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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아내로 취업합니다-47화 (47/240)

47화

"처음 보는 보석인데, 오닉스인가요?"

“오닉스는 보통 검은색이지요. 저건 태양석이라고 불리는 골든 베릴일 것 같군요.”

불쑥 끼어든 목소리에 깜짝 놀란 우리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낯익은 기사가 뒷머리를 긁적인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어, 피어슨경!"

나와 함께 곰탱이와 맞서 싸우고, 곰탱이 엄마 앞에 서도 물러서지 않았던 동지였다.

“별일 없으셨어요?"

“아가씨도 무사하신 것 같군요. 다행입니다.”

피어슨 경이 다이애나의 눈치를 힐끗 보며 말을 이었다.

“저를 공작 전하께 의리 있는 기사라고 추천하셨다면서요? 한밤중에 갑자기 시커먼 갑옷을 입은 사람들 이 들이닥쳐서 기절할 뻔했습니다.”

“죄, 죄송합니다!"

당황한 내가 사과하자 피어슨 경이 손을 내저었다.

"감사하다는 뜻입니다. 공작 전하는 제 우상이셨거든요. 존경하는 분께 기사단에 들어오라는 제안을 받아서 무척 기뻤습니다."

“다행이네요. 그럼 피어슨 경도 공작가로 오시는 건가요?"

내 물음에 피어슨 경이 쓰게 웃었다.

“아뇨, 정말 안타깝게도 전하보다 빨리 저를 포섭한분이 있었거든요.”

"네? 그게 누군데요?"

”가이사 러셀 백작님입니다.”

러셀 백작이라면 곰탱이 아빠잖아?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아니, 백작 아들이랑 주먹질하고 백작 부인이랑 칼 들고 싸운 뒤에 그 집에 들어가겠다는 거야?

“아가씨는 표정이 무척 풍부하시군요. 얼굴만 봐도 무슨 생각중이신지 알겠습니다."

“정말 괜찮은 거예요?"

혹시 돈이 급해서 장기를 파는 마음이라면 내가 도와줄 수 있었다. 하지만 피어슨 경은 괜찮다며 웃었다.

"백작님께선 제게 셋째 아드님을 부탁하시더군요. 남들보다 부족한 아들을 바로 옆에서 보살펴 달라고요.”

백작의 셋째 아들은 바로 곰탱이다. 백작은 아들과 싸운 기사를 곧바로 자신의 편으로 흡수해 버린 것이 다. 놀라운 행동력이었다.

“전 지금까지 테오 러셀을 오만방자한 도련님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애가 좀 모자라더군요.”

“아니, 그걸 이제 아셨다고요?"

“그만큼 제가 테오에게 관심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테오의 뛰어난 검술 재능과 훌륭한 가문을 질투했죠.”

뒤늦게 사실을 알게 된 피어슨 경은 백작의 부탁대로 테오를 보살피기로 결심했다. 왕궁 기사의 의무 기간만 채우면 테오의 보좌관으로서 일할 생각이란다.

"보좌관보다는 왕궁 기사가 더 좋지 않아요?"

“아, 전 중앙에 연줄도 없고 실력도 별로라 서요. 평가사 이상으로는 승급하기 어려울 겁니다.”

피어슨 경은 왕궁의 경비를 맡는 수비대 소속이었다. 실력이 좋은 사람은 수비대에서도 상급 기사로 승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출세 코스인 근위 기사대와 왕실 수호 기사단에 들어가는 것은 연줄 없이는 힘들다고 했다.

‘하긴, 말단 공무원보다 대기업 비서가 좋긴 하지.'

나는 어느 세상이든 먹고사는 게 힘들다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 이블린을 배신했다는 뜻인가요?"

그때까지 조용히 듣고 있던 다이애나가 물었다. 피 어슨 경이 당황한 듯 고개를 저었다.

“저는 테오를 돕고 싶은 거지, 이블린 아가씨를 배신 한 게 아닙니다.”

“러셀 가문은 이번 일로 이블린에게 원한을 가졌을 거예요. 당신이 러셀 가문을 돕는 건 이블린을 해치는 일올 돕겠다는 거나 마찬가지라고요.”

다이애나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같은 편이라고 믿었던 피어슨 경이라 배신감이 더 큰 것 같았다.

“제가 러셀 백작에게 포섭당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결코 이블린 아가씨께 피해를 주는 행동은 하지 않을 거라고 맹세합니다.”

"주군인 러셀 백작께서 명령해도요?"

“예, 주군께도 미리 말씀드렸습니다."

"······."

다이애나가 입을 꾹 다물었다. 맹세한다는 말에 더 이상 따지진 못하지만 그를 믿지는 않는 듯했다.

점점 나빠지는 분위기에 나는 흠흠 헛기침을 하며 끼어들었다.

"피어슨 경, 일부러 제게 설명하러 와 줘서 고마워요.”

“아가씨가 저를 배신자라고 여길까 봐 두려웠거든요.”

내가 그렇게 오해해도 별다른 일은 없을 텐데, 두려웠다고 말하는 피어슨 경의 표정은 더없이 진지했다.

"배신자인지 아닌지는 이제부터 두고 보면 알겠죠. 이블린, 우리 어서 들어가요.”

뽀로통해진 다이애나가 내 팔을 잡아끌었다. 반쯤 끌려가는 내 뒤에서 피어슨 경이 소리쳤다.

“다음에 만났을 때는 저를 핀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저 사람 너무 뻔뻔한 거 같지 않아요?"

그때 투덜거리는 다이애나의 어깨 위로 검은 그림자 같은 것이 일렁거렸다.

‘어? 뭐지?'

나는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그림자는 이미 혼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 * *

"거기 너!"

날카로운 목소리가 쟁하고 복도를 울렸다. 뭔가 싶어 돌아보자 의상부 시녀들이 서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카밀라가 펄쩍 뛰었다.

"뭐야? 네가 왜 여기에 있어?"

"뭐, 출근했으니 여기에 있겠죠?"

나는 성의 없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자 카밀라가 부들부들 떨며 나를 손가락질했다.

“미, 믿을 수가 없어. 그런 파렴치한 짓을 해 놓고 뻔뻔하게 얼굴을 내밀다니!"

파렴치한 짓이라니, 뭘 말하는 거지?

하지만 내가 뭔가 묻기도 전에 다이애나가 먼저 앞으로 나섰다.

“이든 양, 예의를 좀 지 켜 주시겠어요?"

”뭐?”

"왕실 보고 관리관은 우리의 상급자니까요. 지금처럼 예의 없는 모습을 보이는 건 의상부 전체를 욕 먹이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나는 카밀라보다 더 깜짝 놀랐다.

다람쥐처럼 겁이 많은 다이애나가 아기 상어 같은 카밀라에게 덤벼들다니 . 마치 생태계의 대반란을 보는 기분이었다.

다이애나는 놀란 표정의 나를 보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자신을 믿고 맡겨 달라는 것 같았다.

‘다이애나의 입장에선 내가 곰탱이에게 모욕을 당하고 앓아눕더니, 돌아오자마자 피어슨 경에게 배신당한 상황이니까.’

상처받은 친구를 지키기 위해 다이애나는 평소의 모습을 버리고 과감하게 앞으로 나선 것이다.

"해밀턴, 네가 감히 그따위 말을!"

뒤늦게 정신을 차린 카밀라가 발칵 화를· 냈다.

나는 서둘러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렇게 화내지 말아요. 다이애나, 이든 양은 그냥 수줍어서 저러는 것뿐이거든요."

“네?”

당황한 다이애나에 이어서 카밀라가 이게 미쳤나는 얼굴로 나를 봤다. 나는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거렸다.

“그렇죠? 설마 저와의 내기에서 지는 바람에 제가 영영 돌아오지 않길 원했다거나 그런 건 아니잖아요?"

"······!"

아픈 곳을 찔린 카밀라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래그래, 우리 손수건 가지고 내기했잖아. 진 사람이 이긴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고리고 그 내기에 서 이긴 사람은 바로 나였다.

“여기까지만 하세요, 하인즈 양."

그때 우아하게 앞으로 나선 마리아가 방패처럼 카밀라의 앞을 막았다. 그녀는 살며시 내리깐 눈으로 나를 보며 정말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내기라니, 그건 우리끼리 장난으로 했던 말이잖아요? 이런 사소한 일에 집착하는 건 레이디답지 않아요."

“아하, 장난이었다?"

"카밀라는 의상부에 새로 들어온 당신이 쉽게 적용 할 수 있도록 어울려 준 것뿐이에요. 그걸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건 당선의 평판에도 썩 좋지 않을 거예요.”

한마디로 ‘내기는 없었던 일로 해라.’는 협박이었다.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참 재미있는 의견이네요, 마리아. 약속을 해 놓고 자기가 불리해지면 ‘그건 장난이었어!’라고 말하면 된 다니.”

“오해예요, 하인즈 양. 당신은 지금 너무 흥분해서 제 말을 잘못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군요.”

마리아가난감한 척 몸을 뒤로 뺐다. 자신은 좋은 마음으로 충고했는데, 무례한 내가 받아들이지 않아 안타깝다는 몸짓이었다.

나는 대놓고 코웃음을 쳤다. 어디서 개수작이야.

“그게 프림로즈의 가풍이라면 당신 가문과는 어떤 약속도 할 수 없겠네요. 언제 장난이었다고 말하고 약 속을 어길지 모르잖아요?”

"언사에 조심하세요! 프림로즈는 당신이 함부로 입에 담을 가문이 아니에요!“

갑자기 가문이 후려쳐진 마리아가 발끈했다. 나는 한쪽 귀를 막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어휴, 왜 그렇게 흥분해요? 그냥 당신 이야기가 재미있어서 농담으로 한 말이잖아요. 이런 사소한 일에 목소리를 높이다니, 레이디답지 않네요.“

“또 그런 식으로 나오는군요! 앵무새도 아니고 천박하게!”

우아한 척을 집어치운 마리아가 이를 드러냈다. 매 번 자신이 했던 말로 당하는 게 분한 모양이다. 나는 못 들은 척 생글생글 웃었다.

"아, 하지만 정말 놀라운 의견이었어요. 마리아. 국왕 폐하의 시녀 자리가 이렇게 농담 따먹기로 써먹을 수 있는 소재였던가?"

사납게 나를 쏘아보던 마리아가 멈칫했다. 나는 그녀 쪽으로 한 걸음씩 다가섰다.

“이든 양은 저한테 내기에서 지면 폐하의 시녀를 그만둘 수 있냐는 질문까지 했는데 말이죠. 그게 다 장난 이었다? 폐하께 말씀드리면 어떻게 생각하실지 좀 궁금하네요?”

평소라면 통하지 않을 협박이었다.

하지만 남들의 눈에 나는 러셀 가문과 개싸움을 벌이고도 궁으로 돌아온 사람이었다. 그건 왕이 내 편을 들어 준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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