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눈을 깜빡이던 것도 잠시, 나는 다시 세스의 앞으로 돌아왔다.
"안 갈게요.”
아주 잠깐 세스의 얼굴에 안도하는 표정이 스쳤다. 나는 내친김에 그의 반대쪽 손도 붙잡았다.
양손을 맞잡고 서로 마주 보고 있으려니 좀 부끄러웠지만, 세스에게 위로가 된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때, 바스락거리며 낙엽을 밟는 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왕궁 기사인 핀 피어슨이라고 합니다. 이쪽은 제 동료인 테오 러셀, 그 옆은 다이애나 해밀턴 양입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거의 랩을 하듯 빠른 속도로 말한 핀이 왔을 때의 두 배 속도로 물러났다. ‘정말 이렇게 가도 돼요?'라는 다이애나의 걱정이나, ‘나 배고파.’라는 곰탱이의 투덜거림도 점점 멀어졌다.
"당신 친구들이 다 도망갔군."
낮게 속삭이는 세스의 목소리에서 은근한 만족감이 느껴졌다 가만 보면 좀 심술궂은 면이 있다니까.
“어라, 저랑 같이 점심 먹을 사람이 없어졌는데요?"
“그럼 나랑 같이 먹을까?"
"네, 그 말 안 했으면 좀 화가 났을 것 같아요."
내 말에 작게 웃은 세스가 나를 정원 쪽으로 이끌었다. 왜 정원 쪽으로 가는지 궁금했지만 곧 알게 될 것 같아서 그냥 세스의 얼굴이나 설폈다.
‘뭔가 안 좋은 일이 있는 걸까?'
세스는 다른 사람보다 감정을 읽어 내기 어려웠다.
워낙 표정 변화도 적고, 감추는 버릇까지 있었다. 그래도 그가 지금 우울하다는 것만은 느껴졌다.
힐끗힐끗 쳐다보는 내 시선을 느낀 세스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비, 좀 갑작스럽지만 출장을 가게 됐어.”
"출장이요?"
"응, 5일 정도 걸릴 것 같아."
갑작스러운 일이라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가 없었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어디로 가는지, 무슨 일인지 말해 줄 수 있어요?"
멈칫한 세스가 고개를 저었다.
"기밀이라 당신에게 말해 줄 수가 없어”
“혹시 위험한 일이에요?"
“아니, 전혀 위험하지 않아"
너무 딱 잘라 말해서 오히려 수상쩍었지만, 기밀이라니 더 이상 캐물을 수가 없었다.
시무룩해진 내 뺨을 세스가 살짝 쓰다듬었다.
“미안, 당신과 약속한 걸 지키지 못하게 됐군.”
세스의 사과에 둘이서 퇴근 때마다 연습하자고 약속 한 것이 떠올랐다. 갑자기 목이 메어서 마른침을 삼킨 나는 가까스로 답했다.
“일이니까 어쩔 수 없죠.”
내 귀로 듣기에도 기운 빠진 목소리였다.
진짜 별거 아닌데. 그냥 하루에 두 시간 정도 보던 얼굴을 못 보게 되는 것뿐인데 .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풀이 죽었다.
“당신을 혼자 두려니 마음이 놓이질 않아."
“전 괜찮아요. 어린애도 아닌걸요.”
애써 기운을 짜내서 말하는데 부드러운 입술이 이마에 닿았다. 위로하듯 밀려드는 감정에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다정하게 나를 다독이는 감정 중에는 쓸쓸함도 있었다. 나는 세스가 나만큼이나 쓸쓸해한다는 것을 느끼고 작게 웃었다.
“다섯 번만 더 해 주세요.”
“응?”
"5일 치, 미리 받아 두려고요.”
세스는 이미 한 번 했는데 왜 다섯 번이 남았냐고 묻지 않았다. 물어보면 이자라고 답하려고 했던 나는 조금 머쓱해졌다.
키스도 아니고 보보 정도는 이제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완전히 착각이었다. 뽀뽀 여섯 번에 완전히 해롱해롱해진 나는 공주님 안기로 옮겨졌다.
초록색 벽처럼 빼곡히 늘어선 나무 사이에 나를 내려놓은 세스가 길게 늘어진 담쟁이덩굴을 옆으로 젖혔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하얀 나무문이 나타났다.
‘어, 나 이런 거 동화책에서 본 적 있는데.'
소리 없이 열린 문 안으로 숨겨진 장소가 보였다.
아치형 지붕을 자랑하는 우아한 정자, 그네가 달린 나무 한 그루만 있는 아담한 공간이었다.
“우와!”
나는 동화 속의 주인공이 된 기분으로 걸음을 옮겼다.
늘어진 그네를 살짝 흔들어 본 후 정자로 다가가자
테이블 위에 맛있어 보이는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다.
“이런 건 언제 다 준비했어요?"
"글쎄.”
나는 세스가 건네주는 물수건으로 손을 닦은 후 과일 샌드위치를 집어 들었다. 사실 머리가 좀 멍해서 배가 전혀 고프지 않았다. 하지만 세스가 안심할 수 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세스도 어서 먹어요.”
세스 역시 식욕은 없어 보였지만 내가 집어 주는 음식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조용한 식사가 끝난 후에야 그가 입을 열었다.
“앞으로 매일 이 시간에 와서 식사하면 돼. 친구들을 데려와도 괜찮으니 왕궁의 음식은 먹지 마. 독이 들어 있을 수도 있으니까.”
겨우 남아 있던 낭만을 파사삭 깨부수는 소리였다.
"독이요?"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누가 손을 쓸지도 몰라. 폐하께서 주신 반지에 해독 기능이 있긴 하지만, 완벽하지는 않으니 조심해야 해.”
세스는 무서울 정도로 진지했다. 이렇게 주변을 경계하는 사람이 급히 떠나야 하는 이유가 뭔지 몰라 더 걱정스러워졌다.
“세스도 조심해요. 무사히 돌아와야 돼요.”
내 당부에 세스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전혀 기대하지 않은 말을 들은 사람 같았다. 나는 대답 없는 그를 재촉했다.
"빨리 약속해요.”
“약속할게."
약속도 받았는데 왜 이렇게 불안한지 모르겠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나는 세스에게 다가가 꼭 끌어안았다. 멍하게 있던 세스가 나를 마주 안아 주었다.
“기다릴게요."
"······응."
한참 후에야 겨우 속삭이는 것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그것으로 일단 만족하기로 했다.
* * *
천공신 아스트라이 아는 지고 왕에게 다섯 가지 보물을 주었다.
지배의 왕관, 진실의 반지, 빛의 창, 자비의 방패.
하지만 다섯 번째 보물은 슬픔이라는 은상자 안에 봉인되어 아무도 볼 수 없었다.
신은 상자를 결코 열지 말라고 명령했다.
이 상자 안에 든 것은 그대에게 크나큰 영광과 끔찍한 멸망을 줄 것이다.
지고왕은 죽을 때까지 신의 명령을 지켰다.
하지만 지고왕의 마지막 자손, 배반의 기사가 은상자를 열면서 울부짖는 남이 세상에 나왔다
울부짖는 검, 바리사다.
보이지 않는 검 무엇이든 벨 수 있는 검 주인을 선택하는 검.
하지만 수많은 칭호를 가진 이 검이 유명한 이유는 자신이 선택한 주인을 파멸로 몰고 가기 때문이었다.
신의 예언대로 바리사다의 주인은 모두 크나큰 영광 올 누렸으며, 끔찍한 결말을 맞이했다.
* * *
검은 재가 바람에 휘날렸다.
까맣게 탄 기둥과 무너진 벽의 흔적이 멀리서 보기에도 흉물스러웠다.
세스는 불타 버린 저택의 흔적을 눈에 담았다.
이곳에 그의 형과 여동생이 잠들어 있었다.
그는 이번에도 꽃을 가져오지 못했다. 아직 복수를 하지 못한자에겐 애도의 꽃을 바칠 자격이 없으니까.
“주군, 괜찮으십니까?”
모리스의 물음에 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기둥의 그림자 방향이 달라져 있었다. 생각보다 오랫동안 서 있었던 것 같았다.
“견디기 힘드시면 성수를…….”
“아니, 그 정도는 아니다."
시간의 흐름을 잊었을 뿐, 전처럼 기억이 똑똑 끊어지는 일은 없었다.
“확실히 괜찮아 보이십니다."
그의 안색을 살핀 모리스가 안도한 듯 말했다.
세스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사감’ 바리사다의 선택을 받은 그에게선 항상 죽음의 기운이 흘러나왔다. 사람들은 그를 마주 보는 것조차 두려워했고, 심할 때는 발작까지 일으켰다.
세스는 자신의 신성력으로 검의 기운을 억눌렀다. 원하지 않게 타인을 해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신적 충격이나 감정적인 동요를 겪으면 통제가 깨져 검의 기운이 폭주하곤 했다.
‘이상하군.’
세스에게 가족들의 무덤을 보는 것은 속죄이자 자해였다. 통제가 깨져 고통을 느낄 때마다 자신이 왜 살아 있는지 되새기게 됐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검의 기운이 무서울 정도로 잠잠했다. 마치 잠이 든 것 같았다.
‘내 통제력이 강해진 것은 아닐 테니 검에 문제가 생긴 건가?'
수도로 돌아가면 검의 상태를 확인해야 할 것 같았다.
그때, 이쪽으로 다가오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세스가 고개를 돌리자 모리스 역시 경계 태세를 취했다.
모리스의 손짓에 뛰쳐나간 기시들이 어수룩해 보이는 남자를 잡아 왔다.
세스를 본 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성표를 내밀었다. 악미를 퇴치하려는 것 같은 동작이었다.
“뭐 하는 짓이냐!"
울컥한 모리스가 남자의 얼굴을 후려쳤다.
세스의 뒤에서 악마라 욕하는 자들은 많았다.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악마 취급을 당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손을 들어 모리스를 멈춰 세운 세스가 물었다.
“무슨 일이지?"
“주, 주인어른께서 침입자들을 안으로 데려오라고 명령하셔서······.”
“감히!“
남자의 말에 분노한 기사들이 검을 쥐었다. 엘마이어의 주인인 세스가 본가에서 침입자 취급을 받다니, 용서할 수 없는 모욕이었다.
“그만 놓아줘라."
“주군, 이런 말을 한 자를…….”
“선대의 말을 그대로 옮긴 것뿐이지 않나."
세스의 말에 하얗게 질린 모리스가 남자를 팽개쳤다. 기듯이 일어난 남자가 본채 쪽으로 황급히 도망쳤다.
“선대께서 먼저 나를 보자고 하시다니 다행이군. 사홀 정도는 밖에 세워 둘 줄 알았는데 . 겨울이 아니라서 그런가."
모리스의 안책이 더욱 창백해졌다. 선대 공작인 케인 엘마이머가 했던 짓이 떠올라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