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이비?"
갑자기 말이 없는 내가 이상했는지 세스가 내 이름을 불렀다. 뭐라고 설명하기 난처했던 나는 대충 눈에 띄는 하얀 건물을 가리켰다.
“저기 저 건물이 예뻐서요 뭐 하는 곳일까요?"
“대지의 신전이군.”
내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본 세스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성기사가 되기 위해 수련했지만, 형의 죽음 때문에 강제로 산전을 나온 사람이었다. 담담한 척한다고 해서 정말 괜찮은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원망스럽게 내 손을 응시했다. 아니, 저 많은 건물 중에 왜 하필 신전을 고른 거야?
“그런 표정 짓지 않아도 돼. 내겐 고향 같은 곳이니까, 우연히 마주쳐도 반가울 뿐이야.”
울상이 된 나를 눈치챈 세스가 웃었다. 그의 걸음이 자연스럽게 신전 쪽으로 향했다.
"거리도 가까우니 가 볼까? 한 번쯤 둘러보기엔 나쁘지 않은 곳이거든.”
나는 우왕좌왕하며 세스를 따라갔다. 여기서 무리하지 말라고 하는 것도 이상했고, 그렇다고 소풍 가듯 즐거운 마음으로 갈 수도 없었다.
정작 세스는 아주 담담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신전은 아주 작고 소박했다. 마당에는 커다란 꽃나무 한 그루가 전부였다. 안은 예배당 같은 분위기였는데, 의자 하나 없이 커다란 신상 하나만 서 있었다.
대지의 신상은 엄숙한 얼굴의 중년 여성이었다. 살집이 있는 몸매와 굵은 팔다리가 인상적이었다.
세스는 흘린 듯이 신상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모 습이 마치 엄마 잃은 어린아이처럼 외로워 보였다.
"······."
나는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내가 진짜 약혼녀였다면, 그의 가족이었다면, 위로의 말 한마디 정도는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욕심을 낼 수가 없었다. 슬픔을 덜 어 내라고 말하기엔 내 존재가 너무 하찮았으니까.
나는 살짝 세스의 등에 기댔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강아지가 주인에게 체온을 전하듯이.
“이비.”
나를 돌아본 세스가 손을 내밀었다. 나는 순순히 그의 품에 안겼다.
“그날 이후 신전에 온 것은 처음이야. 당신이 없었다면 영원히 오지 않았을지도 몰라."
이상하게 담담하더니, 역시 무리하고 있었구나.
나는 위로의 뜻을 담아 그의 등을 톡톡 두들겼다. 강아지도 가끔 이러니까 이 정도는 괜찮겠지. 그러자 세스가 내 어깨에 닿을 정도로 고개를 숙였다.
“내 이름…… 불러 줘.”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은 목소리였다. 나는 선선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한 번만 더.”
“세스?"
나는 그의 얼굴을 보려고 애썼지만 자세 때문에 실패했다. 나를 꼭 끌어안은 세스가 신상을 올려다보았다.
"끝까지 따르지 못하는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떨리는 목소리가 간절히 기도하듯 말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굳어졌다.
어, 괜찮은 거야? 강아지 끌어안고 신님께 탈덕 선언해도 괜찮은 거냐고?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나는 세스 대신 열심히 기도를 올렸다.
죄송합니다, 신님. 세스가 아직 철이 없어서 그래요.
솔직히 신전 안에 있든 밖에 있든 착하게만 살면 되는 거 아닐까요? 제가 엇나가지 않게 잘 지키겠습니다. 탈덕했다고 미워하지 마시고 예쁘게 봐주세요.
신님이 내 기도를 들으셨는지는 모르겠다. 내 말은 안 들어 주셔도 괜찮으니까, 한때 자신을 따랐던 세스만큼은 어여삐 여기셨으면 좋겠다.
그때, 덜컹 소리가 났다. 두리번거리는 나와 달리 세스는 곧바로 나를 안고 몸을 날렸다.
우리가 고해소 같은 공간에 숨는 것과 동시에 신전 의 문이 열렸다. 신관으로 보이는 통통한 중년 여성을 따라서 한 쌍의 남녀가 쑥스러운 얼굴로 들어왔다.
여자의 머리 위에는 소박한 화관이 씌워져 있었다. 그 외에는 아무 장식도 없었지만 나는 그녀가 신부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녀의 얼굴에 서린 설렘 때문에.
“자,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촛대에 불을 붙인 신관이 축문을 읽기 시작했다. 구석에 숨어 있는 사람이 있는지도 모르고 결혼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새하얀 웨딩드레스도, 반지도, 축하할 사람도 없는 작은 결혼식 하지만 두 손을 맞잡은 신랑 신부는 무척 행복해보였다.
중요한 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숨소리까지 죽였다. 세스도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날 끌어안은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다행히 결혼식은 금방 끝났다. 축문을 읽은 뒤에 서로에 대한 맹세를 나누고 키스를 하는 것이 전부였다.
감사의 인사를 연발한 신혼부부가 신전 밖으로 사라졌다. 신관 역시 흐뭇한 얼굴로 그들을 따라나섰다.
탁,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에 나는 참고 있던 숨을 내쉬었다.
”와, 안 숨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요."
세스가 재빨리 움직이지 않았으면 분위기가 몹시 어색해질 뻔했다. 귀족과 마주쳤다는 두려움에 신랑 신부가 마음 편히 결혼식을 올릴 수 없었을 테니.
“당신이 이해해 줘서 다행이야.”
세스가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간지러움에 움찔 한 나는 그를 돌아봤다.
“네? 뭘 이해해요?"
"보통은 왜 숨어야 하는지도 모르니까. 왜 평민의 결혼식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지도.”
아니, 이 사람은 대체 얼마나 거칠고 험악한 사바나에서 살아온 거지? 주변이 다 성격 파탄자란 말인가?
묘한 측은함을 느낀 나는 슬쩍 화제를 돌렸다.
"귀족의 결혼식은 뭔가 좀 다른가요?“
”훨씬 길고 복잡하지만 기본적인 건 비슷하지."
"끝에 키스하는 것도요?"
내 물음에 세스가 침묵했다. 잠깐 흔들리던 눈이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싫어?"
“제 체질 때문에요. 키스하고 나서 제가 이상한 반응을 보이면 어떡해요?"
세스의 얼굴이 복잡하게 변했다. 키스했다가 내가 아플까 봐 걱정스러운 듯했다. 나는 그가 뭐라 말하기 전에 냉큼 덧붙였다.
“그러니까 미리 연습해 볼래요?"
"······."
아니, 내가 흑심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고. 중요한 일이니까 미리 확인해 보는 게 좋지 않아?
솔직히 쪼끔 궁금하긴 했다. 이마에 뽀뽀만 해도 좋은데 키스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여기서?"
세스가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이럴 때 부끄러워하는· 건 하수다. 나는 좀 더 강하게 밀어붙였다.
“여기서는 싫어요?"
“아니, 그냥 이런 일이 처음이라.”
세스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그의 귀가 빨개져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몸을 돌려 세스의 옷을 답삭 잡았다.
"저는 이론의 신이거든요. 눈 딱 감고 있으면 제가 다 알아서 할게요.”
진지하게 말한 건데 세스가 웃어 버렸다. 한참이나 어깨를 떨던 그가 나를 꼭 껴안고 속삭였다.
“조건이 있어”
"네?"
“당신이 제일 처음 수놓은 손수건을 주면 키스하게 해줄게."
어, 잠깐 내가 손수건도 주고 키스도 하는 상황이야? 조금 억울했지만 키스하자고 꼬시는 쪽이 나라는 걸 생각하니 참을 만했다.
“그 손수건은 연습용이라서 엉망인데요? 제 이름만 딱 수놓아져 있는 건데요?"
“그게 좋아.”
“흥, 나중에 판소리하면 안 돼요?"
“옹.“
“그럼 눈 감으세요."
나를 뻔히 쳐다보던 세스가 살짝 눈을 감았다. 키스를 기다리며 눈을 감은 남자를 보자 지나칠 정도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갔다. 세스의 뺨에 닿은 내 손이 가늘게 떨렸다.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가 되자 이상하게 멈칫하게 되었다.
그때, 짧은 머뭇거림을 기다리지 못한 세스가 먼저 다가왔다.
부드럽고 따뜻한 감촉이 입술을 스쳤다. 놀라 굳어진 나를 붙잡은 세스가 열정적으로 입을 맞췄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세스와 키스하면 기분이 좋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내 예상을 훌쩍 뛰어넘었다. 더 부드럽고, 달콤하고, 황홀했다.
폭주하는 감각에 머리가 어찔어쩔해졌다. 더 이상 감당할 수가 없어서 피하려는 나를 따라온 세스가 다시 한 번 입을 맞춘 후에야 놓아주었다.
“이비.”
그가 살짝 거칠어진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하지만 나는 대답도 못 한 채 세스의 품에 쓰러져 기절했다.
* * *
“어찌 되었느냐?"
왕이 돌아온 전령을 반기며 급히 물었다.
왕궁과 프리지어 궁을 몇 번이나 오간 전령은 지친 얼굴로 말했다.
“다행히 잘 해결된 것 같습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해 보아라.”
잠시 생각을 정리한 전령이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두 시간 전쯤에 공작이 아가씨와 함께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아가씨가 정신을 잃은 상태라 먼저 의사를 불렀습니다."
"진짜 의식이 없었던 것이냐?"
기절한 척 연기한 게 아니냐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블린은 정말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
"진찰한 의사도 아가씨가 큰 충격을 받은 상태라 당분간 안정을 취해야 한다더군요. 공작에게 아가씨가 기절한 이유를 물었는데······."
"물었는데?"
"선전에서 기도를 올리다가 쓰러졌다고 했습니다."
왕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난리 속에서 갑자기 사라지더니, 신전에서 기도하고 있었다고? 지나가는 개도 안 믿을 것 같은 거짓말이었다.
“그런데 신전에서 쓰러진 것만큼은 사실인 듯합니다."
전령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쓰러진 여자를 안고 대지의 산전에서 나오는 귀족 남자를 신관이 목격했다. 범죄가 일어났을까 봐 두려워한 선관은 치안대에 신고했고, 조사 결과 목격된 사람이 공작과 이블린이라는 사실을 알아낸 것이다.
"공작이 제 발로 신전에 갔단 말이냐?"
왕은 다소 충격을 받았다. 널리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공작은 제 발로 신전을 나온 게 아니었다. 그는 신전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이유로 강제로 쫓겨났다.
그 뒤 공작은 신전 근처에도 발을 들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블린과 함께 신전에 갔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폐하,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시녀장인 피오나가 속삭였다. 퍼뜩 청신을 차린 왕이 전령에게 물었다.
“러셀 백작은 어떻게 되었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