 흐름으로 낡아 있었다.
세스가 태어났을 때 케인은 저 성서를 뒤져서 직접 그의 이름을 지었다. 어머니는 몇 번이고 그때의 이야기를 하며 아버지가 그를 사랑하신다고 말했다.
신전으로 쫓겨난 뒤 세스는 자선의 이름이 대신하는 것 즉, 대용품이라는 뜻임을 알았다. 손수 지었기에 사랑이 담겨 있을 거라 믿었던 어머니가 순진했던 것이다.
“아버지.”
세스의 부름에 케인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는 세스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싫어했다. 차라리 선대라고 부르라고 소리 지를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버지라고 불러도 모른 척할 정도로 대화하기가 싫은 듯했다.
“결혼하고 싶은 여자가 생겼습니다. 아주 밝고 강한 저한테는 과분할 정도로 좋은 사람입니다.”
"······."
“제 결혼식에 와주시겠습니까?"
세스의 말이 끝나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케인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 벽난로만 바라봤다.
그때 조심스러운 기척이 다가왔다.
마실 것을 내온다던 청년이었다. 그은 말없이 앉아 있는 두 사람에게 데운 포도주를 내밀었다.
“정향을 넣고 데운 포도주입니다. 몸이 따뜻해질 테니 어서 드셔 보십시오.”
세스는 고개를 끄덕여 감시를-표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청년이 자신을 소개했다.
"저, 저는 네드 레이우드라고 합니다. 기억하지 못하시겠지만 예전에 몇 번 된 적이 있습니다.”
“아니, 기억하고 있다. 방계 중 가장 뛰어난 인재라고 소개받았지 아카데미를 수석 졸업했었나?"
세스가 자신을 아는 척하자 청년, 네드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예, 이제는 과거일 뿐이지만요. 무례하게 말을 걸어 서 죄송합니다. 결혼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축하드리고 싶은 마음에······.“
"출신도 모르는 천한 계집이라지?"
갈라진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놀란 네드가 고개를 돌렸다. 포도주를 벌컥벌컥 들이켠 케인이 비웃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저주받은 놈과 결혼할 여자가 없어서 돈을 주고 고아 하나를 사 왔다더군. 천한 출신답게 사치스럽고, 오만방자해서 가문을 욕보인다는 소문을 들었다.”
"······."
세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아버지를 바라봤다. 그러자 케인이 빈 잔을 그에게 집어 던졌다.
"결혼? 마음대로 해라! 짐승끼리 짝을 짓겠다는데 내가 어떻게 말리겠느냐? 하지만 내게 그 흉물스러운 꼴을 보일 생각은 마라! 감히 어디서!“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던 케인이 갑자기 기침을 시작 했다. 몸을 들썩이며 쿨럭 이는 모습이 고통스러워 보였다.
“어, 어르신!"
당황한 네드가 달려가 케인의 등을 문지르고 물을 먹였다. 한참을 부산을 떤 뒤에야 겨우 기침 소리가 잦아들었다.
“괜찮으십니까?"
기침을 하느라 기력을 다 써 버린 케인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울상이 된 네드가 케인을 부축해 좀 더 편히 의자에 기대게 했다. 다른 이가 본다면 그가 케인의 아들이라 착각 할 것 같았다.
“네드 레이우드.”
“예 ?”
나직한 부름에 네드가 고개를 들었다. 들고 있던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신 세스가 살짝 웃었다.
“그동안 선대를 돌봐 준 노고에 감사하지. 이건 진심 이야."
“저······."
네드가 무어라 말하려는 순간, 그의 가슴에서 뜨거운 피가 터져 나왔다. 순식간에 숨이 끊어진 네드가 힘없이 쓰러졌다.
보이지 않는 검.
살의를 품는 것만으로도 상대를 죽일 수 있는 바리사다의 능력이었다.
“너······! 네, 네가······!"
갑자기 네드의 피를 뒤집어쓴 케인이 눈을 부릅떴다. 너무 놀라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지 세스를 가리키는 손끝이 벌벌 떨렸다.
“싸구려 독이군요. 레이우드는 보기보다 가난한 모양입니다.”
다시 한 번 포도주를 맛본 세스가 잔을 내려놓았다. 케인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이젠 누명까지 씌워서 사람을 죽이는 거냐!"
"저와 아버지가 축으면 방계인 레이우드가 새로운 엘마이어 공작이 될 겁니다. 왜 갑자기 순진한 척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케인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원래 그는 세스에게 공작 위를 물려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선왕의 음모로 억울하게 작위를 박탈당하고, 7년 전쟁에서 공을 세운 세스가 대신 엘마이어 공작이 되었다.
분노한 케인은 방계에서 적당한 사람을 찾아냈다. 그것이 바로 네드 레이우드였다.
케인은 네드의 자식을 다음 대의 엘마이어 공작으로 만들 계획을 세웠다. 사검의 저주를 받은 세스에게서 멀쩡한 자식이 태어날 리 없으니 아주 쉽게 계승권을 뱄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이 직접 공작이 되길 원했던 네드가 멍청한 짓을 저질렀다 저 괴물을 독살할 수 없다는 것도 모르고!
몸을 일으킨 세스가 바닥에 떨어진 케인의 잔을 집어 들었다. 잔의 냄새를 맡은 그가 웃었다.
“이쪽은 만성 독이군요. 레이우드와 손을 잡고 저를 독살할 생각은 없으셨던 것 같아 다행입니다.”
"네놈은 독조차 통하지 않는 악마니까!"
사검 바리사다의 주인인 세스에겐 독이 통하지 않았다.
그러지만 않았다면 케인은세상의 모든 독이란 독은 다 구해서 아들에게 먹였을 것이다.
테이블 위에 잔을 내려놓은 세스가 상냥하게 말했다.
“지난 이틀 동안 팔머 항에 있었습니다. 열심히 조사해 봤지만 결정적인 증거는 모두 빼돌리신 것 같더군요."
"······."
“지금이라도 내놓으시겠습니까. 아니면 강제로 받아 가길 원하십니까?"
이틀 만에 조시를 끝냈다는 말에 케빈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그는 눈을 꾹 감고 석상이라도 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세스는 다시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 제게 반역죄를 씌우고 싶으셨습니까?"
케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고집스러운 입술이 대신 그렇다고 답하고 있었다.
"네드 레이우드는 클라멘스 백작과 내통했지요. 그의 아내인 미아 레이우드는 라리사 모어에게 정보를 팔았고. 그의 아비인 월리엄 레이우드는 아버지께 팔 머 항을 열어 달라고 간청한 죄가 있습니다.”
"······."
“그들의 목숨으로 엘마이어의 죄를 용서받기로 했습니다. 제 손으로 속죄양을 축여 아버지를 구해 드리지요.”
"네 이놈!"
케인이 짐승 같은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다. 피를 뒤집어쓴 끔찍한 몰골이었지만, 세스는 그의 손을 피하지 않았다.
“이 악마! 차라리 나를 죽여! 지금 당장 죽여라!"
아들의 목을 조르며 발악하던 케인이 갑자기 기침을 시작했다. 이번 기침은 아까보다 심해서 내장을 다 토 해 낼 기세였다. 고통을 견디지 못한 케인이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가만히 아버지를 내려다보던 세스가 몸을 굽혔다.
케인의 어깨에 닿은 손이 은은한 빛을 냈다. 신성력이 흘러 들어가자 기침 소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모든 일이 끝날 때까지 하얀 탑에서 머무십시오. 여기보다 지내기 편하실 겁니다.”
하얀 탑은 죄를 지온 왕족이나 고위 귀족을 가두는 감옥이었다. 케인은 아무 말도 없이 세스를 노려봤다.
"들어와."
부름이 떨어지기 무섭게 기사들이 문을 박차고 들어 왔다. 세스는 눈짓으로 케인을 가리켰다.
“하얀 탑으로 가실 거다. 정중히 모셔라."
기사들이 그리 정중하지 않은 손길로 케인을 일으켜 세웠다. 케인은 끌려 나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증오 섞인 눈으로 아들을 노려봤다.
케인의 등이 사라진 순간, 세스가 짧은 기침을 토했다. 벌겋게 피가 묻어나는 입술을 본 모리스가 경악했다.
"주군!”
"검의 힘을 쓴 반동일 뿐이다.”
세스가 아무렇지도 않게 피를 닦아 냈다. 바리사다의 힘을 썼다는 말에 모리스가 얼굴을 구겼다.
“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선대가 그녀를 모욕하셨고, 나는 화를 냈지.”
세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이런 식으로 화를 낼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그가 명령했다.
"레이우드 일가는 모두 체포하고 저택을 수색해서 증거를 찾아내라 이틀 안에 모든 일을 마치고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