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응, 들어와!"
나는 황급히 일어나 새집이 된 머리를 쓸어내렸다. 방으로 들어온 안나가 미안한 듯 물었다.
"낮잠 주무시고 계셨어요?“
“아니, 그냥 누워 있었어. 무슨 일이야?"
“전하께서 선물을 보내셨어요."
"어?"
절교장이 아니라 선물인 거 확실해?
주춤거리는 나를 보고 잠깐만 기다리라고 말한 안나가 밖에서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왔다.
파스텔 톤의 연한 핑크색 장미였다. 꽃송이는 조금 작았지만 봉오리가 살짝 벌어진 모습이 사탕처럼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카드도 있어요, 아가씨."
안나가 빨리 열어 보라는 것처럼 말했다. 나는 꽃송이 사이에 있는 카드를 꺼내서 열었다.
[이 장미에 이름을 주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해?
많이 아픈 건 아닌지 걱정 중인 세스가.]
이게 뭐지? 암호문인가?
뒤집어 보고 세로로 읽어 보기도 했지만 여전히 이해가 안가는 문구였다.
옆에서 안나가 눈을 반짝였다.
“전하께서 뭐라고 쓰셨어요? 네?"
"음, 그게…….”
엄청나게 낭만적인 문구를 기폐하는 것 같아서 좀 미안해졌다. 잠시 머뭇거리던 나는 적당히 얼버무렸다.
“장미 이름에 대해서?"
“어머, 역시 그것부터 말씀하셨군요. 이블린 로즈라니, 너무 낭만적인 이름이죠?"
"응? 뭐라고?"
순간 너무 놀라서 꽃다발을 떨어뜨릴 뻔했다. 장미에 준다는 이름이 내 이름이었어?
"7년 만에 만들어 낸 새로운 품종인데 다들 보자마자 아가씨를 떠올렸거든요. 그런데 전하도 그러셨나 봐요. 이 장미에 아가씨 이름을 붙이고 싶다고 하셨어요.”
아니, 7년 만에 태어난 애가 무슨 죄가 있어서 내 이름을 붙이는 거야 다른 좋은 이름 많잖아?
"멋대로 내 이름을 붙이면 이 장미를 만든 사람이 싫어하지 않을까?”
“전혀요. 그 사람은 장미에 아가씨 이름을 붙이고 싶다고 했는걸요. 그래서 일부러 전하께 이름을 지어 달라고 청을 넣은 거예요.”
안나는 까르르 웃으며 말했다. 나는 불쌍한 장미를 꼭 껴안고 다독여 주었다.
그래, 세상살이가 참 쉽지 않지?
내 우울한 표정을 읽은 안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가씨, 혹시 장미가 마음에 안 드시나요?"
“아냐. 이렇게 대단한 선물을 받으니까 어떻게 보답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래.”
나는 세스에게 손수건을 주기 위한 발판을 깔았다. 안나는 내 속셈도 모르고 덩달아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게요. 전하께선 전부 다 갖고 계신 분이니까, 뭘 드려야 할지도 걱정이네요. 그래도 아가씨의 선물은 뭐든 다 좋아하실 거예요.”
“그래서 말인데, 내가 제일 처음으로 수놓은 손수건을 드리면 어떨까 해서······."
나는 슬쩍 안나의 눈치를 살폈다. 안나가 절대 안 된다고 말리면 어떻게 설득해야 달지 고민이었다.
그런데 안나는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 그거라면 충분하죠! 아니 넘치죠!"
“어, 어? 그래? 다행이네.”
예상 밖의 반응에 당황한 나는 말을 더듬었다.
“그런데 그 손수건 어디에 있는지 알아? 아무리 찾아도 안보이더라.”
"귀중한 물건이라서 시녀장님이 특별 관리 중이에요. 제가 당장 가서 받아 올게요!"
안나는 말릴 톰도 없이 방을 뛰쳐나갔다. 그리고 시녀장과 다른 시 녀들을 줄줄이 달고 돌아왔다.
“드디어 이것을 꺼내는 날이 왔군요.”
장갑을 낀 시녀장이 내가 비뚤비뚤 수놓은 손수건을 보관함 속에서 조심스럽게 꺼냈다. 마치 응급 환자를 수술하는 의사처럼 진지한 얼굴이었다.
다른 시녀들은 이걸 어떻게 전해 줘야 잘 줬다고 소문이 날지 토론하기 시작했다. 왠지 무서운 분위기에 나는 장미만 꼭 끌어안고 있었다.
시녀들은 내가 직접 세스에게 손수건을 주길 바랐다. 하지만 나는 부끄럽다는 핑계로 거절했다. 대신 카드 한 장을 써서 손수건과 함께 보냈다.
[전 아주 멀쩡해요.
이 손수건에 재가 모르는 의미가 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공작님?
왠지 함정에 빠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이블린이.]
머지않아 잔뜩 흥분한 시녀가 답장을 갖고 돌아왔다.
[무슨 말을 해도 돌려주지 않을 거야.
만나러 가도 돼?
당신이 무사한 걸 확인하고 싶은 세스가.]
답장을 읽은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물어보지 말고 그냥 오면 될 텐데.”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시녀장과 시녀들이 합창하듯 말했다.
“안 됩니다."
“안 돼요!"
"절대 안 되죠, 그건"
“왜 안되는거야?"
나는 어리동절해서 물었다. 순간 모두의 얼굴에 난치함이 스쳤다. 흠흠 헛기침을 한 안나가 입을 열었다.
“아가씨도 아시겠지만 결혼하기 전의 남녀가 한집에서 살면 남들이 흉을 보거든요. 둘이 약혼한 사이라도 마찬가지예요.”
“나는 같은 집에 사는 게 아닌데?"
세스는 본궁에 살고 나는 별궁에 산다. 세스가 있는 본궁에서 내가 있는 별궁까지 오려면 마차로 10분이 나걸렸다. 그 정도면 거의 다른 동네라고 봐야했다.
“사람들이 어디 그런 걸 신경 쓰나요? 그냥 욕하고 싶어서 트집거리를 찾는 거지."
“그럼 사람들이 날 흉보고 있어?"
“아뇨, 그럴까 봐 전하께서 선을 딱 그으신 거예요. 이곳은 아가씨의 처소고, 전하께서도 미리 허락받지 않으면 감히 들어올 수 없는 곳이다-라고요."
안나가 신이 나서 말을 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아가씨를 흉보면 전하를 모욕하는 것이냐 다름없죠. 전하께 덤빌 용기는 없으니까 다들 입을 꾹 다물었고요."
그래도 몇몇은 경솔하게 입을 놀리다가 큰 대가를 치렀다고 했다.
“그러니까 아가씨, 허락 없이 그냥 와도 좋다는 말은 하시면 안 돼요. 전하께서 예의를 지키시는 것도 다 아가씨를 위해서니까요.”
"······응.“
사실 대역인 내가 욕을 먹든 말든 그에겐 상관없는 일일 텐데. 세스는 빗방울 하나도 닿지 않게 나를 감싸서 지켜 주고 있었다. 이런 무능 직원에겐 정말 과분한 일이었다.
“그럼 전하께 오셔도 괜찮다는 답을 보낼까요?"
“아니, 내가 공작님을 보러 가야겠어.”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지금 당장 세스의 얼굴을 봐야 할 것 같았다.
“아가씨! 이대로 나가시면 저희가 욕먹어요!”
시녀들이 필사적으로 나를 붙잡았다. 마음이 급했던 나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시녀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딱 10분, 10분 안에 끝내 드릴게요."
비장하기까지 한 목소리에 도로 자리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정확히 10분 후, 나는 작은 마차를 타고 본궁으로 향했다.
시녀들이 나를 붙잡고 꾸밀 때는 별생각이 없었는데 본궁에 가까워질수록 옷차림이 신경 쓰였다.
자꾸 모자를 만지작거리는 나를 본 시녀장이 말했다.
“아주 아름다우십니다."
나는 어색하게 손을 내렸다.
지금 나는 베이지색 보닛 모자에 하얀 린넨 드레스를 입고 황금색 숄을 두른 상태였다. 온몸으로 ‘저는 청순합니다. 뭐, 그렇다고요.’라고 외치는 것 같은 차림이었다.
"잘 어울리니 걱정하지 마세요. 분명 전하도 어여쁘 다하실 겁니다.”
부드러운 위로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나는 시녀장을 바라보며 지금껏 망설이던 말을 꺼냈다.
"리드부인, 안나를 제 전속시녀로 들일까 해요.”
시녀장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나는 전속 시녀를 뽑지 않았다. 그래서 시녀장이 직접 나를 돌보면서 바쁠 때만 다른 시녀들의 손을 빌리곤 했다.
“지금의 시녀들도 원한다면 제 전속으로 들일 테니 지원자를 알아봐주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시녀장은 기쁜 듯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망설이듯이 물었다.
“아가씨, 갑자기 마음을 바꾸신 이유가 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더 이상 어리광을 부릴 수는 없으니까요.
”
그동안 전속 시녀를 뽑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사라진 뒤에 혼자 남은 시녀가 나를 원망하는 게 무서웠기 때문이다.
내가 책임질 수 없는 관계를 만드는 게 싫어서 더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 새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한 나는 원래 내가 짊어져야 할 짐부터 되찾기로 했다.
“미안해요. 안 그래도 바쁜데 저까지 돌본다고 많이 힘들었죠?"
내 말에 조용히 미소 지은 시녀장이 고개를 저었다.
“사실 저는 아가씨의 유모가 된 것 같아서 기뻤답니다. 이제 제 손으로 아가씨의 머리를 빗겨 드릴 수가 없다니 섭섭하네요.”
“사실 저도 리드 부인이 제 머리를 벗겨 주는 게 제일 좋았어요."
비밀 이야기를 하듯 속삭이자 시녀장의 눈시울이 살짝 붉어졌다. 나는 고마움을 담아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장갑을 통해 느껴지는 체온이 무척이나 따뜻했다.
* * *
“이비.”
나는 다리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 세스를 보고 깜짝 놀랐다 몰래 찾아가서 놀라게 해 주려고 했는데, 정작 내가 당한 것 같았다.
“당신이 나를 찾아오다니, 선물을 받은 기분이군.”
"······.“
반가워하는 세스와 달리 나는 그를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이상하게도 온몸이 돌이라도 된 것처럼 삐거덕거렸다.
‘이러다 어색해서 죽겠다!'
나는 억지로 고개를 틀어 세스를 쳐다봤다. 그런데 세스와 눈이 마주치 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불이라도 난 것처럼 펄펄 끓는 뺨을 팔로 가렸다.
"보지 마세요.”
”싫은데.”
심술궂게 대답한 세스가 손을 뻗어 나를 들어 올렸다. 순식간에 마차에서 벗어난 나는 하늘 높이 떠오르는 몸에 비명을 질렀다.
”으악! 깍! 엄마야! 살려 줘!"
둥기둥기하지 마! 비행기 태우지 마! 내가 심바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