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아가씨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니, 공작이 대산 백작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자세한 대회는 듣지 못했지 만 원만한 합의를 하기로 결정한 것 같습니다."
"참으로 다행이구나."
전쟁이 터질까 봐 조마조마했던 왕은 가슴을 쓸어 내렸다. 눈치를 보던 전령이 덧붙였다.
“그런데 백작 부인이 자신은 그럴 수 없다면서……."
“뭐야?"
왕의 눈썹이 다시 하늘로 치솟았다. 움찔한 전령은 급하게 말을 이었다.
"합의하는 대신 아가씨께 진심으로 사죄하라는 조건이 있었는데, 백작 부인이 천것에게 사과할 수 없다며 고집을 부렸습니다. 백작이 화를 내고 달래도 봤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공작이 러셀 가문은 용서해도 오르센은 봐주지 않겠다는 말을 하며 모두를 돌려보냈습니다."
오르센은 백작 부인의 친정인 오르센 공국을 뜻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왕이 물었다.
“이블린은 그때까지 깨어나지 않았고?"
”의사의 진단이 끝난 후에 시녀들이 데려가서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분위기로 봐서 제가 떠날 때까지 깨어나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한숨을 쉰 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이 많았다. 다시 부를 때까지 쉬고 있어라.”
"황공합니다. 폐하. 그럼 신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전령이 사라지자마자 이마를 짚은 왕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일이 잘 풀린 것 같은데 한편으로는 머리가 더 아파졌다.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조심스럽게 다가온 피오나가 왕의 목과 어깨를 주물렀다. 왕은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있어야지 공작이 오르센 공국에 무슨 짓을 할 것 같은가?"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해상 봉쇄겠지요 공국의 배를 받아 주지 않겠다는 선언만 해도 타격이 꽤 클 겁니다. 엘마이어 공작가는 가장 큰 항구 도시들을 소유하고 있으니까요.”
그나마 해상 봉쇄로 끝나면 다행이다. 공작이 작정하고 공국의 목을 조이기 시작하면 피해는 천문학적으로 커질 것이다.
"애들 싸움에 남의 식구까지 다 굶겨 죽이겠다는 심보하고는. 대체 어디서 배워먹은 성질 머리야?"
순간왕의 얼굴을 쳐다봤던 피오나가 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어떤 면에선 잘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이블린에 대해모르는 사람은 없게 되었으니까요.”
두 거대 가문의 싸움으로 인해 이블린은 유명 인사가 되어 버렸다. 이블린의 이름은 몰라도 공작에게 약혼녀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정도였다.
원하던 결괴를 얻었음에도 왕의 얼굴은 편치 않았다.
"공작이 지나치게 행동하는 것엔 이블린의 책임도 있다.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제대로 된 처신을 가르쳐야겠어.”
”폐하, 폐하께서 그러실수록 전하는 더 맹목적으로 변할 것입니다.“
피오나가 굳은 얼굴로 말렸다.
“전하의 눈에 이블린은 품에 안겨 있는 아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런데 옆에서 자꾸 아이를 할퀴고 때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갈수록 예민해지고, 분노 때문에 시야가 좁아져 무조건 이블린의 편을 들 거라는 소리였다.
“그럼 어쩌란 소리냐?"
"폐하께서 이블린을 감싸고 귀여워해 주시면 전하께 서도 안심하시지 않겠습니까."
“지금보다 더?"
“이왕 하실 거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도록 확실하게 해야지요.”
잠시 고민하던 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맞다. 내칠 수 없다면 끌어안을 수밖에"
왕은 이블린에게 몸조리를 잘하라는 서신과 함께 귀한 약재를 보냈다. 이블린이 푹 쉴 수 있도록 휴가를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 * *
“홍, 시시하게 끝나 버렸군.”
궁에 있는 첩자가 보낸 편지를 읽은 라리사 모어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벽난로에 편지를 던져 넣은 그녀는 아쉬움을 담아 중얼거렸다.
“서로 싸우다가 죽어 버릴 것이지."
이블린이 러셀 가문과 부딪칠 것을 미리 알았다면 전쟁이 일어나도록 손을 썼을 것이다. 이런 좋은 기회를 날리다니 진심으로 찌증이 났다.
“러셀 백작은 자존심도 없냐? 조금 버텨 보지도 않고 바로 무릎을 꿇다니.”
-자존심보다는 실리를 챙기기로 한 것이겠지요.
벽난로의 불빛이 닿지 않는 어두운 곳에서 옹웅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리사는 그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는지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내가 부르기 전까지 연락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이거, 죄송합니다. 의뢰하신 물건이 완성되었다고 알려 드리려다가 그만······.
목소리가 켁켁 웃는 소리를 냈다. 불쾌감에 이마를 찌푸린 라리사가손을 내저었다.
”가져와.“
잠시 후, 라리사의 앞에 꾸물꾸물한 어둠이 생기더니 얇은 상자가 툭 튀어나왔다. 상자 안에는 황금색 보석이 박힌 심플한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목걸이를 착용할 때마다 저주가 스며들 겁니다.
매일 착용한다면 열홀 정도면 효과를 보고. 착용하지 않고 옆에 둔다고 해도 한 달이면 끝나지요.
목소리가 아주 자랑스럽게 설명했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상지를 닫은 라리사가 물었다.
“신성력이 있는 자가 목걸이를 본다면 저주가 걸려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챌까?"
-목걸이 자체에 저주가 걸려 있다면 알아챌 겁니다. 하지만 저 같은 일류는 목걸이 속에 완성된 저주를 집어넣는 혁신적인 방식을 쓰지요.
구구절절한 설명에 라리사가 다시 이마를 찌푸렸다. 하지만 목소리는 자신의 솜씨를 자랑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쉽게 설명하자면 포도주 병에서 한 방울씩 술이 새어 나오듯 아주 조금씩 저주가 흘러나오는 겁니다. 아마 대신관이 본다고 해도 쉽게 눈치채지 못할 겁니다.
"잘도 떠들어 대는구나. 그래 봤자 흑마법사도 되지 못하는 반쪽짜리 주제에.”
-……!
아픈 곳을 찔린 목소리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입꼬리를 틀어 올린 라리사가손을 내저었다.
“이제 가 봐.”
-저, 이번 일의 대금을 안 주셨습니다만?
목소리가 당황한 듯이 말했다. 라리사가 요염한 미소를 지었다.
“대금은 저번에 받았을 텐데?"
-그건 이번 의뢰비가 아니잖습니까. 마탑 안에 저주를 설치하는 것에 대한 대금인데요?
“그래, 그때 엄살을 피우며 뜯어 간 돈 말이야 이번 의뢰의 값을 쳐도 많이 남을 것 같군.”
-엄살을 피우며 뜯어 가다니요? 마탑 안에서도 활동할 수 있는 저주를 만드는 데 얼마나 비싼 재료가 필요한지 아십니까? 이렇게 되면 완전히 제 손해입니다.
"네 재주가 미천해서 비싼 재료를 쓰는 것을 왜 내 탓을 하지?"
-아니, 그게 무슨……!
목소리는 억울한 듯 떠들었지만 라리사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저주나 쓰는 천한 것의 요구대로 돈을 주다니. 왜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해야 한단 말인가.
화가 나서 씩씩거리던 목소리가 협박하듯 말했다.
-일을 시켰으면 돈을 주셔야지요. 이런 짓을 하고도 보복이 두렵지 않습니까?
“내가 왜 너 따위의 보복을 두려워해야 하지? 내 뒤에 누가 있는지 모르는 건 아닐 텐데?"
라리사의 얼굴이 더욱 표독해졌다. 목소리는 분한 듯이 씨근거렸지만 더 이상 대들지는 못했다.
"네 동료들이 몰살당하는 꼴을 보고 싶다면 어디 한 번 보복을 해 보든가.”
-……죄송합니다. 제가 큰 실수를 했습니다.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목소리가 비굴하게 용서를 빌었다. 오만한 미소를 지은 라리사가 손을 내저었다.
“듣기 싫으니 고만 사라져 다음엔 내가 부를 때만 대답하고. 알겠어?"
-······예. 마지못해 대답한 목소리가 폭 끊어졌다.
기분이 한결 나아진 라리사가탁자위의 종을 흔들었다.
잠시 후, 시녀가 나타나 필요한 것이 있는지 물었다.
라리사는 목걸이가 담긴 상자를 내밀었다.
“이걸 포장해서 다이애나 해밀턴에게 보내. 보낸 사람은 먼 나라의 친척 정도로 하고.”
“이블린 하인즈가 아니라 다이애나 해밀턴입니까?"
시녀가 확인하듯 묻자 라리사가 냉소했다.
"공작이 이따위 수작에 걸려들겠어? 하지만 멍청한 해밀턴 가문의 계집애는 좋다고 덥석 목에 걸겠지.”
라리사는 다이애나가 이블린 앞에서 피를 쏟으며 죽어 가길 바랐다. 그럼 다른 사람들도 이블린과 가까이 지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이블린 하인즈와 친구가 됐다고 떠들고 다닌다지? 아주 좋은 본보기가 되겠군.”
* * *
하, 인생…….
나는 침대에 누워서 멍하게 천장을 바라봤다. 아기 천사들이 신나게 나발을 불어 대는 그림을 보고 있자니 더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 아무리 좋아도 그렇지, 왜 기절을 하냐고!"
이 개복치만도 못한 몸뚱이 때문에 창피해서 살 수 가없다.
무엇보다 ‘첫 키스 하는데 상대가 기절함.’이라는 흑역사를 갖게 된 세스에게 너무 미안했다.
“힝, 이제 나랑 안 하려고 하겠지.”
책임감 강한 세스라면 내가 쓰러진 것조차 자신의 탓으로 돌릴 것이다 앞으로 키스는 절대 안 된다고 고개를 젓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됐다, 됐어 내가 키스하려고 여기 들어왔나,"
나는 고개를 휘저어 세스의 생각을 떨쳐냈다. 내 역할은 공작 부인의 대역이지, 세스의 연인이 아니었다.
‘맡은 역할이나 똑바로 하자'
안 그래도 시녀들에게 프리지어 궁에서 있었던 일을 들은 참이라 몹시 부끄러웠다. 내가 제대로 밥값을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월급은 꼬박꼬박 받으면서 일은 엉망으로 하다니. 이래서야 제대로 된 사회인이라고 할 수 없었다. 나는 오늘부터 달라지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그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안나입니다.”
안나는 시녀장을 도와 나를 돌보는 일을 했다. 하지만 시중이 필요 없을 때 나타나는 것은 뭔가 일이 생겼다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