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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아내로 취업합니다-49화 (49/240)

49화

남자 안 한다고 고집을 부리는 곰탱이를 달래던 핀이 나를 응시했다.

“그보다 아가씨, 테오와 제가 의상부의 전속 기사로 임명된 거 아십니까?"

“네?"

“제 주군이신· 러셀 백작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왕실에서 근무하든 동안은 적극적으로 아가씨를 도우라고요.”

“우와, 진심으로 사양하면 안 될까요?"

“사양하지 말아 주십시오. 왕실 기사가 옆에 있으면 여러 가지로 쓸모가 있을 겁니다.”

차마 반박할 수 없는 말이었다. 조금 전만 해도 두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았는가.

“곰탱아, 너도 날 도와줄 거야?"

"응. 내가 지켜 줄게."

곰탱이가 아무 생각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 러셀 가문과 계속 싸울 이유도 없으니까 적당히 화해할 기회를 만드는 것도 좋겠지.’

곰탱이 아빠가 곰탱이를 보낸 것도 그런 뜻일 것이다. 한숨을 쉰 나는 녀석의 팔을 살짝 두드렸다.

“그래, 고마워 앞으로 잘 부탁해"

“응!"

곰탱이가 나사 몇 개 빠진 얼굴로 헤헤 웃었다.

“그, 그래도 이블린과 제일 친한 사람은 저예요."

내 팔을 꼭 끌어안은 다이애나가 불만스럽게 말했다. 귀엽기 짝이 없는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덩달아 피식 웃던 핀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시선을 돌렸다.

"뭐야? 러셀 가문이랑 원수 된 거 아니었어?"

나는 카밀라의 투덜거림을 못 들은 척하며 걸음을 옮겼다. 믿음직한 동료가 벌써 셋이라니, 썩 나쁜 시작은 아니었다.

* * *

모리스는 무거운 마음으로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주군인 공작을모시면서 수도 없이 드나든 곳이지만 전에 없이 손끝이 떨렸다. 그의 품속에 들어 있는 한 장의 기밀문서 때문이었다.

'‘주군, 모리스입니다. 급히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

잠시 후, 들어오라는 허락이 떨어졌다. 다시 한 번 옷차림을 가다듬은 모리스가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공작은 집무실 가장 안쪽의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빛이 환하게 내리쬐는 창가였지만 공작의 주변은 서늘한 냉기가 감돌았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고결함.

그를 사모한 나사우 공녀가 찬탄했던 것처럼. 공작은 단 한 점의 흠결도 없는 조각상처럼 보였다. 온기도, 숨결도 없는 비인간적인 무언가로.

"보고해.“

펜을 내려놓은 공작이 서늘한 눈으로 모리스를 바라 봤다. 마른침을 삼킨 모리스는 품속에서 문서를 꺼냈다.

“주군께서 말씀하신 대로·······.”

“짧게.”

“팔머 항에서 변종 마나석의 밀수를 도운 것이 확인 되었습니다."

변종 마나석.

겉보기에는 일반적인 마나석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특정한 신호를 받으면 폭발하거나 마나 역류를 일으킨다.

처음엔 단순히 불량품으로 취급되었지만, 127명의 사망자를 낸 닉스 강의 참변 이후 누군가 의도적으로 만들어 낸 무기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에 왕은 변종 마나석의 위험성을 느끼고 공작에게 비밀리에 조사를 명했다.

그리고 1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공작은 눈부신 성과를 올렸다. 변종 마나석을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냈고, 유통하는 조직을 잡아들였다.

공작이 이블린과 만난 것도 변종 마나석을 밀수하는 배를 수색하다가 일어난 일이었다.

“그동안 잡히지 않았던 변종 마나석의 밀수 경로 또 한 팔머 항으로 보입니다.”

모리스는 참담함을 감추지 못했다.

팔머 항은 선대 공작, 케인 엘마이어의 소유였기 때문이다. 아들이 범죄자를 잡으러 다닐 때 아버지는 범죄자와 손을 잡고 아들의 등을 찌른 셈이었다.

‘아무리 주군이 밉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는 건가. 잘못하면 엘마이어 가문 전체가 죄를 뒤집어쓰게 되는데.’

화가 나서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모리스와 달리 공작은 담담한 얼굴이었다. 아버지의 죄를 담은 문서를 읽는 시선 또한 소름 끼칠 정도로 냉정했다.

“팔머 항을 통해 들어온 변종 마나석이 어디로 유통 됐는지는 알아냈나?"

"······."

“모리스.”

“죄, 죄송합니다.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팔머 항에 대한 강제 수색을 허락해 주신다면 좀 더 빠르게 결과를 낼 수 있을 듯합니다."

퍼뜩 정신을 차린 모리스가 보고했다. 잠시 고민하던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직접 가야겠다. 게이트 사용이 가능한 소수 인원으로 움직인다. 그림자 중 적당한지들을 뽑도록."

"예, 주군.”

"출발은 왕궁에 다녀온 뒤로 하지."

모리스는 멍하게 공작을 바라봤다. 이런 때에 왕궁에 가겠다는 공작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주군, 혹시 폐하께 보고드릴 생각이십니까?"

모리스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공작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이번 사건이 모두 정리된 뒤에 말씀드리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잘못하면 정치적인 문제로 번질 수도 있습니다."

아직 결정적인 증거는 나오지 않았지만, 변종 마나 석을 만들어 낸 곳은 이웃 나라인 카스티야였다.

선대 공작 부인이 카스티야의 공주인 것, 선대 공작이 소유한 항구에서 변종 마나석이 밀수된 것까지. 모든 상황이 공작에게 불리했다. 잘못하면 죄를 뒤집어 쓸 수도 있었다.

하지만 공작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이었다.

“폐하께선 이번 일로 엘마이어를 처벌하지 못하실 거다 선대가 팔머 항을 열어 준 건 폐하의 동생인 클라멘스 백작 때문일 테니까."

“아, 또 그 여자의 일이군요."

“폐하께서 동생의 목을 자를 생각이 아니라면 이번에도 모른 척하실 수밖에 없겠지.”

모리스는 그제야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했다.

팔머 항의 밀수 사건에는 클라멘스 백작 부인, 즉 라리사 모어가 관련되어 있었다. 교활한 라리사 모어는 이번에도 남편인 백작을 방패삼아 빠져나가려 할 것이다.

“그래서 폐하께 상황을 보고하러 가시는 겁니까?"

“아니,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고 사과하러."

공작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모리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약속이라니? 폐하께?'

모리스는 궁에 도착한 뒤에야 공작이 이블린에게 사과하러 왔음을 깨달았다.

* * *

내 손수건의 인기는 예상을 뛰어넘었다. 다들 온 힘을 다해서 ‘화제의 손수건을 손에 넣으려고 애를 썼다.

기사만 손수건을 받는 것은 불공평하다는 항의 때문에 의상부의 업무가 마비될 정도였다. 결국 나는 문제를 일으킨 죄로 왕에게 불려갔다.

휴식 중이었는지 편안한 차림의 왕이 나를 돌아보며 웃었다.

“너는 매번 내 예상을 벗어나는구나.”

"송구합니다, 폐하."

"송구하기는. 왕궁의 모든 남자가 손수건을 받기 위해 줄을 서다니. 대단한 일이 아니냐. 라리사 모어도 네게 왕국 최고의 미인 자리를 양보해야 할 것 같구나."

어쩐지 기분이 좋아 보이더라니. 이번 기회에 라리사 모어의 타이틀을 뺏어올 생각에 신이 난 모양이다.

‘왕국 최고의 미인이라니, 엄청 촌스럽다'

라리사 모어도 그런 타이틀은 뺏기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았다.

“그건 그렇고, 앞으로 어쩔 생각인지 궁금하구나. 계속 네 손수건을 원하는 자들에게 끌려 다닐 생각이냐?”

왕의 눈은 ‘더 이상의 소란은 용납하지 않는다.’는 경고를 담고 있었다.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폐하, 전 손수건으로 인기를 끌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지금 상황이 무척 당황스럽습니다. 차라리 아무에 게도 주지 않으면 어떨까 싶습니다.”

손수건을 만들어 봤자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내 손가락만 아플 뿐이었다. 마음 같아선 ‘안 돼 , 돌아가, 줄 수 없어’ 하고 모두를 쫓아내고 싶었다.

“너는 왕궁에 폭동을 일으킬 생각이냐?"

왕의 반응을 보니 안 만드는 것도 안 되나 보다. 시무룩해진 나를 보고 왕이 고개를 저었다.

“모두에게 줄 수 없다면 힘 있는 지들에게만 주는 것 도 좋은 방법이다. 받지 못한 자들이 반발하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힘 있는 자들에게 손수건을 줘 봤자 그들은 당연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받지 못한 사람들은 나를 싫어하게 될 거고. 그럴 거면 처음부터 주지 않는 것만 못했다.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결론을 내렸다.

"저, 폐하께서 허락하신다면 제 방식대로 문제를 해결하고 싶습니다."

“어떤 방법이지?"

”의상부에 공장-아니, 작업장을 차려도 될까요?"

"······?“

"저는 그림을 그리고, 다른 시녀들은 수를 놓으면 좀 더 많은 손수건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수요가 많다면 공급을 늘리면 그만이다. 의상부 시녀들을 모두 내 일꾼으로 쓴다면 하루에 손수건을 몇 개씩 찍어 낼 수 있었다.

내 설명을 듣고 이마를 짚은 왕이 골치 아프다는 듯이 물었다.

“그러니까 의상부 시녀들에게 네 손수건을 대신 만들게 하겠다는 소리냐?"

“네.”

"네가 직접 수를 놓지도 않았는데 그걸 네 손수건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제가 밑그림을 그리고 제 방석대로 만들어지도록 감독하면 당연히 제 손수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연예인 김치를 연예인이 다 손으로 담겠는가. 그냥 공장에서 그 사람의 비법대로 만드는 거지.

하지만 전생의 지식을 바탕으로 한 내 주장이 왕에겐 아주 해괴한 소리로 들리는 것 같았다.

“넌 참 특이한 생각을 하는구나. 한낱 옷가지를 꿰매는 것도 아니고, 네 상징이 될 수도 있는 손수건을 그런 식으로 만들겠다니."

“사람들이 갖고 싶어하는 것은 제 손수건이 아니라 거기에 담긴 유명세니까요.”

그 사람들은 내 자수가 아니라 내 발바닥이 찍힌 손수건도 아무 상관없을 거다.

어, 생각해 보니 이것도 꽤 괜찮은 아이디어잖아? 나중에 그림 그리기 귀찮으면 써먹어야지.

“제법 핵심을 찌르는 말이구나. 하나 자신의 손수건 대신 네 손수건을 만들라고 하면 시녀들의 반발이 만만찮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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