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응?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나는 멀뚱멀뚱 왕을 쳐다보다가 답했다.
"강요할 생각은 없지만 반발하지도 않을 것 같습니다."
“왜지?"
“지금 이 상황에서 자신의 손수건을 만들어 봤자 외면당하거나 대용품 취급을 받을 테니까요.”
그런 비참한 상황보다는 내 횡포에 휘둘리는 편이 차라리 마음은 편할 거다. 적어도 욕할 사람은 있으니까.
내 대답에 왕은 잠시 침묵했다. 한참 후에야 깊게 한숨을 쉰 왕이 말했다.
“일단 그 작업장이라는 것을 차리는 건 허락하마. 하나 만약 시녀들이 네 말에 따르지 않는다면 내 침모들을 보내 너를 돕게 하겠다."
"감사합니다, 폐하."
원하는 것을 이룬 나는 정중하게 절을 올렸다. 그런 나를 반히 쳐다보던 왕이 픽 웃었다.
"네가 벌써 의상부 전체를 장악했는지, 나도 좀 궁금하구나."
* * *
나는 대기실 앞에 ’이블린 하인즈의 ·손수건을 원하시는 분은 예약 접수를 해 주십시오. 손수건은 예약 순서대로 매일 5장씩 나눠 드립니다.’라는 안내문을 붙였다.
"도안을 보고 원하는 모양을 골라서 주문서를 써 주시면 됩니다. 12가지 동물이 준비되어 있고요, 새로운 도안이 필요하시면 상담 신청서를 작성해 주십시오."
손수건 접수는 핀이 맡았다. 가끔 진상이 나타나면 곰탱이가 주먹으로 해결했다.
두 사람의 활약으로 입구에서 북적거리는 사람들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남은 것은 두 달 동안 꽉 찬 주문서와 상담 신청서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5명의 일꾼을 거느리게 됐다. 의상부 시녀들이 모두 내 손수건을 만드는 데에 동의한 것이다.
왕에게 큰소리를 치긴 했지만 한두 명은 거절할 줄 알았기에 의외의 결과였다.
“그런데 꼭 이렇게 유치한 걸 만들어야 해? 다른 좋은 도안도 많잖아!"
일꾼 1인 카밀라가 툴툴거렸다. 알록달록한 캐릭터가 그녀의 감성에 잘 맞지 않는 것 같았다.
“전 이런 것도 괜찮은데요. 자수 크기가 작아서 시간도 덜 걸리고. 도안 때문에 골치 아프지도 않고. 남들과 비교당하지도 않고."
무뚝뚝하게 말한 이는 의상부의 시녀인 앤이었다.
항상 피곤해 보이던 그녀가 입을 연 것은 처음이었다. 나도 모르게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자 앤이 살짝 얼굴을 붉혔다.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죄송합니다.”
“아뇨, 목소리가 너무 좋아서 놀랐어요. 앞으로도 자주 이야기해 주세요."
내 말에 더욱 얼굴이 빨개진 앤이 말없이 자수틀로 고개를 숙였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여러분, 제 개인적인 사정에 휘말리게 만들어서 미안합니다. 이 빛은 잊지 않고 꼭 갚도록 하겠습니다.”
이들도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내게 협조할 뿐 좋아서 돕는 것은 아니었다. 조만간 적당한 보상을 마련해야 할 것 같았다.
그때였다 말없이 자수만 놓던 마리아가 갑자기 바늘을 내려놓더니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하인즈 양,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어요.”
"······네?"
너무 진지한 눈빛에 순간 움찔했다. 마리아가 잔뜩 쌓인 주문서 쪽을 눈짓하며 물었다.
“왜 이렇게 한 거죠?"
"무슨 말씀이신지?"
“저라면 이러지 않았을 거예요. 매일 의상부로 몰려드는 사람 중 한 명을 고르고 골라 손수건을 줬겠죠. 절 부러워하는 다른 시녀들의 시선을 즐기면서요.”
나는 잠시 마리아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애써야 했다.
"어, 그러니까 저한테 매일 아침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치이면서 혼자 고생스럽게 손수건을 만든 후에 한 명에게만 던져 주지 않고 왜 이러냐고 묻는 건가요?"
”······네."
“그야 번거로 우니까요? 다른 사람에게도 민폐고, 해결할 수 있다면 빨리 해결해야죠."
한 번도 아니고 매일 그런 일을 일으키면 남에게 멱살이 잡혀도 할 말이 없지 않을까.
내 말에 마리아가 피식 웃었다.
"역시 당신과는 안 맞아.”
고개를 내저은 그녀가 다시 바늘을 집어 들었다.
“뭐, 당신 같은 사람에게 빛을 지워 두는 것도 나쁘진 않겠죠.”
* * *
“그건 프림로즈 양 나름의 인정이라고 생각해요. 이블린을 무시했지만 이젠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느낀 거죠.”
다이애나가 잔뜩 흥분해서 말했다.
반면 핀은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당신과는 안 맞는다는 말, 어디에서 인정이 느껴진 다는 겁니까? 오늘 밤에 암살자를 보내겠다는 뜻이라 해도 안 이상하던데요.”
“이야기가 나온 맥락이라는 게 있잖아요. 남들은 딱 보면 아는 건데 정말 눈치가 없다니까."
나는 티격태격하는 둘을 명하게 응시했다.
"저기, 왜 점심 먹으러 나와서 마리아 때문에 싸우고 있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앗, 그게…….”
얼굴이 빨개진 다이애나가 핀을 바라봤다. 민망한 듯 헛기침을 한 핀이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아가씨는 프림로즈 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마리아? 마리아가 뭐 어떻단 말이지? 잠시 고민하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말하면 별생각이 없는데요."
"역시 아가씨는 남들에게 인정받는 일에 별 관심이 없으시군요."
핀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럼 뭘 목표로 하시는지 여쭤봐도 됩니까?"
뜻밖의 날카로운 질문에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러자 다이애나가 핀을 노려봤다.
“그런 걸 왜 당신이 물어요?"
“아가씨를 돕는답시고 나섰다가 발목을 잡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어서요.”
“지금 저 들으라고 하는 소리예요?"
"아니, 왜 그게 그렇게 됩니까?"
나는 손을 들어 또다시 티격태격 히는 두 사람을 말렸다.
"진짜 솔직하게 말해도 될까요?"
"예.”
핀이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이애나도 두 눈을 반짝이며 내게 집중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제가 왕궁 한가운데서 누구 머리채를 잡고 패대기를 쳐도 괜찮았으면 좋겠어요.”
"······예?"
"누군가의 머리에 꽃병을 내리치고 발차기를 날려도 다들 박수 치고 호용해 주는 게 재 목표예요.”
저번 일을 겪으면서 깨달았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은 세스나 왕이 제시해 준 안전한 길과는 거리가 멀다고.
상대는 악독하게 칼을 들고 덤비는데, 나 혼자 우아한 척 바늘을 들고 싸우기는 싫었다.
나는 망나니가 되고 싶었다.
라리사 모어, 선대 공작, 그 외에 세스를 괴롭힌 사람들을 모조리 모아서 신나게 패 주고 바람처럼 사라지는 것이 내 목표였다.
“정말 재가 꿈에서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목표군요.”
핀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나는 씩 웃기만 했다. 누군가 이해해 주길 바란 목표는 아니었으니까.
혼자서 뭔가를 중얼거리던 핀이 갑자기 도를 깨달은 사람처럼 감탄했다.
“아-아가씨가 그동안 보인 지나치게 과격한 행동도 다 그래서였군요. 훌륭한 전략입니다. 매번 이렇게 파격적인 모습을 보이면 다들 적응하게 되겠죠. 나중엔 진짜 꽃병으로 남의 머리를 깨 버려도 그러려니 할 테 고요.”
“······.”
아무래도 나는 태생이 망나니였던 모양이다.
핀은 내 ‘전략적인’ 망나니짓에 감탄하면서도 너무 자주 논란을 일으키면 효과가 약해진다는 충고를 해 주었다
나는 모든 것을 의도한 사람처럼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입을 꾹 다물고 나를 지켜보던 다이애나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혹시 이블린은 '누군가'에게 복수하고 싶은 건가요?“
“네?"
"꼭 머리채를 잡거나 꽃병을 내리치고 싶은 상대가 있는 것 같아서요. 그 사람이 이블린에게 뭔가 나쁜 짓을 했나요?"
다이애나는 정의롭고 선량한 사람이었다. 자신에게 나쁜 짓을 한 사람에게만 복수할 수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아뇨, 그 사람은 저한테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네? 그럼 왜······.”
내가 원하는 건 복수가 아니니까.
-당신을 괴롭힌 사람들을 혼내 주면, 당신도 조금은 행복해지지 않을까.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나 혼자만의 소원.
‘세스가 들으면 왜 그런 컬 바라냐고 웃어 버리겠지만.'
의아해하는 다이애나를 모른 척하며 고개를 돌린 나는 깜짝 놀랐다. 커다란 나무 아래 환영처럼 낯익은 사람이 서 있었다.
“세스?“
내가 방금 세스를 생각해서 헛것을 보는 건가? 하지만 눈을 깜빡여도 그의 모습은 사라지지 않았다.
한낮의 짙은 그늘이 세스의 얼굴을 유령처럼 창백하게 보이게 했다. 그의 어깨 위로 떨어진 하얀 꽃잎마저 비현실적이었다. 손을 내뻗는 순간 어디론가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이비.”
나는 세스의 부름에 정신을 차렸다. 난처한 표정이 된 세스가 그의 가슴을 꾹 누르고 있는 내 손을 감싸 쥐었다.
“괜찮아?”
“어?”
나는 어리둥절하게 세스를 올려다봤다. 내가 언제 여기까지 왔는지, 왜 세스의 가슴에 손을 올리고 있는 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꼭 귀신에 홀린 것만 같았다.
“그냥 진짜인지 확인하려고 했는데…….”
"왜? 가짜 같았어?"
세스가 창백한 얼굴로 웃었다. 아니,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니까 내가 착각하는 거 아냐.
"무슨 일 있어요?"
고개를 갸웃거리며 쳐다보자 세스가 침묵했다. 그는 대답 대신 내 뒤쪽을 바라봤다.
“잠깐 사이에 진구가 더 늘었군.”
나는 황급히 뒤를 확인했다. 놀란 사슴 같은 표정이 된 세 사람이 나를 보고 있었다. 갑자기 뛰어나간 내가 세스를 추행하고 있으니 당황한 것 같았다.
"헉, 잠깐 이야기 좀 하고 올게요!"
해명을 위해 돌아가려는데, 팔이 살짝 당겨졌다. 세스가 붙잡은 손을 놓지 않은 것이다. 어정쩡한 자세가된 나는 그를 쳐다봤다.
“어, 손을 놓아줘야 ……."
“가지 마.”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은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