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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아내로 취업합니다-35화 (35/240)

왕궁 기사인 핀 피어슨은 현재 신나게 얻어터지는 중이었다. 필사적으로 손을 놀려 방어를 하면서도 그의 머릿속엔 ‘이게 아닌데? 왜 이렇게 됐지?’라는 생각만 맴돌았다.

이번 일의 시작은 손수건이었다. 아직 페어 레이디가 없는 핀과 동료들은 제일 먼저 의상부가 수놓은 손수건을 고를 기회를 얻었다.

"야, 이것 봐! 이거 뭐냐!"

새하얀 손수건 사이에 끼어 있는 회색 손수건을 집어 든 동료가 웃음을 터트렸다.

"뭔데? 나도 보여 줘."

“어, 이거 뭐야?"

이블린이 수놓은 손수건을 본 기사들은 그것이 퍽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했다. 캐릭터에 익숙하지 않은 그들의 눈에 이블린의 자수는 어린애가 그린 어설픈 그림처럼 보였던 탓이다.

“대체 뭘 수놓은 거지? 곰인가?"

“너구리 아냐? 그래도 이상한데."

“무슨 자신감으로 이런 걸 내놓은 거야? 자수 솜씨 없다고 소문나면 시집도 못 갈 텐데?"

동료의 낄낄거림에 핀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멍청아. 그거 수놓은 사람이 공작의 약혼녀다. 시집 못 갈 일 없어.'

핀 역시 이블린의 자수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동료들의 비웃음 소리에 기분이 나빠졌다.

사실 핀은 대기실의 경비를 서며 이블린을 본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요부로 소문난 이블린이 순진무구한 소녀처럼 보이는 것에 놀랐다. 그리고 귀엽게만 보이던 이블린이 시녀들의 괴롭힘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기는 것을 보며 감탄했다.

마지막으로 J부인의 이야기로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들까지 쥐락펴락하는 모습에 호감을 갖게 된 상황이었다.

그는 이블린을 도울 생각으로 동료의 손에서 손수건을 빼앗았다.

“이건 고양이잖아. 그리고 너희가 몰라서 그렇지, 이렇게 수놓는 기법이 따로 있어. 어디 가서 그런 무식한 소리 하지 마라."

핀은 원래 서기관 수업을 받다가 집안의 강요로 기사가 되었다. 그래서 남들보다 기사로서의 능력은 떨어졌지만 머리가 좋다는 소문이 나 있었다.

‘유식한 핀’이 정색하자 낄낄거리던 기시들이 머쓱해했다.

“아, 그런 거야? 미안. 우린 지수 같은 건 잘 몰라서."

"피어슨은 누나가 있으니까 이런 자수도 많이 봤을 걸.“

"어, 미인이셨지. 피어슨 누나."

갑자기 튀어나온 누나 이야기에 당황한 핀이 헛기침을 했다.

“어쨌든 이건 고양이를 단순하게 표현한 거라고. 자세히 보면 눈이며 입을 굉장히 특이하계 수놓았잖아.”

“뭐, 그런 거 같기도 하고.”

열정적인 설명에 손수건을 들여다보던 기시들이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 말이 통하지 않는 것에 혀를 찬 핀이 말했다.

“휴 역시 너희는 못 알아볼 것 같았어 이 손수건은 내가 가져갈게.”

한데 그때 불쑥 튀어나온 커다란 손이 핀의 손에서 손수건을 가져갔다. 당황한 핀이 손수건을 빼앗아 간 덩치를 쳐다봤다.

“잠깐, 러셀. 지금 뭐 하는 거야?"

핀의 항의에 손수건을 움켜쥔 테오 러셀이 그를 응시했다.

소문에 따르면 테오는 어린 시절을 국경의 전쟁터에서 보내면서 정신이 좀 이상해졌다고 했다. 핀은 그런 소문을 다 믿지는 않았으나 아무 말 없이 자신을 쳐다 만 보는 테오의 모습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방금 내가 가져가겠다고 했잖아. 그 손수건은 내거야 네가 이러는 건 손수건을 만든 아가씨에게도 큰 실례라고. 어서 돌려줘.”

보통의 손수건이라면 그냥 줘 버리고 끝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레이디의 손수건이었고, 이미 선택한 손수건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는 것은 커다란 불 명예였다.

핀의 설득에 고개를 숙인 테오가 제 손에 움켜쥔 손수건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마치 건네주려는 것처럼 핀쪽으로 내밀었다.

"아, 고맙······.”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던 핀은 얼굴에 엄청난 통증을 느끼며 나가떨어졌다. 테오가 손수건을 쥔 손으로 그의 얼굴을 후려갈긴 것이다.

"피어슨!"

“괜찮아?“

놀란 동료들이 바닥에 쓰러진 핀을 부축해서 일으켜 세웠다. 갑자기 이유도 없이 얻어맞은 핀은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자마자 테오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기다렸다는 듯이 몸을 피한 테오가 다시 핀을 후려갈겼다.

“이 자식이!"

약이 오른 핀이 주먹을 휘둘렀다. 이번엔 운 좋게 옆구리에 한방먹일 수 있었다. 순간 비틀한 테오가 한 걸음 물러서더니 커다란 손

으로 핀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피어슨! 참아! 러셀이랑 싸워서 어쩌겠다는 거야!"

핀이 두들겨 맞을 땐 가만히 지켜만 보던 동료들이 테오가 한 대 맞자마자 뜯어말리기 시작했다.

“뭐? 러셀이면 다야?!”

홧김에 버럭 소리친 핀은 갑자기 싸늘해진 공기를 느꼈다. 핀을 말리던 동료들도 더 이상 연관되기 싫다는 것처럼 뒤로 물러섰다.

‘제기랄 그놈의 러셀 가문!'

핀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테오를 노려봤다. 하지만 자신이 동료들의 입장이라고 해도 별다르진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러셀 가문의 사람에게 덤벼드는 놈을 미쳤다고 생각하겠지.’

러셀 가문은 뛰어난 기사를 많이 배출하기로 유명한 동부의 명문이었다. 처음엔 지방의 명문가 수준이었으나 7년 전쟁에서의 활약을 통해 새로운 권력자로 급부상했다.

왕은 기존의 중앙 귀족을 견제하기 위해 러셀 가문을 총애했다. 그러자 소위 전쟁 귀족이라 불리는 신흥 세력들까지 러셀 가문을 추종하게 됨으로써 검을 든 자들은 모두 러셀 가문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

러셀 가문의 눈 밖에 나면 기사로 살수 없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핀은 자신을 두들겨 패는 테오에게 저항하며 한 대라도 더 때리기 위해 노력했다.

"까악! 뭐 하는 거예요!"

그때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 퍼뜩 고개를 돌린 핀은 눈을 동그랗게 똔 소녀들을 발견했다.

"여긴 왕궁이라고요! 당장 그만두지 않으면 시녀장님께 이를 거예요!"

귀엽게 생긴 갈색 머리의 소녀가 달려와 항의했다. 순간 멱살을 움켜쥔 테오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있는 힘껏 테오를 뿌리친 핀은 구겨진 옷깃을 억지로 바로 했다.

“무슨 일 때문에 다투신 건지 여쭤 봐도 될까요?"

갈색 머리를 따라온 이블린이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순진무구한 눈동자가 꽤 그런 바보짓을 하고 있는 거야?’라고 묻는 듯했다.

핀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화끈 달아올랐다. 창피해서 말을 꺼내지 못하는 그를 대신해서 동료가 대답했다.

"손수건 때문입니다, 아가씨. 피어슨이 고른 손수건을 러셀 경이 가로채는 바람에······. "

"회색 손수건이요?"

“예? 아, 네. 회색이었습니다.”

동료가 얼빠진 얼굴로 말했다.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인 이블린이 핀과 데오를 번갈아 쳐다봤다.

"피어슨 경?"

”······예."

핀은 비참한 마음으로 대답했다. 이블린의 시선이 왜 테오에게 손수건을 양보하지 않았냐고 묻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별 볼 일 없는 자신보다 테오에게 손수건을 주는 게 그녀의 명예에도 도움이 될 터였다.

“아, 역시 그쪽이 피어슨 경이죠?"

생글 웃은 이블린이 갑자기 핵 몸을 돌리더니 팔꿈치로 데오의 명치를 찍었다.

“컥!"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공격에 테오의 상체가 확 숙여졌다.

그의 손에서 손수건을 홱 뺏어 든 이블린이 구겨진 부분을 탁탁 두들겨 폈다.

입을 떡 벌리고 쳐다보는 사람들의 속에서 흠흠 헛기침을 한 그녀가 천사 같은 얼굴로 손수건을 내밀었다.

"피어슨 경, 제가 정성껏 수놓은 손수건이에요. 부디 받아주세요.”

“······예?"

핀의 머리가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길 거부했다. 그사이 후다닥 안으로 뛰어 들어온 빨강 머리 소녀 가소리쳤다.

“잠깐! 그건 반칙이야 ! 받으라고 강요하는 거잖아!"

"허 참, 반칙이라뇨. 피어슨 경은 제 손수건 때문에 동료와 주먹질까지 하신걸요?"

“이봐 거절해! 빨리 거절하라고!"

발을 동동 구르는 빨강 머리 때문에 오히려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핀은 기사다운 자세를 취하며 손수건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아가씨. 소중히 간직하겠습니다."

“제 강요 때문에 억지로 받으시는 건 아니죠?"

“강요라니, 절대 아닙니다. 전 손수건에 수놓인 고양이가 무척 마음에 들었습니다.”

핀은 자신을 세뇌하듯 말했다. 다행히 진심으로 느껴졌는지 이블린이 생긋 웃었다.

그때였다. 성난 곰처럼 달려든 테오가 핀을 밀치며 손수건을 낚아챘다. 그러고는 움켜잡은 천을 그대로 찢어 버렸다.

종잇장처럼 쫘아악 찢겨 나간 손수건을 바닥에 팽개친 테오가 홍 소리를 내며 이블린을 노려봤다. 기사도를 엉덩이로 깔아뭉개는 것 같은 행동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멍청한 얼굴로 테오를 바라봤다. 상식을 뛰어넘는 짓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핀은 이블린을 보호하기 위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만약 이블린이 울음을 터트리면 그녀를 대신해 테오에게 결투를 신청할 생각이었다.

모두의 경악 속에서 가없은 이블린은 바닥을 굴러다니는 손수건을 보고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든 그녀가 테오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야."

마치 지옥의 밑바닥에서 흘러나오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핀의 누나가 머리끝까지 화가 났을 때 내는 소리와 매우 비슷했다.

핀이 움찔하는 순간, 이블린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그녀의 구두 끝이 테오의 정강이에 정확하게 박혀 들었다.

"······,"

소리 없이 비명을 지른 테오가 몸을 숙여 정강이를 움켜쥐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귀를 낚아챈 이블린이 음산하게 속삭였다.

"좋은 말로 할 때 따라와.”

“아, 아!"

곰처럼 커다란 덩치의 테오가 이블린이 잡아당기는 대로 질질 끌려갔다. 멍하게 그들을 바라보던 핀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아가씨! 지금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빈방이요.”

”······예?"

귀기 어린 붉은 눈동자로 핀을 돌아본 이블린이 문득 생각난 것처럼 말했다.

“그쪽도 따라오세요.”

“네?”

“그럼 저랑 이 곰이랑 단둘이 방에 들어가라고요?"

“아, 아뇨.”

확 날카로워진 목소리에 핀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마치 잔뜩 화가 난 누나를 코앞에서 마주한 기분 이었다.

“빈방으로 안내하세요.”

“네, 네!"

이블린의 명령에 핀은 나무인형처럼 삐걱거리며 앞서 걷기 시작했다. 그 뒤를 이블린과 계속 아아 하고 비명을 지르는 테오가 따랐다.

‘왜 이렇게 된 거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는 핀이었다.

* * *

“이블린!"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달려온 피오나는 세 사람이 들어간 방의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그리고 한쪽 구석에 서서 ‘새벽별이 빛나면’이라는 노래를 부르고 있는 핀, 쿠션으로 테오를 마구 때리고 있는 이블린 바닥에 엎드린 채로 두들겨 맞고 있는 테오를 마주하게 되었다.

“헉, 시녀장님!"

놀란 이블린이 들고 있던 쿠션을 툭 떨어뜨렸다. 이런 상황만 아니었으면 도토리를 놓친 다람쥐처럼 귀여워 보였을 것이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요?"

피오나는 미간을 꾹꾹 누르며 물었다. 다이애나와 카밀라로부터 대강의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왜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얘가 제 손수건을 찢었습니다!"

이블린이 대뜸 테오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자신이 누구를 때렸는지 전혀 모르는 얼굴이었다.

‘하필이면 러셀 가문의 아들을 건드리다니.’

테오의 어머니인 러셀 백작 부인은 모자란 막내아들인 테오를 과보호하기로 유명했다. 이블린의 손에 테오가 얻어터졌다는 사실을 알면 분명 난리를 치며 궁으로 쳐들어 올 것이다.

‘적당한 핑계를 대서 이블린에게 벌을 줘야겠군. 폐하께서 이미 벌을 주셨다고 하면 또다시 처벌을 주장 할 수는 없을 테니까.’

한숨을 쉰 피오나는 핀에게 시선을 주었다.

"피어슨 경 대체 왜 여기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까?”

“아, 그게…….”

얼굴을 붉게 물들인 핀이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그러자 이블린이 한 손을 번쩍 들고 말했다

“제가 피어슨 경에게 부탁했어요. 때리는 소리가 문 밖으로 새어 나갈 것 같아서요."

“하아······."

피오나는 뒷골을 잡고 싶은 것을 애써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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