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평소 건실한 기사였던 핀이 이블린과 얽히면서 이상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근무 중에 시녀들 사이에 껴서 저속한 이야기를 듣질 않나, 이블린의 부탁이랍시고 동료가 맞는데 옆에 서 노래를 부르질 않나.
"피어슨 경 이번 일로 정말 경에게 실망이 큽니다. 왕실 기사를 처벌하는 것은 재 권한 밖이지만, 이번만 큼은 선을 넘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죄, 죄송합니다."
핀은 변명할 여지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
피오나는 여전히 몸을 웅크리고 있는 테오를 사나운 눈으로 노려봤다.
"마지막으로 러셀 경 . 대체 왜 이블린의 손수건을 찢었습니까?"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사실 기대조차 하지 않았던 피오나는 포기하고 말을 이었다.
“세 사람 모두에게 벌을 주겠습니다. 불만이 있으면 지금 말하세요.”
"시녀장님 ! 억울합니다. 저는 피해자예요!"
문제의 원흉은 아니지만 사태를 더 크게 만든 이블린이 항의했다.
“이블린 두 사람은 몰라도 당신만큼은 제게 벌을 받아야 합니다. 폐하의 시녀가 왕실 기사를 때리다니, 대체 무슨 생각입니까?"
”······히잉.”
이블린이 울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하는 짓이야 어쨌든 얼굴만큼은 귀여운 천사 같았다.
“나머지 두 사람은요? 제가 처벌을 하는 데 불만이 있습니까?"
“아뇨, 없습니다."
“······.”
핀과 테오가 묵묵히 동의했다.
사실 피오나는 이곳으로 올 때 왕실 기시를 처벌할 권한을 받아 온 상태였다.
원래 왕실 기사의 처분은 단장인 데일 경의 몫이었다. 하지만 왕실 기사가 동료를 때리다가 시녀에게 두들겨 맞았다는 소식을 들은 데일 경이 학을 떼고는 피오나에게 처벌을 맡겼다.
결국 이번 일의 수습은 피오나가 모두 떠안게 되었다.
벌이 무거워도 문제고, 가벼워도 문제인 아주 골치 아픈 상황이었다. 다시 미간을 꾹꾹 누른 피오나가 말했다.
"좋아요. 그럼 셋 다 동의한 것으로 알고 벌을 주겠습니다."
* * *
”으으, 무거워!"
나는 부들부들 떨며 물병을 지탱했다. 안 그래도 무거운 도자기에 물까지 가득 담기니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이블린, 똑바로 드세요.”
“흑, 네에."
피오나의 엄격한 목소리에 나는 울먹이며 물병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팔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양옆에 선 기사들을 훔쳐보았다. 둘 다 힘이 좋아서인지 나처럼 팔을 떨지도 않고 침착하게 서 있었다. 특히 내 손수건을 찢은 곰탱이는 당장 졸기라도 할 것처럼 멍한 얼굴이었다. 으으, 얄밉다!
"2시간 후에 폐하께서 오전 회의를 끝내고 집무실에서 나오실 겁니다. 그때까지 들고 있으세요.”
“예?”
2시간이나 이걸 들고 있으라고? 농담인가?
하지만 피오나는 피도 눈물도 없는 얼굴로 ‘내리면 혼납니다.' 하고 나를 협박했다. 나는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어, 어떡하지. 2시간은커녕 2분도 못 견딜 것 같은 데.
“시녀장님!"
그때, 복도 끝에서 누군가 쪼르르 달려왔다. 아니, 이 귀여운 목소리는 다이애나?
“다이애나, 무슨 일이죠?"
`‘오후의 카탈로그를 제가 맡게 되었는데 내용이 조금 이상해서요. 한번 확인해 주실 수 있을까요?"
다이애나가 들고 있던 카탈로그를 피오나에게 내밀었다. 피오나가 미심쩍다는 듯이 물었다.
"카탈로그 담당은 카밀라일 텐데, 왜 당신이 왔지요?"
“그게, 이든 영애가 복통 때문에 급히 조퇴하게 되어서 제가 대신 맡게 되었어요.”
다이애나가 우물쭈물하며 답했다.
갑자기 복통이라니. 내기에 져서 배가 아팠나 보다. 쌤통이지만 그 와중에 다이애나를 부려 먹는 인성은 아주 괘씸했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한숨을 푹 쉰 피오나가 카탈로그를 확인했다.
“이건 저번 주의 카탈로그군요. 오늘 것은 어디 있지요?"
“죄, 죄송합니다. 잘 모르겠어요.”
“당신 잘못이 아닙니다. 같이 가서 찾아보죠.”
카탈로그가 바뀐 것에 마음이 급해진 피오나가 앞서 걷기 시작했다. 그녀를 따라가던 다이애나가 갑자기 나를 돌아보더니 찡긋 윙크했다.
어? 혹시 나를 위해서 피오나를 다른 곳으로 유인한 거야? 이런 센스쟁이 같으니!
나는 얼른 물병을 바닥에 내려놓고 팔을 주물렀다. 혹사당한 팔이 저릿저릿하게 아팠다.
“아이고, 죽겠다."
“내리면 안 돼.”
낑낑거리는 나를 보고 곰탱이가 말했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그를 노려봤다.
"야,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벌을 서고 있는지 몰라?"
"······."
“왜 대답이 없어? 어?"
나는 시비를 걸 듯 그의 옆구리를 퍽퍽 쳤다. 당황한 피어슨 경이 나를 말렸다.
“아가씨 , 그러다가 손 다치십니다,”
“애가 자꾸 열 받게 하잖아요. 너 나중에 시녀장님께 이르기만 해 봐."
팍씨 하고 주먹을 들자 곰탱이가 깨갱 하고 옆으로 물러섰다. 그 하찮은 꼴을 보자 더 열불이 났다.
"와, 생각해 보니 어이없네? 전 피해자고 재는 가해자인데, 왜 똑같이 벌을 받아야 하는 거죠?"
"글쎄요? 가문 때문에?"
피어슨 경이 먼 산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가 최대의 피해자라는 것을 깨달은 나는 얼른 꼬리를 내렸다.
"죄송해요. 사실 피어슨 경은 잘못도 없는데 저 때문에 이렇게 되었네요.”
“아닙니다. 저도 공범인걸요."
”으아아, 정말 죄송합니다!"
내가 더 미안해하자 씩 웃은 피어슨 경이 물병을 바닥에 내려놨다.
“그럼 저도 아가씨의 친구가 만들어 준 기회를 이용하겠습니다. 사실 좀 무거웠거든요.”
“앗, 저만 무거운 줄 알았는데.”
우리가 화기애애하게 이야기하자 갑자기 쿵 소리가 났다. 물병을 바닥에 내려놓은 곰탱이가 씩씩거리며 우리를 째려보고 있었다.
뭐야, 왜 저래?
“재 원래 저렇게 이상해요?"
"예, 원래 이상한 녀석입니다."
"왕궁 기사는 고르고 골라서 뽑는다고 들었는데, 저런 애도 있네요.”
피해자 연합인 우리는 대놓고 수군수군 곰탱이를 흉봤다. 그러자 곰탱이가 갑자기 난폭하게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주먹이라도 휘두를 것 같은 기세에 나는 눈을 부라렸다.
“뭐야?"
"거짓말쟁이!"
“뭐?"
“고양이 안 귀여우면서 귀엽다고 거짓말했어."
곰탱이가 피어슨 경을 손가락질했다. 어눌한 말투가 꼭 어린애가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나는 귀여웠는데. 재는 거짓말쟁이면서 고양이 가져가려고 해서 그랬는데. 재가 나쁜 건데.”
입을 삐죽거리던 곰탱이가 갑자기 울려고 했다.
뭣? 대체 뭘 했다고 우는 거야? 넌 그 커다란 덩치가 부끄럽지도 않아?
"야, 왜 울어? 울지 마!"
내 말에 곰탱이가 대놓고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위기감을 느낀 나는 그의 등짝을 철썩철썩 후려갈겼다.
“울지 말랬지! 뭘 잘했다고 울어!"
“아악! 악!"
그러자 곰탱이가 반항하듯 악을 썼다. 아니, 이거 진짜애잖아?!
당황스러운 것은 둘째 치고, 계속 소리 지르게 내버려 두면 큰일이 날 것 같았다.
"피어슨 경! 얘 입 좀 막아요!"
“예? 아, 알겠습니다."
나처럼 굳어 있던 피어슨 경이 서둘러 곰탱이의 입을 틀어막았다. 소리를 지르던 곰탱이가 고개를 이리 저리 돌리며 피했다. 그때, 어디선가 또각또각 소리가 났다.
“아니, 궁에서 누가 이런 천박한 소리를 내는 거야?"
4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귀부인이 시종의 안내를 받으며 복도 모퉁이를 들고 있었다. 곰디탱이를 구속 중 이던 우리는 놀란 토끼 눈이 되어서 그녀를 바라봤다.
우리와 눈이 마주친 부인이 들고 있던 부재를 툭 떨어뜨리더니 비명을 질렀다.
“세상에, 테오! 내 아가!"
“흑, 엄마!"
피어슨 경의 손을 떨쳐 낸 곰탱이가 울먹였다. 곰탱이의 등을 때리던 나는 멍하게 눈을 깜빡였다. 어, 이거 어떻게 수습하지?
“이, 이 못된 것! 감히 내 아들을 때려?"
수습 방법을 생각하기도 전에 부인이 나를 향해 달려왔다. 아니, 왜 다들 나한테만 그래! 나는 투덜거리며 반대쪽으로 달아났다.
“감히 도망을 가? 당장 거기 서지 못해?!"
부인이 악착같이 따라오자 우리는 곰탱이를 가운데 두고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부인은 보기와 다르게 무척이나 발이 빨랐다. 반면 구두를 신고 뛰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점점 도망가는 게 힘들어지고 있었다. 이대로 안 되겠다 싶었던 나는 그냥 신을 벗어 던지고 뛰었다.
“아악!”
그런데 내가 벗어 던진 구두를 밟은 부인이 그만 벌러덩 넘어졌다. 쿵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진 부인이 대자로 뻗었다. 당황해서 다시 돌아간 나는 위로 올라간 그녀의 치마를 끌어내려 주며 물었다.
“괜찮으세요?”
뒤통수에 충격이 갔는지 멍하게 누워 있던 부인이 갑자기 악을 썼다.
“다들 뭐 하는 거야! 당장 이 천한 것을 잡아!"
멍하게 우리를 지켜보던 부인의 시녀며 기서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아니, 내가 걱정까지 해 줬는데 너무하네!
“안 돼!"
그런데 내게 달려드는 부인의 기사들을 뜬금없이 곰탱이가 가로막았다. 당황한 기사들이 우뚝 멈춰 섰다.
“도, 도련님?"
“안 돼 , 하지 마!”
곰탱이는 두 팔까지 활짝 벌려가며 나를 보호했다. 옳다구나 싶었던 나는 얼른 곰탱이의 뒤에 숨었다.
"야, 재들이랑 너희 엄마만 잘 막아 주면 내 손수건 찢은 거 용서해 줄게.”
"응!“
내 속닥거림에 곰탱이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가랏! 곰탱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