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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아내로 취업합니다-34화 (34/240)

34화

그것을 눈치챈 왕이 입을 열었다.

"참, 말해 두는 것을 잊었군. 이블린은 오늘 보고의 시험에 통과해 승진했다. 이제 왕실 보고담당이 되었으니 무례한 짓은 삼가도록.”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번쩍 고개를 든 시녀들이 나를 쳐다봤다. 그녀들의 얼굴에는 놀라움과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불신이 가득했다.

"불만이 있는 자는 언제든 보고의 시험에 용해라. 충성스러운 신하가 늘어나는 것은 언제든 환영이니.”

왕의 말에 시녀들이 하나둘 고개를 떨어뜨렸다. 갑자기 기가 팍 죽어 버린 모습이었다.

"집중하세요. 접견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피오나의 한마디에 정신을 차린 시녀들이 다시 바쁘게 손을 놀렸다.

눈치를 보며 열심히 돕던 나는 왕이 집무실로 가자 슬그머니 침실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밖에는 의상부 시녀들이 한 줄로 길게 늘어서 있었다. 뜻밖의 상황에 당황한 나는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이블린! 보고의 시험을 통과하다니 정말 대단해요!"

활짝 웃으며 내게 달려든 다이애나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커다란 눈을 반짝이는 모습이 꼭 강아지 같았다.

“어, 그냥 운이 좋았죠."

내가 한 거라곤 그냥 왕이 시키는 대로 보고에 들어갔다. 나온 것뿐이니까 대단하고 말해도 마음에 와 닿질 않았다.

하지만 내 말에 더욱 흥분한 다이애나가 소리쳤다.

"운이라니 너무 겸손한 말이에요. 저는 무서워서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을 것 같거든요.”

진정해, 다이애나. 지금 다른 사람들이 우릴 노려보고 있다고.

"몰래 보고의 시험을 치르다니, 보기보다 야망 있는 사람이었네?“

비꼬듯이 입을 연 이는 카밀라였다.

확실히 몰래 치긴 했다. 너무 몰래 쳐서 나조차도 몰랐지만.

혼자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내 모습에 울컥한 카밀라가 목소리를 높였다.

“착각하지 마. 보고의 시험이다 뭐다 이름만 거창할 뿐이지, 사실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은 많으니까. 혹시라도 가문에 누가 될까 봐 선뜻 나서지 못하는 것뿐이라고.”

"아. 그러세요?"

그거 그냥 시험에 떨어지면 왕가에 충성하지 않고 보물을 욕심낸다고 오해받을까 봐 못 친다는 소리잖아.

"이든 양은 당연히 시험을 통과할 테지만 가문의 눈치를 봐서 못 치고 지금은 저만 통과했네요? 이야, 이거 아쉬워서 어떡하죠?"

이 꿀을 나 혼자 다 빨아야겠네 하고 끌끌 웃자 카밀라가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네, 네가 아무리 그래 봤자 나는 네 명령 따윈 듣지 않을 거야!"

“네? 명령이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내게 달라붙은 다이애나가 속닥거렸다.

"왕실 보고 담당은 저희들의 상급자예요. 시녀장님의 바로 아래죠.”

“아하?"

나는 씨익 웃으며 카밀라를 쳐다봤다. 갑자기 왜 이렇게 시비를 거나했더니.

“이든 양, 그렇게 제 밑에서 일하는 게 싫으셨어요?”

정곡을 찔린 카밀라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네가 뭐가 잘나서 내 상급자가 된단 거야? 신분이며 재주며 뭐 하나 나보다 나은 게 없는 주제에!"

“신분은 그렇다 치고 재주요?"

그걸 어떻게 확신해? 고개를 갸웃하는 나를 보고 발끈한 카밀라가 삿대질을 했다.

“자수도 제대로 못 놓는 게! 네가 수놓은 그 괴상한 손수건 따위 아무도 선택하지 않을걸!"

“호오?”

아무래도 카밀라가 나보다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자수인 것 같다. 그럼 그 자신감을 와드득 콰드득 부숴 줘야지.

“그렇게 자신 있으면 저랑 내기하실래요?"

내기라는 말에 멈칫한 카밀라가 눈을 굴렸다. 하지만 나는 그물에 걸린 물고기가 빠져나가게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저는 제 손수건이 굉장히 인기 있을 거라고 확신하거든요. 그러니까 누구 말이 맞는지 내기를 하는 게 어때요? 진 사람이 이긴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는 거예요.”

"흥! 이제 보니 더러운 수작을 부렸구나. 미리 네 손수건을 가져갈 사람을 정해 놓은 거지?"

카밀라가 절대 속지 않겠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나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네? 시비를 건 것도 이든 양이고, 제 손수건을 트집 잡은 것도 이든 양인데, 제가 이 일을 미리 알고 수작을 부렸다고요? 진심이세요?“

내 반박에 순간 당황한 카밀라가 입을 달싹거렸다. 나는 카밀라처럼 가슴 앞에 팔짱을 끼고 그녀를 위 아래로 훑어봤다.

“오히려 그런 방법을 바로 떠올리는 이든 양이 수상 한데요? 왠지 자주 해 보선 것 같은 느낌인데?"

“뭐? 무슨 소리야!"

"아, 귀 아파 아니면 아닌 거지, 왜 그렇게 소리를 질러요?"

나는 두 귀를 틀어막으며 눈을 흘겼다. 기가 막힌 얼굴로 씩씩거리던 카밀라가 말했다.

"진 사람이 이긴 사람의 소원을 들어준다고 했지? 그럼 내가 시녀를 그만두라고 해도 따를· 거야?“

“이든 양이 이기면 그러죠, 뭐."

나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러자 카밀라가 교활한 미소를 지었다.

"좋아 대신 네 손수건은 인기가 아주 많아야 해. 한 명이 아니라 두 명 이상이 네 손수건을 원해야 한다고. 그래야 네가 수작을 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잖아?"

흠, 제법 머리를 썼구나. 칭찬해 주마.

“일방적으로 조건을 늘리는 건 공평하지 못하죠. 저도 조건 하나 추가할게요. 지금 제 손수건을 원하는 사람이 없어도 새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는 사람이 있으면 제가 이기는 걸로 해요. 어때요?”

“······좋아."

잠시 고민하던 카밀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내기 조건을 정한 우리는 대기실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 이블린. 그런 조건을 걸어도 괜찮아요? 이블린이 너무 불리하잖아요.”

내 팔을 붙잡은 다이애나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없어요.”

“네?”

“질 자신이.”

기사들 중에 고양이 키우는 사람이 하나만 있어도 내 승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나는 자선만만하게 물었다.

“이든 양, 결과는 언제 나오죠?"

“바로 알 수 있어 지금 대기실에서 기서들이 손수건을 고르고 있을 테니까."

카밀라가 쌀쌀맞게 대꾸했다. 거참, 한국인도 아닌데 되게 성격 급하네.

“아, 그런데 제 손수건에 수작 부려 놓으신 거 아니죠? 만약 손수건이 망가져 있으면 무조건 이든 양이 지는 겁니다?"

“내가 넌 줄 알아?!"

발칵 화를 낸 카밀라가 대기실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나는 엉망진창이 된 대기실과 뒤엉켜 싸우고 있는 두 사람을 볼 수 있었다.

정확히는 좀 더 키가 크고 건장한 기사에게 다른 한 명이 일방적으로 얻어터지는 중이었다.

"까악! 뭐 하는 거예요!"

다이애나까지 비명을 질러서 더 정신이 없어졌다.

난리법석 중에 나는 키가 큰 기사의 손에 들려 있는 회색의 천을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어라, 내 손.수. 건이네?"

씨익 웃으며 중얼거리자 카밀라의 얼굴이 찌그러진 캔처럼 와작 일그러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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