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도련님, 마님의 명령입니다. 당장 비켜 주…… 젝!"
이성적 인 대화를 시도하던 기사가 곰탱이의 주먹 한 방에 나가떨 어 졌다. 그야말로 곰다운 일격에 기사들이 주춤거렸다.
“우와, 곰탱아. 너 진짜 세다!"
"응! 나 세!"
내 칭찬에 곰탱이가 콧김까지 뿜으며 말했다.
시녀의 부축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나던 부인이 악을 썼다.
"테오! 너 지금 뭐 하는 거니!"
"엄마! 얘는 때리면 안 돼 얘는, 얘는…… 착해?"
곰탱이가 자신의 엄마를 설득했다. 그런데 착하다고 말하며 머뭇거리는 바람에 부인의 분노를 더 부추긴 것 같았다.
“이 불여우 같은 계집애! 감히 내 아들을 흘려?"
아, 뭐라는 건지 불여우한테도 눈은 있습니다만?
심드렁한 표정으로 귀룰 후벼 파 주자 부인이 뻑 소리를 질렀다.
“사정 봐줄 것 없다! 테오를 제압하고 저것을 내 앞에 무릎 꿇려라!"
“곰탱아! 가랏!"
나도 지지 않고 소리쳤다.
이윽고 곰탱이와 기사들이 굉장한 소리를 내며 부딪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곰탱이가 아무리 잘 싸워도 모두를 막아 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괜히 힘 빼지 말고 이리 와라!"
곰탱이가 미처 막지 못한 기시들이 나를 잡으러 다가왔다. 그 순간, 황급히 뒷걸음질 치는 나를 끌어당겨 등 뒤에 세운 피어슨 경이 진짜 기사답게 외쳤다.
“이봐! 나도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죄송합니다. 제가 잊었네요.
"애송아, 좋은 말로 할 때 비켜라! 다 널 위해서 하는 소리다!"
“그래! 러셀 가문에 밉보여서 어쩔 생각이냐?"
저쪽 기사들의 반응도 그리 좋진 않았다.
그러나 협박이나 다름없는 말에도 피어슨 경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기사들과 대치하며 내게만 들리게 속삭였다.
“아가씨, 러셀 가문과 정면으로 부딪치신 것을 보니 뒷일을 따로 생각해 두신 거겠죠?”
뭐? 러셀 가문이 뭐 하는 곳인데?
“제가 시간을 끌겠습니다. 아가씨의 계획대로 하십시오.”
계획 따윈 없었지만 여기서 솔직하게 말해선 안 될 것 같았다 어쨌든 수습하면 되는 거잖아?
"좋아요. 아주 잠시만 벌어 주세요. 그럼 제가 이번 일을 해결할게요.”
"좋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우리는 각자의 목표를 향해 달려들었다 피어슨 경은 기사들을 향해서, 나는 바닥에 놓인 도자기를 향해서.
”엇차!"
나는 무거운 도자기를 그대로 창문으로 집어 던졌다. 도자기를 머리 위로 들고 있었을 때 꼭 하고 싶었던 일중하나였다.
와장창!
커다란 유리창이 기대보다 더 큰 소리를 내며 부서 졌다. 나는 뻥 뚫린 창문 밖을 향해 있는 힘껏 소리쳤다.
“아아아악! 불이야!”
옹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달려오는 진동이 느껴졌다.
나는 놀란 토끼 눈을 한 이들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척 세워 보였다.
자고로 일이 수습이 안 될 때는 더 크게 망치라고 했다.
* * *
우리를 습격한 기사들은 모조리 붙잡혔다. 주모자인 곰탱이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얌전히 끌려가는 기사들과 달리 곰탱이 엄마는 길길이 날뛰며 소리를 질렀다.
“감히 날 붙잡아? 내가 누구인 줄 알고!"
쿵쿵 이것이 바로 진상의 향기로구나.
소식을 듣고 달려온 피오나가 곰탱이 엄마를 엄하게 질책했다.
"러셀 백작 부인 왕궁에서 국왕 폐하의 시녀를 습격 하다니요. 이건 폐하를 모욕하는 죄라는 것을 알아 두십시오.”
"죄라니요? 내가 뭘 잘못해서? 나는 저 버르장머리 없는 것을 가르치려고 했을 뿐이에요!"
곰탱이 엄마가 나를 삿대질하며 외쳤다. 피오나가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죄의 유무는 폐하께서 판단하실 겁니다. 부인을 모셔라!"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우르르 몰려든 시녀들이 곰탱이 엄마를 붙잡았다 그러자 곰탱이 엄마가 시녀들을 야수처럼 사납게 밀쳐내며 소리쳤다.
“더러운 손으로 누굴 건드려? 내 발로 가겠다!"
“뜻대로 하시지요.”
피오나가 더 이상 생폐하기도 싫다는 듯 말했다.
피오나를 노려보던 곰탱이 엄마가 이어서 죽일 듯이 나를 째려보았다. 마지막으로 내 옆에 붙어 있는 아들을 보고 이를 간 그녀는 핵 소리가 날 정도로 거세게 몸을 돌렸다.
걱정이 된 나는 슬쩍 곰탱이의 옆구리를 찔렀다.
"야, 너 진짜 어쩌려고 그래? 도와준 건 고마운데, 집에서 쫓겨나는 거 아냐?"
"응?"
곰탱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녀석, 자신이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는 건가.
“그건 내가 할 말입니다, 이블린. 대체 어쩌려고 이런 건가요?"
피오나가 한숨을 푹푹 쉬었다. 찔끔한 나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변명했다.
"시녀장님, 이건 정말 어쩔 수 없는 사고였어요. 제가 그때 저항하지 않았으면 진짜 호되게 두들겨 맞았을 거예요.”
“맞습니다, 시녀장남 이블린 양은 저희를 구하기 위해서 그런 겁니다.”
"응, 맞아. 그랬어!"
피어슨 경과 곰탱이가 열심히 내 편을 들었다.
아앗, 곰탱아. 정말 고마운데 너는 끌려간 너희 엄마를 더 걱정해야 하지 않을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해도 왕궁에서 일부러 소란을 피운 건 사실입니다. 거짓으로 화재를 알린 것 도 잘못이고요. 이대로 넘어가면 나중에 더 큰 문제가 될 수 있어요.”
“저, 그럼 전 어떻게 되는 거죠?"
겁먹은 나를 보고 깊은 한숨을 쉰 피오나가 말했다.
“일단은 자리를 옮기죠.”
* * *
결국 나는 반성실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나마 감옥은 아니라는 게 다행이었다.
시녀들이 벌을 받을 때 쓰이는 곳인 반성실은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방이었다. 바닥 카펫이나 벽지조차 없어서 회칠된 벽이 볼썽사납게 드러나 있었다.
“이곳에서 기다리면 서기관이 당신의 증언을 받기 위해 올 겁니다. 오늘 있었던 일은 모두 거짓 없이 솔직하게 말하세요.”
짧게 당부한 피오나가 밖으로 나갔다. 쿵하고 무거운 소리를 내며 문이 닫히자 나 혼자만 덩그러니 남았다.
시녀로 취직한 지 이틀 만에 반성실에 갇히다니. 그 어렵다는 일올 제가 해냅니다!
나는 우울한 마음으로 한쪽 구석에 주저앉았다. 치마가 더러워지겠지만 얼마나 여기 있을지도 모르는데 계속서서 기다리는 것은 미련한 짓이었다.
‘세스한테 연락이 가면 어떡하지?'
첫날은 반성문을 쓰고, 둘째 날은 반성실에 갇히다니. 세스가 들으면 나를 다시없는 문제아로 생각할 것이다.
“난 피해자인데…… ."
일이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아 나는 먼 곳을 보며 투덜거렸다.
“이놈의 서기관은 증언받을 종이를 만들어서 오나.”
쿵쿵!
그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깜짝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다시 쿵쿵 울리는 문을 바라봤다.
아니, 누가 이렇게 문을 두드리는 거야? 밖에서 잠겨서 내가 열어 줄 수도 없다고.
투덜거리는 순간, 콰아앙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장난감처럼 떨어져 나갔다. 방음 때문인지 두껍기 짝이 없는 문이 쓰러지자 바닥이 쿠웅 진동했다.
나는 쓰러진 문을 밟고 저벅저벅 걸어 들어오는 사람을 멍하게 쳐다봤다.
“고, 공작님?"
순간 환상을 본 줄 알았다. 우리 집에서 궁까지는 마치를 타고서도 한 시간 거리니까, 일이 터지자마자 달려온다고 해도 한참은 더 걸려야 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내 앞에 나타난 세스가 마치 마법처럼 느껴졌다.
‘어떻게 알고 온 거지? 혹시 다른 일 때문에 궁에 와 있었나?'
“이비.”
혼란스럽던 머릿속이 따뜻한 목소리에 깨끗하게 비워졌다. 눈이 마주치자 세스가 팔을 벌렸다.
어? 지금은 아무도 안 보고 있는데? 이럴 때도 사랑 받는 약혼녀 연기를 해야 하나?
에라, 모르겠다. 망설이던 나는 그냥 보르르 달려가 세스의 품에 폭 안겼다. 나를 꼭 끌어안은 세스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늦어서 미안해."
뭐야. 왜 눈물이 날 것 같지.
강제로 미용을 당한 개들이 왜 주인 품에 안겨서 우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세스의 품에 뺨을 비비며 그 동안의 설움을 녹여 냈다.
가만히 어리광을 받아 주던 세스가 물었다.
“다친 곳은?"
“쾌, 괜찮아요.”
뒤늦게 정신을 차린 나는 슬그머니 몸을 뒤로 뺐다. 아무리 반가워도 그렇지, 너무 오버한 것 같았다.
순순히 나를 놓아준 세스가 내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치마가 좀 구겨진 것 빼고는 나는 아주 멀쩡했다. 하지만 반성실 안을 둘러본 세스는 여전히 어두운 표정이었다.
“이런 곳에 당신을 가둬 두다니.”
내가 지하실에 갇혀 있었던 과거를 고백한 뒤라 더 신경 쓰이는 모양이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여긴 춥지도 어둡지도 않은걸요. 그리고 제가 잘못해서 갇힌 거니까 어쩔 수 없죠.”
“당신 잘못이 아닌 것 알아.”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세스를 올려다봤다. 세스가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처음부터 목격한 사람에게 모두 들었어. 당신이 시작한 일도 아니고, 잘못한 건 더더욱 아니라고.”
정말 듣고 싶었던 말이었는데, 정작 세스가 그렇게 말해 주자 나도 모르게 머뭇거리게 되었다.
“사실 제가 상대를 막 때렸어요. 그리고 왕궁의 창문도 깨부수고, 불이 났다고 거짓말도 하고…….”
나는 고해성사를 하듯이 말했다. 그러자 세스가 조금 웃었다.
“이비, 나라면 때리는 걸로 끝나지 않았을 거야. 상대는 내가 나서기 전에 당신이 때려 준 것에 무릎 꿇고 감사해야해.”
너무 진담인 것 같아서 조금 무섭네요.
“당신이 창문을 깨고 불이 났다고 외친 것은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겠지?"
“······네.”
"평범한 여인도 그런 상황에선 벌을 받지 않아. 하물며 엘마이어 가문의 안주인을 이런 식으로 가두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멍해진 내게 세스가 다시 한 번 못 박았다.
“당신은 아무런 잘못도 안 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