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에이, 질투하지 마세요. 전 안목 있는 천재보다 잘 생긴 제 약혼자가 더 좋아요.”
"더 좋은데 그렇게 방치했단 말이지?"
“혁! 그게 아니라…….”
세스가 내 발바닥 한가운데를 꾸욱 눌렀다. 아프기도 하고 간지럽기도 한 이상한 느낌에, 나는 물고기처럼 파닥거리며 의자를 탁탁 쳤다.
"으아아, 항복! 잘못했습니다!"
“무슨 소리지? 난 안마를 하고 있을 뿐인데?"
세스는 한참이나 나를 괴롭힌 후에야 놓아주었다. 훌쩍이며 그를 흘겨봤지만 진짜 원망스러운 건 아니었다.
오히려 백화점에 정신이 팔려 세스를 방치한 것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저 따라다닌다고 많이 지루하셨죠?"
“아니, 당신을 보고 있어서 지루할 틈이 없었지.”
뭐지, 분명 칭찬인데 칭찬이 아닌 것 같은 이 이상한 느낌은.
“제가 재미있어요?"
"보고 있으면 즐거워. 웃는 모습만 봐도 화가 풀릴 정도로.”
"······."
별말 아닌 것 같은데 이상하게 부끄러웠다. 다른 화제를 꺼내려고 해도 목이 꽉 막힌 것처럼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그때, 꼬르륵 소리가 긴장된 분위기를 깨트렸다. 범 은 바로 내 배였다 민망해진 나는 배를 통통 두드렸다.
"그러고 보니 점심도 못 먹었네요.”
“기왕 나왔으니 외식할까?"
“오, 제가 외식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아시고?"
춤을 추듯 어깨를 들썩이자 세스가 못 말리겠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이내 세스의 지시에 따라 마차의 방향이 바뀌었다.
어, 그러고 보니 백화점에 푸드 코너가 없었네. 카페도 없고, 식품관도 없고. 마커스 씨에게 만들자고 하면 좋아하려나?
* * *
프리지어 궁은 무척 흉흉한 분위기였다.
가문의 안주인인 이블린이 왕궁에서 공격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공작은 소식을 듣자마자 명령 했다.
“모리스, 먼저 왕궁으로 가겠다. 뒤를 정리한 후에 따라오도록."
"예 주군.”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공작은 비상용 스크롤을 찢었다.
마법사용이 제한되어 있는 왕궁으로. 곧장 이동할 수 있는 특수한 물건이었다. 전쟁과 같은 비상 상황에서만 쓸 수 있는 것이었지만, 스크롤을 찢는 공작의 손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공작이 사라진 후, 모리스는 비상소집령을 내렸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분노했다.
"러셀 백작은 뭐 하자는 거야? 지금 전쟁이라도 벌이겠다는 거야?"
"같은 편인 줄 알았더니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쳐?“
이번 사태의 원흉인 러셀 백작가를 응징해야 한다는 여론이 끓어올랐다. 이런 일을 참는다는 건 엘마이어 가문은 축었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가신들은 정복을 입고 입궁했고 기사들은 완전 무장한 상태로 모여들었다.
“내 말을 가져와라! 내가 직접 러셀 놈의 면상에 대고 이게 어디서 배운 짓거리인지 따져야겠다!"
사람들을 말려야 할 총관은 가장 앞에서 난리를 치는 중이었다.
그때, 정문에서 짧고 빠른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비상사태임을 알리는 소리에 모두의 행동이 정지했다.
“무슨 일인지 알아봐라.”
총관의 지시를 받은 자가 움직이기도 전에 경비병이 달려왔다.
"보고 드립니다. 러셀 백작과 백작가 기사단 전원이 정문에서 대기 중입니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와!"
“아가씨께 직접 사죄하기 위해 방문했다고 합니다.”
버럭 소리를 지르던 총관이 멈칫했다. 옹성거리던 사람들도 조용해졌다.
잠시 머뭇거리던 경비병이 물었다.
"돌려보낼까요?"
“아니 , 서문을 연다.”
서문은 신분이 낮은 방문객을 위한 곳이었다. 공작 가와 친분이 없는 자들만 서문을 통해 출입했다.
"방문 목적이 사실이라면 무기를 맡기고 들어오고, 싫으면 그대로 돌아가라고 전해라.”
러셀 백작은 총관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심지어 백작가 기사단 전원이 말에서 내려서 걸어오기까지 했다.
굴욕적인 상황이었지만 가장 앞에 선 러셀 백작은 전장에 선 기사처럼 당당했다. 그것이 못마땅했던 총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군. 가이사."
“안녕하십니까. 어르신 가문의 대표로 온 것이라 정식으로 인사드리지 못하는 점 양해해 주십시오.”
가문 사이의 일이니 왕실에서의 지위를 내세워 끼어들지 말라는 뜻이었다. 총관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허허, 너구리 같은 건 여전하군.”
“어르신도 여전하시군요.”
날카로운 시선을 주고받은 두 사람은 다시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갔다. 러셀 백작이 뒤를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백작가 기시들이 두 사람을 끌고 왔다. 악을 쓰며 발버둥 치는 러셀 백작 부인과 멀뚱멀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테오 러셀이었다.
순간 사람들이 크게 웅성거렸다. 이번 사태의 원흉인 두 사람을 보는 시선은 흉흉하다 못해 살벌했다.
러셀 백작이 웅성거림을 뚫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번 일은 러셀 가문의 뜻이 아니오. 러셀 가문은 왕가에 충성하며 결코 분란을 일으킬 생각이 없소이다. 감히 공작 전하의 약혼녀를 해치려 한 자들은 가문에서의 지위를 박탈하고 엄중하게 처벌할 것이오.”
총관의 눈가가 꿈틀했다. 하지만 그의 입이 열리기도 전에 백작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무엇보다 피해를 입은 분에게 사죄하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하여 찾아왔소. 아가씨께 내 뜻을 전 해 줄 수 있겠소?”
사람들 속에서 시녀장이 나타났다. 엄숙한 얼굴로 백작을 마주한 그녀가 말했다.
“아가씨께선 지금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방문하셨다고 전해 드릴 테니 그만 돌아가시지요.”
그러자 기시들에게 붙잡혀 있던 백작 부인이 발작하듯 소리쳤다.
“당장 돌아가요! 나를 이 꼴로 사람들 앞에 세우다니! 당신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백작은 차갑게 그녀를 외면했다.
"실례가 아니라면 아가씨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겠소. "
"언제 돌아오실지 모릅니다.“
“상관없소.”
시녀장은 마음대로 하라는 듯 고개를 살짝 숙인 후 물러났다. 그녀의 지시에 따라 대치중이던 사람들이 모두 흩어졌다.
금사자 기사단만 감시를 위해 제자리를 지켰다.
백작은 꼿꼿이 서서 눈을 감았다. 돌기둥처럼 서 있는 남편의 모습에 백작 부인이 악을 썼다.
"당장 돌아가자니까요! 이런 상황에서 자리를 비우다니! 그 여우같은 계집애의 술수라고요!"
"거기서 한마디만 더 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당신과 이혼할거요.”
무뚝뚝한 목소리에 움찔한 백작 부인이 입을 다물었다.
오르센 공국의 공녀로 태어나 대귀족인 러셀 백작과 결혼한 그녀는 단 한 번도 이런 굴욕을 겪은 적이 없었다.
수치심을 견디지 못한 백작 부인이 울음을 터트렸지만 아무도 그녀를 위로하지 않았다.
그렇게 긴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 * *
창문을 통해 달콤한 냄새가 흘러 들어왔다. 배가 고파서 축 늘어져 있던 나는 슬쩍 밖을 엿보았다.
“우와!”
밖은 전통 시장 같은 거리였다. 헌 옷을 파는 상점들 앞에 잡다한 물건을 파는 노점상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점점 느려지던 마차는 달콤한 냄새를 풍기는 가게 앞에서 멈췄다. 우중충한 주변과 달리 마치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반짝반짝한 인테리어가 굉장히 어색하게 느껴졌다.
“여긴 무슨 가게예요?"
"왕국 최고의 디저트 장인이 있는 곳이지.”
"네? 여기서 디저트를 판다고요?"
이 세계는 설탕이 무척 비쌌다. 자연히 설탕이 많이 들어가는 디저트도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값이 나갔다. 돈 많은 귀족들이나 부담 없이 맛볼 수 있는 정도였다. 그런데 서민들이 오가는 거리에 디저트 가게를 열었다고?
의아해하는 나를 본 세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주인이 좀 별종이라서 그래.”
그때, 밖에서 누군가가 탁탁 마차를 두들겼다. 이어서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다 마차 세우면 안 됩니다. 길 막지 말고 비켜요.”
누가 봐도 평범한 척하는 귀족의 마차인데, 두들기는 손에는 거침이 없었다.
한숨을 쉰 세스가 벌컥 문을 열었다.
"성격 급한 건 여전하군. 제스터.”
마차를 두드리던 남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가느다란 눈과 뾰족한 턱 때문에 꼭 여우같은 인상이었다. 다음 순간 인상을 팍 쓴 남자가 말했다.
"누군가 했더니, 하도 안 와서 네가 죽은 줄 알았다!"
“바빴어.”
나는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봤다. 뭐지? 둘이 친구 인가? 힐끗거리는 내 시선을 느낀 남자가 물었다.
“옆은 누구야?"
“내 아내.”
여우처럼 가늘던 남자의 눈이 동그래졌다. 나는 얼른 세스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디저트 장인인 제스터입니다. 남편분께는 오래전부터 신세를 지고 있죠.”
쓰고 있던 하얀 모자를 벗은 남자가 먼저 인사했다. 세스에게 투덜대던 것과 달리 아주 정중한 태도였다.
“만나서 반가워요. 저는 이블린이에요."
나도 최대한 예의를 차렸다. 세스의 친구라면 잘 보여서 나쁠 게 없었다.
내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제스터가 씩 웃었다.
“자, 어서 안으로 들어가시죠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디저트를 대접하겠습니다.”
"2층에 있을 테니 식사부터 가져와.”
세스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발끈한 제스터가 그를 노려봤다.
“내 가게는 식당이 아니라 디저트 전문점이라니까!"
“이블린이 점심을 못 먹었어.”
”……빨리해서 가져간다고.”
입을 삐죽인 제스터가 가게 문을 활짝 열었다. 딸랑거리는 종소리와 함께 달콤한 향기가 훅 밀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