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
예상대로 마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그녀를 옆으로 밀쳤다. 별로 힘을 주지 않았는데도 마리아는 헝겊 인형처럼 가볍게 밀려났다.
“자, 이든 양?"
카밀라는 벽장 속에 숨어 있다가 살인마에게 들킨 사람처럼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상큼하게 웃어 줬다.
“저는 엘마이어 가문에서 약속은 반드시 지키라는 교육을 받았어요. 하지만 마리아의 말에 따르면 이든 가문의 풍습은 엘마이어와 좀 다른 모양이 에요, 그렇죠?"
갑자기 카밀라 집안을 모욕한 것이 된 마리아가 나를 노려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흥겹게 말을 이었다.
“괜찮아요. 저도 다 이해할 수 있어요. 이든 양이 직접 이든 가문은 명예를 몰라서 약속을 지킬 줄도 모릅니다!’라고 말한다면 전부 없었던 일로 해 드릴게요.”
이것들이 어디서 보상도 안 내놓고 튀려고. 전직 한국인의 명예를 걸고 그딴 꼴은 못 본다.
“내가 그런 꼴사나운 짓을 할 것 같아?”
발끈한 카밀라가 소리쳤다. 조금 전까지 바들바들 떨던 모습은 어디 갔는지 삿대질까지 한다.
“그리고 넌 네가 이겼다고 자신하는 모양인데!"
“네, 제가 이겼죠?"
“아니, 전혀! 나는 네가 이겼다고 절대로 인정 못해!"
"호오?"
이건 또 예상하지 못한 상황인데.
나는 흥미롭게 그녀를 훑어봤다. 내 시선에 움찔한 카밀라가 더 당당하게 억지를 썼다.
“네가 없는 동안 기사들에게 물어봤어 모두 네 자수가 형편없다고 말했다고! 그러니까 러셀 백작의 아들은 네 손수건이 마음에 든 게 아니라 너무 형편없어서 찢은 게 틀림없어!"
“기사 두 명이 제 손수건을 두고 싸운 걸로는 졌다고 인정할 수가 없다?"
"둘 다 네 손수건을 원해서 싸운 건지는 모르잖아! 네 손수건이 싫어서 싸웠을 수도 있지!“
카밀라는 이제 눈물까지 글썽이고 있었다. 진심으로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모습에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 좋아요. 그럼 졌다고 인정하게 해 드릴게요.”
”뭐?"
“제 자수가 얼마냐 인기 있는지 보여 드린다는 소리예요. 대신 인정하고 나면 제 말에 무조건 따르세요. 그걸 제 소원으로 하죠.”
쳇. 내가 이렇게 마음 약한 사람이 아닌데. 불쌍해서 많이 봐줬다. 속으로 쯧쯧 혀를 차는 내 마음도 모르고 카밀라가 발끈했다.
“나한테 네 명령에 따르란 소리야?"
“당연한 거 아니에요? 제가 상급자잖아요. 시녀장님께도 ‘나한테 네 명령에 따르란 소리야?’ 이럴 거예요?"
갑자기 논리로 두들겨 맞은 카밀라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나는 가슴 앞에 팔짱을 끼고 그녀를 훑어보았다.
“싫으면 다른 소원으로 할까요? 창피해서 두 번 다시 밖으로 나올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소원이 한 오백 개 정도 생각나는데……."
“아냐! 할게! 하겠어!"
카밀라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씩 웃었다.
“이번엔 말 안 바꿀 거죠?"
"······응."
그래도 부끄러움은 아는지 카밀라의 얼굴이 붉어졌다.
"좋아요. 그럼 증명하러 가죠.”
“뭘 어떻게 증명할 생각이죠?"
그때까지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서 있던 마리아가 톡 쏘아붙였다. 불신과 의혹으로 가득 찬 얼굴이었다.
나는 턱을 높게 들고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마리아, 혹시 노이즈 마케팅이라는 거 알아요?"
* * *
노이즈 마케팅은 논란을 일으켜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모으는 것을 말한다.
나와 러셀 가문과의 다툼도 고것과 비슷한 효과를 냈다.
러셀 백작의 아들이 탐냈으나, 가지지 못한 손수건!
여기에 캐릭터 자수라는 희귀성과 공짜로 얻을 수 있다는 장점까지!
‘인기가 없을 수가 없는 조건이지.’
그리고 현실은 내 예상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의상부 대기실 앞은 몰려든 사람들로 발 디딜 틈도 없이 북적거렸다. 기사뿐만 아니라 서기나 행정관 차림을 한 사람까지 보였다. 이들을 치우기 전엔 도저히 대기실 안으로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뭐, 뭐야 저 사람들?"
나는 놀라서 얼어붙은 시녀들을 대신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여긴 무슨 일로 오셨나요?“
내 목소리를 듣고 하나둘 돌아선 사람들이 갑자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러셀이라든가 손수건이라는 말이 들리는 것을 보면 내 예상대로인 것 같았다.
"혹시 이블린 하인즈 양이십니까?"
그때, 내 분홍 머리를 힐끔거린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나는 사무적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이블린 하인즈입니다.”
대답이 끝나자마자 내 주변으로 우르르 몰려든 사람들이 소리쳤다.
“하인즈 양! 오늘도 손수건을 나눠 주십니까?"
"왕실 수호 기사단의 스톤입니다. 제게 아가씨의 손수건을 주실 수 있습니까?"
“제겐 아직 페어 레이디가 없습니다. 제게 손수건을 주신다면 일생의 영광으로 삼겠습니다!"
“아가씨, 독특한 자수를 놓으신다고 들었습니다. 저희 집 강아지를 수놓아 주실 수 있습니까?"
사방에서 떠드는 소리에 정신이 없었다. 사람들을 말리는 다이애나의 목소리가 얼핏 들렸지만 밖으로 튕겨 나간듯했다.
‘어, 이거 좀 위험한데.'
이러다 누구 하나가 균형을 잃으면 도미노처럼 깔려서 납작해질 것 같았다. 위기감을 느끼는 순간, 비명과 함께 누군가가 허공을 날아갔다.
"뭐야?!”
"무슨 일이야?“
웅성거림과 함께 또 다른 비명이 들렸다. 마치 삽에 맞은 눈처럼 사람들이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비켜!"
잔뜩 화가 난 곰탱이가 앞을 막아선 사람들을 마구 집어 던지고 있었다. 아니, 네가 왜 여기서 나와?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그때 곰탱이의 뒤에서 피어슨 경-아니, 핀이 고개를 내밀었다. 그는 어리둥절해하는 나를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마저 치우겠습니다.”
핀은 주춤거리는 사람들을 밀쳐내며 길을 뚫었다.
"비켜요! 어린 아가씨를 둘러싸고 뭐 하는 짓입니까! 당장 물러서세요!"
"뭐야, 이 자식은!"
“우리가 먼저 왔다고! 너나 비켜!"
곰탱이에게는 한마디도 못 하던 사람들이 일제히 화를 냈다. 그러자 핀은 더 크게 으름장을 놓았다.
"불만이면 러셀 가문에 말하든가! 계속 막는 사람은 러셀 가문의 일을 방해했다고 보고할 겁니다!"
시끄럽게 떠들던 사람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그 꼴을 본 나는 좀 어이가 없었다.
‘뭐야, 러셀 가문은 무섭고 세스는 안 무서워서 이러는 거야?'
와, 진짜 큰일 날 사람들이네. 우리 집 에어컨이 얼마나 무서운데!
“이블린!"
순간 곰탱이가 만든 길로 다이애나가 뛰어들었다. 그사이 사람들에게 치인 탓인지 안색이 창백해져 있었다.
“괜찮아요? 어디 다치진 않았어요?"
“전 아주 멀쩡해요.”
“미안해요. 전 이번에도 아무 도움도 못 되고……."
다이애나가 눈에 띄게 풀이 죽었다. 당황한 나는 그녀를 다독였다.
“아이고, 전 진짜 괜찮아요. 잠깐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것뿐인걸요. 다이애나야말로 다치진 않았어요?"
걱정스러운 얼굴의 나를 말없이 바라보던 다이애나 가 뭔가를 결심한 표정을 지었다.
"저 힘낼게요. 다음에는 꼭 이블린의 친구다운 모습을 보여 줄게요."
응? 친구다운 모습은 또 뭐지?
“아가씨, 이럴 때가 아니라 새로운 사람들이 더 오기 전에 대기실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사람들을 뒤로 물리던 핀이 소리쳤다.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멀찍이 떨어져 있는 시녀들에게 손짓했다.
‘'거기서 뭐 해요? 빨리 들어가요!"
눈치만 보던 카밀라와 다른 시녀들이 달려왔다. 우리는 서둘러 대기실 안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카밀라가 넋이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조금 전에 일어난 일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 듯했다. 나도 넋이 나갈 것 같았지만 애써 싱긋 웃었다.
“그야 제 자수가 너문 훌륭해서, 다들 가지고 싶어하는 바람에 이런 일이 생긴 거겠죠?"
"무슨, 말도 안 돼 ! 거짓말!"
카밀라가 백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내 손수건을 원하는 사람들을 이미 목격한 뒤라 독기가 빠진 목소리였다.
“이든 양, 아직도 인정할 수 없나요?"
”······으으."
“가문의 명예를 걸고 말해 보세요.”
“인정하면 되잖아! 내가졌어, 졌다고!"
카밀라가 분한 얼굴로 내뱉었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상냥하게 덧붙였다.
“그럼 이제 반말도 쓰면 안 되겠죠?"
"야······."
하얗게 질린 카밀라가 고개를 푹 숙였다 . 잠시 후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 패배를 인정합니다. 앞으로는 하인즈 양의 지시에 따르겠습니다.”
“인정해 줘서 고마워요.”
내 말에 움찔한 카밀라가 핵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어쩔 수 없이 날 인정하는 것뿐이라는 뜻이었다.
‘뭐, 진심으로 나를 따를 필요는 없지'
남들 앞에서 내 말에 따르는 정도면 충분했다. 내가 진짜 공작 부인이 될 것도 아니고, 2년 뒤엔 서로 볼 일 없는 사이가 될 테니까.
“아가씨, 서열 정리가 끝났으면 안쪽으로 들어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대치중인 우리를 보고 머리를 긁적인 핀이 말했다.
내 승리에 기뻐하던 다이애나가 그를 째려봤다.
“혹시 눈치 없다는 소리 듣지 않아요?"
“그렇다고 계속 문 앞에 서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핀은 뭐가 문제냐는 듯 태연했다.
나는 다이애나가 폭발하기 전에 서둘러 손짓했다.
"자, 안으로 들어가죠. 곧 시녀장님이 오실 거예요."
부루퉁해진 다이애나가 내 팔에 달라붙었다. 그러자 졸래졸래 다가온 곰탱이가 반대쪽 팔에 붙으려고 했다.
"야, 넌 안 돼!"
당황한 핀이 곰탱이를 잡아당겼다. 곰탱이가 불만스럽게 그를 쳐다봤다.
"왜?"
“넌 남자잖아."
“그럼 남자 안 할래."
나는 진심으로 핀을 동정했다.
“고생이 많네요, 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