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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아내로 취업합니다-33화 (33/240)

33화

"어, 그게······.”

갑자기 엄청나게 거창한 소원이 되어 버렸다. 당황한 내가 변명하려는 순간 왕이 말을 이었다.

"좋다. 네가 저 문을 무사히 통과한다면 단 한 번은 국익보다 네 목숨을 소중하게 여기겠다."

아니, 저 문이 대체 뭔데요?

불안해졌지만 여기까지 와서 뒤로 밸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통과만 하면 여분의 목숨 한 개를 벌 수 있는 기회 아닌가.

나는 왕에게 정중하게 절을 했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꼭 통과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음, 좋은 자세다. 이제 가라."

"네!"

나는 몸을 돌려 어두운 방을 바라봤다. 마치 그림자에 가려진 것처럼 안이 보이지 않았다. 심호흡을 한 나는 인당수에 뛰어 드는 심청이처럼 몸을 날렸다.

몇 백 년 만에 나를 깨운 주인은 한 소년이었다. 긴 은발과 푸른 눈. 상처투성이의 손을 가진.

나는 주인의 상처를 치유하며 속삭였다. 앞으로 너에겐 승리와 영광만이 있을 거야. 네가 원하는 것은 내가 다 이루어 줄 거야.

기다려! 너는 전쟁에 나갈 거잖아. 이대로 가면 죽을 지도 몰라.

돌아와! 네 아버지도, 네 수하들도 너를 죽일 생각뿐이잖아. 네겐 내 힘이 필요해!

하지만 소년은 끝까지 나를 돌아보지 않고 멀어져 갔다. 화가 난 나는 버럭 소리쳤다.

야! 나는 성검이라고! 날 버리고 가서 네가 잘될 줄 알아?

“이블린!"

누군가가 내 이마를· 찰싹 때렸다.

나는 꿈에서 깨어나듯 정신을 차렸다. 손발의 감각이 돌아오면서 밀려났던 의식이 제자리를 찾았다.

“어 , 폐하?"

“멍하게 서서 뭘 하는 게냐? 짐은 네가 눈을 뜨고 자는 줄 알았다."

왕이 장난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내 손을 내려다봤다. 손가락 열 개가 잘 달려 있었다.

하지만 조금 전의 나는 내가 검이라고 생각했다. 그 것도 몇 백 년 만에 주인을 만난 성검이었다.

그리고 성검의 주인이었던 소년은 세스였다. 지금보다 어리고 머리가 길었지만, 도저히 못 알아볼 수가 없는 얼굴이었다.

‘분명 꿈이나 환상은 아니었어.'

내가 본 것은 누군가의 기억이었다.

그렇다고 내 능력으로 읽은 것은 아니다. 내 힘은 상대의 생각을 종이나 천위에 옮기는 것이지, 상대의 기억을 눈으로 보는 건 불가능하니까.

"폐하, 혹시 이곳에 성검이 있나요?"

유일한 가능성온 내가 이곳에 남아 있는 강렬한 기억에 사로잡혔다는 것뿐이다.

”······성검? 혹시 울부짖는 검을 말하는 것이냐?"

울부짖는 검? 늑대도 아니고 검이 울부짖다니, 좀 이상한데?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피식 옷은 왕이 앞을 손짓하며 말했다.

“그걸 성검이라 부를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울부짖는 검이라면 저 안의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 일단 오신기 중 하나니까 말이야.”

나는 반사적으로 왕이 가리키는 쪽을 확인했다.

“우와."

거대한 캐비닛이 마치 숲처럼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왕실 보고보다는 박물관의 지하 같은 느낌이었다.

내가 상상했던 것처럼 금빛 찬란한 장소는 아니었지만 거대한 캐비닛 때문에 위압감이 들었다.

"놀라는 것을 보니 제정신으로 돌아온 모양이군. 보고의 문을 통과한 것을 축하한다."

왕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나든 뒤늦게 정신이 번쩍 들었다.

환상을 보는 바람에 잠시 잊고 있었지만 무사히 입구를 통과 한 것이다!

나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상으로 목숨건 하나를 받을 수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왕의 심기에 거슬릴까 봐 눈치만 봐야 했다.

그런 나를 보고 왕이 픽 웃었다.

"왼손을 내밀어 봐라.”

"네?"

잠시 머뭇거리던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품에서 심플한 은반지를 꺼낸 왕이 그것을 내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 주었다.

"문을 통과한 상이다. 언젠가 네 목숨이 필요할 때 받아 가마 그때까지 절대로 빼지 마라.”

“가, 감사합니다!"

당황한 나는 말을 더듬거렸다.

‘여긴 왼손에 결혼반지를 끼는 풍습이 없나?'

너무 거침없이 끼워 주는 바람에 물어볼 틈이 없었다. 그래도 기분은 날아갈 것처럼 좋았다. 목숨을 하나 벌었으니까.

반지를 보고 헤헤 웃자 거친 손길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든 나와 눈이 마주친 왕이 피식 웃었다.

“이제 돌아가자. 더 늦으면 피오나가 진짜 화를 낼 테니까.”

“앗, 네!"

나는 밖으로 향하는 왕을 따르며 뒤를 돌아보았다. 저 안 어딘가에서 버림받은 성검이 애타게 주인을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기억을 보여 준 것도 내가 세스와 관련된 사람이라서 그런 거겠지.’

하지만 나는 성검을 세스에게 데려갈 능력이 없었다. 당연한 일인데도 조금 전의 기억 때문인지 씁쓸하게 느껴졌다.

“미안.”

조그맣게 사과한 나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기분 탓인지 등 뒤에서 뭔가가 반짝인 것 같았다.

* * *

"폐하! 여기 계셨습니까!"

밖으로 나온 우리는 피오나와 딱 마주쳤다.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왕의 뒤에 숨었다.

“아, 파오나."

“침실에서 갑자기 사라지셨다는 소식을 듣고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십니까?"

“한두 번도 아닌데 뭘."

”폐하!”

귀를 후비적거리는 왕을 보니 이런 일이 자주 있었던 모양이다. 피오나의 잔소리를 귓등으로 튕겨 낸 왕이 나를 앞으로 끌어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생겼다. 이블린이 방금 보고의 시험을 통과했거든.”

“예?“

깜짝 놀란 피오나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보고의 시험이라는 게 뭔지 나중에 꼭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혹시나 해서 시켜 봤는데 아주 가볍게 성공해 버렸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공증인을 셋 정도 불러서 공식적인 기록으로 남기고 싶군.”

“예, 준비하겠습니다."

피오나가 얼떨떨한 얼굴로 말했다. 불안해하는 내 머리를 쓱쓱 쓰다듬은 왕이 다정하게 물었다.

“이블린. 한번 해 본 거니까 잘할 수 있지?"

”······예, 폐하.”

답은 정해져 있고 나는 그대로 말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시험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피오나처럼 왕을 찾아 달려온 사람들이 붙잡혀 증인이 되었던 것이다.

나는 다른 이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보고에 들어갔다 나왔다 이번에는 환상도 보이지 않아서 처음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다.

다들 턱이 빠지게 놀라는 것을 보니 머쓱한 기분이 들었다. 아장아장 걸음마만 해도 박수 치는 사람들을 보는 기분이랄까.

왕이 자랑스럽게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다들 알겠지만 왕실의 보고는 왕가에 충성하며 보물에 아무런 욕심이 없는 자만이 들어갈 수 있다. 지금 까지는 오직 피오나만 보고의 시험을 통과했지. 오늘 또 한 명의 충성스러운 신하를 발견하게 되어 짐온 매우 기쁘다."

아니, 보고의 시험이 그런 거였어? 그런 곳에 설명도 없이 나를 밀어 넣은 거야? 놀라서 굳어 버린 내 어깨를 툭툭 친 왕이 말했다.

“직접 확인했으니 불만은 없겠지. 이블린 하인즈를 왕실보고 관리 담당에 임명하겠다.”

"폐하! 시험에 통과했다고는 하나 너무 이른 판단이 십니다!"

"언제까지 피오나를 부려 먹을 생각이지? 할 일도 많은 이가 매번 뛰어다니는 게 가없지도 않은가?"

무어라 반폐하던 사람은 왕의 반박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피오나는 앞으로 이블린에게 보고 관리를 가르치도록 해.”

"예, 알겠습니다."

피오나가 비장한 얼굴로 답했다.

순식간에 직무가 바뀐 나는 당황해서 물었다.

"폐하, 그럼 저는 이제 의상부에서 일하지 못하는 건가요?“

겨우 다이애나라는 친구가 생겼는데 또다시 다른 자리로 튕겨 나가다니, 이럴 수는 없다.

"이블린!”

피오나가 엄한 표정으로 주의를 주었다. 나는 실망스레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늘어뜨렸다. 다행히 하하 웃은 왕이 대답해주었다.

“넌 여전히 의상부 소속이다. 기존의 일과 왕실 보고관리를 같이하는 것뿐이지.”

······일이 많아지면 나한테 좋은 게 하나도 없는데? 같은 생각은 왕이 내 반지를 쓱 쳐다보는 순간 사라졌다. 개처럼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충성충성!

“이블린, 오늘 짐에게 보여 준 충정은 잊지 않으마. 앞으로도 좋은 모습을 기폐하겠다.”

내 어깨를 꽉 잡은 왕이 거룩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더없이 감격한 얼굴로 답했다.

"감사합니다. 폐하의 믿음에 결코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겠습니다.”

떨떠름해하는 증인들을 보니 내 연기가 제법 그럴싸했던 것 같았다.

짜고 치는 연극이 끝나자 나는 피오나의 손에 꽉 붙들린 채 왕의 침실로 향했다.

침실에선 시녀들이 아침 접견 준비를 마치고 왕을 기다리고 있었다. 왕의 뒤에 선 나를 발견한 의상부 시녀들의 눈이 커다래지는 것이 보였다.

준비된 옷을 확인한 피오나가 침실부 시녀들과 함께 왕의 옷을 갈아입혔다. 그런데 옷시중을 받던 왕이 나를 힐끗 보며 말했다.

“이블린, 너도 와서 거들어라."

"예? 예"

나는 다른 이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왕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렇다고 큰일을 한 것은 아니고 옷자락이나 리본 끝을 살짝 잡고 있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침실부 시녀들은 내가 자기 지갑이라도 빼앗은 것처럼 험악한 눈빛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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