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
갑자기 서러움이 치솟는 바람에 진짜 눈물이 날 뻔 했다. 두 눈에 힘을 주고 버티는 나를 알아챈 세스가 겉옷을 벗어서 내 머리 위로 폭 덮어씌웠다.
나는 세스의 옷 속에 숨어 눈가를 닦고 얼굴을 정리 했다. 꼼지락거리는 나를 지켜보던 세스가 물었다.
“이제 그만 나갈까?”
“나가도 돼요?"
이대로 나가면 무단 탈출인데? 걱정하는 나와 달리 세스는 단호했다.
“당신이 나가겠다는데 그걸 막을 사람은 없어.”
“그럼 나갈래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세스가 나를 공주님처럼 안아 들고 밖으로 향했다.
세스의 말처럼 아무도 우리를 막지 않았다. 멀리서 마주친 사람들도 화들짝 놀라 달아나기 바빴다.
‘내가 도망간다고 보고하러 가는 거 아냐?’
역시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다. 건물을 빠져나오는 순간 필사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공작 전하!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사색이 된 사람들이 멀리서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다.
탈출하다 딱 걸린 나는 당황해서 몸을 움츠렸다.
“답답해도 조금만 참아.”
흘러내린 옷을 다시 내 머리 위로 덮은 세스가 속삭였다. 시야가 가려졌을 뿐인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
급히 뛰어온 사람들은 왕의 심부름꾼이었다. 그들은 당장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로 세스에게 애원했다.
“전하, 러셀 백작 부인은 아가씨의 정체를 몰랐습니다. 결코 공작가를 모욕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을 겁니다."
"몰랐으니까 죄가 없다?"
"모두 오해로 인해 벌어진 일이라는 뜻입니다. 폐하께서도 이번 일이 이렇게 된 것에 유감을 표하셨습니다.”
“폐하께서 이번 일에 개입하실 거란 뜻인가? 잘 생각해서 똑바로 대답해라."
“그, 그것이 아니라······.”
양쪽에서 오가는 대회를· 들은 나는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대충 알 수 있었다.
“러셀 가문과 굳이 분쟁을 일으킬 필요가 있습니까. 엄밀히 말해 같은 편이 아닙니까.”
간단히 말해 세스와 곰탱이 아빠는 왕의 오른팔과 왼팔 같은 존재였다. 다만 같은 세력에 속해 있어도 딱히 친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런데 곰탱이가 나를 모욕했고, 나는 곰탱이를 쥐어 됐으며 , 그걸 목격한 곰탱이 엄마가 나를 때리려고 한 것이 문제 가되었다.
지금이야 사소한 다툼이지만, 가문 사이의 자존심 싸움으로 넘어가면 전쟁이 터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분쟁을 시작한 것은 저쪽이다.”
“전하, 폐하의 입장도 생각해 주십시오. 두 가문이 다투면 폐하께선 누구에게 의지할 수 있겠습니까."
세스와 곰탱이 아빠가 싸우면 손해를 보는 것은 왕이다. 누가 이겨도 왕의 세력은 줄어드니까.
그래서 피오나는 곰탱이 엄마를 강제로 쫓아내고 나를 반성실에 가두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아마 ‘양쪽 다 처벌하면 공평해 보이겠지?'라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피해자인 내 약혼녀를 감금하셨단 말인가?"
“그것은 정말로 약간의 오해가……."
하지만 왕궁으로 쳐들어온 세스가 반성실을 때려 부 수면서 문제가 더 커졌다. 절대 조용히 넘어가지 않겠다는 뜻이었으니까.
이에 당황한 왕이 심부름꾼을 보내 세스를 달래기 시작한 것이 지금 현재의 상황이었다.
“전하, 이번 일은 저희가 최선을 다해 중재하겠습니다.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아가씨께서 많이 피곤하신 것 같습니다. 별궁에서 잠시 쉬어 가시는 건 어떨지요.”
세스는 그들의 권유를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애가 탄 심부름꾼들의 목소리가 쩍쩍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때 어디선가 나타난 마차가우리 앞에 멈춰 섰다.
“주군 늦어서 죄송합니다.”
낯익은 선배님이 마부석에서 뛰어내리며 예를 표했다. 순간 인서를 해야 하나 감동했지만, 지금은 죽은 척하고 있는 편이 더 나올 것 같았다.
“저, 전하. 이대로 가시면 안 됩니다.”
"폐하께 어떻게 말씀드릴지라도 답해 주십시오.”
심부름꾼들이 애절하게 매달렸다. 그것을 뿌리치고 마차에 오른 세스가 말했다.
"중재는 필요 없다고 말씀드려라."
“전하, 정말 전쟁이라도 하실 작정이십니까?"
심부름꾼이 발악하듯 외쳤다. 그러자 세스가 웃었다. 뼛속까지 얼어붙을 것처럼 차가운 웃음소리였다.
"당연히 필요하다면 끝을 봐야겠지”
세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이 탁 닫히며 마차가 출발했다.
긴장감에 움츠리고 있던 나는 머리 위의 옷이 벗겨 진 뒤에야 숨을 크게 쉴 수 있었다.
"많이 답답했어?"
세스가 헝클어진 내 머리를 정리해 주었다. 머리가 문제가 아니었던 나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이대로 가면폐하께서 화내지 않으실까요?"
“이번 일은 폐하의 뜻대로 해 드릴 생각 없어. 어설프게 마무리 지었다간 당신을 물어뜯으려는 자들이 늘어날 테니까."
결국 나 때문에 왕의 뜻을 무시하겠다는 말이었다. 나는 풀 축은 목소리로 사과했다.
“죄송해요."
”뭐가?”
“제가 공작님을 귀찮게 해서······.”
세스를 도우려고 왕의 시녀가 됐는데, 오히려 그를 번거롭게 하는 상황이었다. 내 자책에 잠시 침묵하던 세스가 말했다.
“이비, 나는 위험에 빠진 약혼녀를 귀찮다고 생각할 정도로 비열한 인간이 아니야.”
“그, 그게 아니라 저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서 죄송하다는 뜻이었어요."
“그럼 죄송해하지 마. 당신 때문에 일어난 일도 아니고, 내게 빌어야 할 사람은 따로 있으니까."
죄송해하지 말라는 말이 이렇게 무섭게 들릴 줄이야. 어깨를 움츠린 내게 이성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이번 일은 이미 내 손을 떠났어. 두 가문 사이의 문제가 되어 버렸는걸. 괜히 까불지 말고 끝날 때까지 조용히 구석에 처박혀 있자.'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지만 마지막 남은 양심이 심장을 콕콕 찔렀다. 견디다 못한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제가 아까 약속을 하나 했는데요.”
“무슨 약속?"
“제 손수건을 찢은 애한테 절 도와주면 이 번 일은 없었던 일로 해 주겠다고 말해 버렸거든요."
물끄러미 쳐다보는 세스의 시선이 꽤 따갑게 느껴졌다. 나는 없는 용기를 쥐어짜서 말을 이었다.
"개가 안 도와줬으면 제가 좀 험한 일을 당했을 것 같아요. 그걸 봐서 목숨만 살려 주시면 안 될까요?"
"······,“
안 되나 보다 세스의 침목에 나는 깨끗이 포기했다. 곰탱아, 나는 최선을 다했단다. 네 목숨은 네 스스로 챙겨야 할 것 같구나. 묵념하는 순간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숨만 붙어 있으면 돼?"
뜻밖의 말에 놀란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이왕이면 팔다리도 붙여 주셨으면······.”
"목은 필요 없고?"
목이 없으면 결국 죽는 거 아냐? 눈을 굴리는 나를 본 세스가 작게 웃었다.
"농담이야 처음부터 죽일 생각은 없었거든."
"네? 진짜요?"
“당신의 평판에 좋을 게 없으니까.”
하긴 나랑 조금 싸웠다고 다 축여 버리면 내가 욕을 바가지로 먹겠지. 다행이라고 안도하는 내 귓가에 씁쓸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그리고 당신까지 나를 무서워하는 건 싫으니까."
나는 반사적으로 세스를 바라봤다. 얼음처럼 파란 눈동자가 나를 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뭔가에 사로잡힌 것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주군, 도착했습니다."
갑자기 끼어든 목소리에 팽팽하게 당겨진 공기가 풀어졌다. 마치 꿈에서 깨어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방해꾼은 다 치워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세스의 중얼거림에 괜히 뺨이 화끈거렸다. 나는 아무것도 못 들은 척하며 화제를 돌렸다.
“어, 그런데 벌써 집에 온 거예요?”
아무리 넋을 빼고 있어도 한 시간이 지나진 않았을 텐데 이상한일 이었다.
“아니, 집이 아니라 근처의 안가로 왔어.”
“안가라면…… 제일 처음 갔던 그 저택이요?"
"비슷한 용도의 다른 저택이지.”
숨겨 둔 저택이 대체 몇 채나 되는 거지. 궁금했지만 내 정신 건강을 위해 묻지 않기로 했다.
그때 뭔가를 머뭇거리던 세스가 입을 열었다.
“당신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있는데. 하나는 안가에서 잠시 쉰 다음 집으로 돌아가는 거고.”
“다른 하나는요?"
“기분 전환 삼아 나와 함께 외출하면 어떨까 해서."
어색하게 덧붙인 세스가 슬쩍 내 시선을 피했다. 왠지 허둥거리는 느낌에 풉 하고 웃음이 나왔다.
“뭘 그렇게 어렵게 물어보세요? 그냥 같이 놀러 갈래? 하고 물으면 되잖아요.”
내 말에 눈을 깜빡인 세스가 살짝 웃었다. 나직한 목소리가 마치 유혹하듯 속삭였다. “
같이 놀러 갈래?"
순간 세스의 머리 뒤에 후광이 비치고 반짝이는 별빛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넋을 놓았던 나는 헛하고 정선을 차렸다.
아니, 공작님, 왜 저한테 미남계 쓰세요?
“싫어?"
투덜거리는 것도 잠시, 수줍게 묻는 미남에게 나는 맥없이 항복하고 말았다.
* * *
이번 생에서 나는 외출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노예가 되어 항구로 끌려간 일이나 궁으로 출퇴근한 것을 빼면 태어나서 처음으로 밖에 나가 보는 거였다.
참으려 해도 마음이 구름처럼 둥실거렸다.
너무 들뜬 것 같지만 이번이 첫 나들이인걸. 좋아서 방방 뛰고 싶은 것을 억지로 꾹 눌러 참는 중이었다.
그런 내 기대감을 부추기듯 세스가 한 아름의 외출복을 보내왔다. 하나같이 돈 쓴 티가 철철 나는 것이 아무거나 입어도 근사할 것 같았다.
하지만 첫 나들이 패션을 얼렁뚱땅 결정할 수는 없지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옷을 고르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뭘 입고 가야 예쁘려나-"
한참을 고민한 나는 물방울무늬가 귀여운 원피스를 선택했다. 그 위에 가벼운 승마 코트까지 걸치자 나들이 가기 딱 좋은 차림새가 되었다.
“아가씨, 정말 예쁘세요.”
“이대로 외출하시면 모두 아가씨만 쳐다볼 거예요.”
치장을 도와준 저택의 하녀들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아부 섞인 말이라는 건 알지만 거울에 비친 모습은 내가 보기에도 썩 나쁘지 않았다.
‘세스도 예쁘다고 해 주려나?'
들뜬 마음으로 계단을 내려가던 나는 멈칫했다. 계단아래에 처음 보는 검은 머리의 미남이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