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나는 이끌리듯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마치 과자의 신전처럼 꾸며져 있었다.
이국적이고 화려한 램프가 은은한 빛을 뿌리고, 가운데에는 커다란 제단처럼 유리와 황동 테두리로 장식 된 전시대가 있었다.
반원을 그리는 전시대에는 온갖 종류의 디저트들이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저도 모르게 넋을 잃고 구경하고 있자 세스가 먹고 싶은 게 있는지 물었다. 고개를 저온 나는 세스와 함께 2층으로 올라갔다.
"여기 자주 오는 편이에요?"
“가게에 투자하는 대신 내 전용석을 달라고 했거든. 내 자리가 남아 있는지 확인하러 가끔 찾아오지.”
“그럼 제스터 씨와는 투자자와 창업자 사이인 건가요?"
“아니, 오래된 악연이지.”
세스는 왠지 제스터에 대해 설명하는 것을 꺼리는 기색이었다. 가게를 열기 전부터 아는 사이였던 것 같은데. 대체 무슨 관계지?
“이쪽이야.”
세스의 전용석은 시선이 적당히 가려지고 커다란 창문이 옆에 있는 명당이었다. 벨벳으로 감싸인 폭신폭신한 의자에 앉으니 창밖으로 거리가 그대로 보였다.
”와, 이 풍경만으로도 투자할 가치가 있는데요?"
나는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말했다. 가게 맞은편은 헌책방이었다. 책을 사고파는 사람들이 쉴 새 없이 드나드는 게 보였다.
나는 테이블에 턱을 핀 채로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일상적인 모습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그때, 제스터가 커다란 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단호박 수프와 속을 꽉 채운 연어 샌드위치, 과일 주스가 차례대로 놓였다. 손을 씻을 핑거볼과 수건까지 준비한 모습에서 세심한 배려가 느껴졌다.
짧은 시간 내에 최선을 다했을 고에게 미안해진 나는 감사의 인사를 했다.
“갑자기 식사를 준비해 달라고 해서 미안해요. 정말 잘 먹을게요.”
“이런 것밖에 드리지 못해서 죄송한걸요. 그래도 디저트는 제대로 준비할 겁니다. 기폐하세요.”
찡긋 윙크한 제스터가 아래층으로 사라졌다.
"억지로 먹지 않아도 괜찮아.”
세스는 너무 단출한 음식이 마음에 안 드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기대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샌드위치에 오이가 들어 있어!'
이유는 모르겠지만 귀족들은 채소를 원수처럼 생각했다. 생으로 먹는 경우는 없었고, 마구 난도질한 후에 푹푹 삶아 국물만 썼다.
지금처럼 멀쩡하게 살아 있는 채소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샌드위치를 베어 물었다.
비록 소금에 절여졌지만 씹을 때마다 아삭아삭한 오이가 느껴졌다. 너무 행복해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천천히 먹어.”
양 볼이 볼록해진 내게 세스가 주스를 밀어 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빠르게 턱을 움직였다.
잠시 집을 나갔던 이성은 샌드위치 하나를 모두 해 치운 뒤에야 돌아왔다. 혼자서 너무 열심히 먹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는 민망함을 느꼈다.
“세스도 어서 먹어요.”
고개를 끄덕인 세스가 샌드위치를 집어 들었다. 먹는 모습이 너무 깔끔해서 무슨 광고라도 찍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같이 밥 먹는 것도 처음이네.’
밥상머리 예절만 봐도 집안 분위기를 알 수 있다던 데, 세스는 귀족 중의 귀족이라는 티가 났다 하도 우아하고 기품 있게 먹어서 샌드위치가 신성한 음식으로 보일 정도였다.
너무 뻔히 쳐다보고 있었는지 샌드위치를 내려놓은 세스가 물었다.
“왜?”
“그냥 좋아서요?"
솔직하게 말하자 세스가 뚝-하고 정지했다. 민망해진 나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 바로그때였다.
"거기! 딴 길로 새지 마!"
창밖에서 카랑카랑한 소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무 나도 익숙한 음성에 팔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이끌리듯 아래를 바라봤다. 그리고 헌책방 앞에 서 있는 내 동생을 발견했다.
“이비.”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였다. 튕기듯이 자리에서 일어섰던 나는 반사적으로 세스를 쳐다봤다.
“지금은 보기만 해야 해.”
나는 여기서 브란을 보게 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깨달았다. 의자에 도로 주저앉은 나는 멍하게 동생을 응시했다.
"야! 딴 길로 새지 말랬잖아! 너희들 때문에 나까지 감점당하면 죽여 버릴 거야!"
씩씩하게 소리치는 브란은 무척 건강해 보였고, 전 보다 키가 좀 자란 것 같았다. 하지만 주변의 소년들보다 한 뱀은 더 작아서 속상한 마음이 들었다.
“당신 동생은 잘 지내고 있어. 편입에 이어서 월반을 했고, 교수들의 평가도 좋은 편이야. 교우 관계도······ 나쁘지 않은 것 같군.”
교우 관계에서 잠시 망설이는 세스를 보자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입술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세스가 손수건을 내밀었다.
“내 앞에선 울어도 괜찮아.”
“이건 그냥 피곤해서 눈이 빨개진 거예요.”
고개를 저온 나는 슬쩍 바깥을 살폈다. 다행히 브란은 내가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박에선 안을 볼 수 없게 되어 있어."
“······디저트 파는 가게에 왜 그런 게 있죠?”
“주인이 별종이라서?"
뭔가 수상했지만 캐물을 여유는 없었다. 나는 동생을 보는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오늘은 아주 특별한 날이라는 것을, 다시는 이런 기회가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빨리 와! 빨리! 교문 닫히기 전에 돌아가야 해!"
양치기 개처럼 뛰어다니며 친구들을 모은 브란이 바쁘게 떠났다. 아카데미로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멀어지는 뒷모습에 괜히 가슴이 시렸다. 나는 슬쩍 세스의 손수건을 들어 눈가를 닦았다. 하필이면 그때 디저트를 가져오던 제스터가 깜짝 놀라서 물었다.
“헉! 울 정도로 맛이 없었어요?"
나는 절대 아니라고 그를 달래느라 한참을 애써야 했다.
제스터의 디저트는 그야말로 예술품이었다.
납작한 접시 위에 아름다운 도자기 화병이 놓였다. 화병 위에는 과일로 장식된 둥근 받침대가 있었고, 그 위에서 벌거벗은 아기 천사가 악기를 연주하는 중이 었다.
"두 사람을 위해 만든 사랑의 천사랍니다.”
장난스럽게 말한 제스터가 들고 있던 칼로 디저트를 잘랐다 놀랍게도 천사부터 도자기 화병까지 한 번에 슥 잘렸다.
도자기인 척하는 쿠키 화병 속에서 동글동글한 미니슈가 우르르 쏟아졌다. 아기 천사는 설탕 캔디였고, 받침대는 과일 타르트였다.
제스터는 내가 모든 디저트를 맛볼 수 있도록 예쁘게 잘라 주었다. 조심스럽게 맛을 본 나는 깜짝 놀랐다.
“우와, 진짜 맛있어요!"
동생과의 짧은 만남으로 우울했던 기분이 싹 사라지는 맛이었다. 맛도 맛이지만 향과 식감이 정말 좋았다. 오감을 만족시키는 예술적인 디저트였다.
“제스터 씨가 왜 왕국 최고의 장인인지 알 것 같아요."
양손으로 따봉을 날려 주자 제스터가 쑥스러운 얼굴로 코끝을 쓱 홈쳤다.
“이 맛에 장인 하지요.”
나는 연신 감탄하며 디저트를 먹었다. 평소의 두 배는 먹어 치운 것 같았다.
“제스터를 공작가로 데려갈까?"
단것은 취향이 아닌지 차만 마시던 세스가 물었다. 나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제스터 씨는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해 디저트를 만들어야죠. 이런 솜씨를 독점한다는 건 죄악이에요.”
“전 상관없습니다. 귀족은 싫지만 부인을 위해서 일 하는 건 나쁘지 않을 것 같네요.”
제스터가 싱글벙글 웃으며 자신을 데려가라고 했다. 놀란 내가 눈을 깜박이니 세스가 찻잔을 탁 내려놓았다.
“제스터.”
“왜? 떠 보려고 데려온 거 아니었어? 나는 괜찮다고 말하고 있잖아. 마음에 든다고.”
제스터가 여우같은 눈을 가늘게 뜨려 웃었다. 그에게서 갑자기 에어컨 같은 냉기가 느껴졌다. 나는 포크를 입에 물고 감탄했다.
역시 세스 친구 맞네!
"선 넘지 마.”
“아직 안 급한 모양이지?”
어깨를 으쓱한 제스터가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놀라지 마세요. 남자들은 원래 이렇게 티격태격하거든요 걱정 말고 다음에도 또 찾아와 주세요. 부인은 언제든 환영이니까요.”
"네 , 고마워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자 제스터가 갑자기 풉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다시 한 번 찡긋 윙크하고는 아래층으로 사라져 버렸다.
나는 그가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세스에게 속삭였다.
“제스터 씨는 바람둥이인가요?"
”······응?"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던 세스가 어리동절한 표정을 지었다.
"친구 아내한테 마음에 든다고 하고 윙크도 하고 그러잖아요. 진심도 아니고 막 던지는 것 같던데. 원래 저래요?"
뒤에서 흉보는 건 나쁘지만 참을 수가 없었다. 내 불만스러운 투덜거림에 세스가 갑자기 어깨를 들썩이며 웃기 시작했다.
난심각한데, 웃어?
“당신이 나한테 바람둥이라고 말한 게 생각나는군.”
“어, 그러고 보니 세스랑 좀 닮았어요.”
성격이 닮았다고 덧붙이자 세스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동족 혐오인 모양이다.
“당신에게 다시는 그런 말을 지껄이지 못하게 하지.”
“싸우진 말고요. 저 때문에 친구랑 싸우는 건 싫어요.”
”······친구 아니야."
세스가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물론 전혀 신빙성은 없었다.
***
제스터의 가게를 나선 우리는 소회를 위해 잠깐 걷기로 했다. 사실 나들이가 이대로 끝나는 게 싫었던 내가 산책을 하자고 졸랐다.
처음엔 거리 구경을 했지만 우리를 본 사람들이 슬슬 몸을 피했다. 귀족이라는 사실을 눈치챈 건지 꼭 맹수를 본 초식동물 같은 눈빛이었다.
괜히 미안해진 나는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걷기 시 작했다. 세스가 걱정스럽게 내 안색을 살폈다.
“조금이라도 피곤해지면 바로 돌아가야 해."
“네네, 알겠어요. 그런데 선배님이 안 보이네요?"
오늘의 나들이를 위해 마부가 되어 준 선배님이 보이질 않았다. 마차를 주차한다며 사라지더니 아예 돌아오질 않은 것 같았다.
“모리스는 제스터를 무서워하니까. 부르지 않으면 오지 않을걸.”
"네? 선배님이 제스터 씨를요?"
사람 잘 패는 선배님이 디저트 장인인 제스터를 무서워하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천적이라는 거지.”
으음, 코브라와 몽구스 같은 사이 인가.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세스가 작게 웃었다.
환한 햇빛 아래 내 이상형인 남자가 웃고 있었다. 이상하게 눈이 시렸다. 가슴이 조금 아픈 것도 같았다. 나는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내가 가질 수 없는 것에 욕심을 품은 것은 아니었다. 그냥 볼 수 있을 때 조금 더 오래 봐두고 싶었다. 가능 하다면 영원히 기억하고 싶은 순간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