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심각한 얼굴로 지시하던 왕이 갑자기 피식 웃었다. 의아해진 피오나가 쳐다보자 왕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라리사 모어와 이블린이 맞붙으면 꽤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둘이 부딪친다면 이블린이 위험해질 겁니다.”
"알아. 그냥 이블린의 엉뚱한 행동에 얼빠진 표정을 짓는 라리사 모어가 상상돼서 말이야.”
피오나의 얼굴에도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내 고개를 저은 그녀가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라리사 모어가 또다시 공작가의 사람을 해치게 둘 순 없습니다. 그것이 대역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안다니까. 이블린은 시간 벌이만 해 주면 충분해.”
왕은 이블린에게 큰 기대가 없었다. 억지를 써서 시녀로 만들긴 했지만 그건 대역을 들이고도 활용하지 않으려는 공작 때문이었다.
‘이블린은 꽤 귀엽고 엉뚱하지만 라리사 모어와 맞설 능력은 없지'
이블린의 역할은 공작에게 약혼녀가 있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는 걸로 충분했다. 이블린이 유명해지면 유명해질수록 라리사 모어는 쉽게 움직이지 못할 테니까.
“그럼 이블린은 계속 의상부에 두실 겁니까?"
“그래야지. 침실부나 집무부에 두긴 위험하잖아."
의상부에서 몇 개월 정도 경력을 붙인 후에 공식적인 자리에서 얼굴을 알린다. 그 후에 차츰 살롱이나 파티에 참석시킨다.
그것이 왕이 생각하는 계획이었다.
“그때까지 이블린이 쓸데없는 시비에 휘말리지 않도록 감시해.”
"예, 제가 옆에서 지켜보겠습니다.”
물론 이블린은 그들의 계획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 * *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피오나를 바라봤다.
내가 해 온 숙제를 꼼꼼히 확인한 피오나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까지 정성을 다해 썼다는 게 느껴지는군요. 이번 일은 이것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다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없도록 하세요.”
"명심하겠습니다."
아싸, 통과다. 나는 공손한 표정을 유지하며 등 뒤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 영광과 기쁨을 같이 숙제를 해 준 세스에게 바칩니다.
‘진짜 내 글씨랑 똑같이 써서 좀 놀랐지만…….’
세스는 한번 쓱 훑어본 것만으로도 내 필체를 위조 해 냈다 공작이 아니었으면 암흑계의 거물이 되었을 능력이었다. 나는 앞으로도 세스가 빛의 길만 걷기를 빌었다.
“이제 대기실로 가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으세요.”
"예,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나는 마지막까지 정중히 인사한 후 물러났다. 발걸음이 날아갈 것처럼 가벼웠다.
그런데 밖으로 나오는 순간, 누군가가 내 몸을 확 잡아 당겼다. 놀라 소리를 지르려는데 커다란 손이 입을 틀어막았다.
“짐이다.”
짐이 누구야? 인상을 쓰던 나는 손이 풀리자 깜짝 놀랐다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왕이 내 앞에 서 있었다.
"폐. 폐하!"
“쉿, 몰래 빠져나온 거니 조용히 해라.”
왕이 손가락 하나를 입에 대며 속삭였다. 나는 즉시 입을 다물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린 왕이 내 손목을 잡아 당겼다.
“따라와."
손목을 타고 낯선 감정이 전해졌다. 팔딱팔딱 뛰어 다니는 개구리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왕에게 반쯤 끌려가며 다급하게 말했다.
“폐하, 어디로 가시는지 알려 주시면 제가 따르겠습니다."
“어허, 얌전히 따라올 것이지 말이 많구나."
을러대는 말투와 달리 왕은 히죽 웃고 있었다. 그것이 엄청나게 불길했다. 프라이버시 때문에 남의 생각을 읽진 않지만 지금은 진짜 읽어 보고 싶었다.
‘끌고 가서 가두는 건 아니겠지?'
나는 불안감에 떨면서도 허겁지겁 왕을 따라갔다. 워낙 걸음이 빨라서 그동안 달리기 연습을 하지 않았다면 넘어졌을 것 같았다.
내가 숨을 헐떡거릴 쯤이 돼서야 왕의 걸음이 멈췄다. 그동안 주변을 둘러볼 여유도 없었던 나는 겨우 앞을 확인했다.
눈앞에 거칠게 다듬은 돌을 쌓아올린 벽이 있었다. 사각형으로 뻥 뚫린 구멍은 시커메서 안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황금으로 치장된 궁과 어울리지 않는 투박한 모습이었다.
“여기는…….”
"왕실 보고의 입구다.”
“네?”
왕의 말을 듣지 않았으면 잡동사니 창고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성큼 앞으로 걸어간 왕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손을 댔다. 그러자 사각형의 구멍 안에서 키리릭하고 톱니바퀴 돌아가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마, 마법인가?'
전생엔 마법이 없었기에 이럴 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다. 뒤이어 쿵 소리가 나더니 습하고 무거운 공기가 구멍 안쪽에서 흘러나왔다.
눈을 동그랗게 뜬 나를 보고 왕이 개구쟁이처럼 웃었다.
"여기까지 왕의 안내를 받아서 온 시녀는 너 하나뿐 일 거다. 일생의 영광으로 여겨라."
“어 , 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를 왜 데려오신 거죠? 이유를 물어볼 틈도 없이 왕이 성큼성큼 구멍 안쪽으로 들어갔다.
“늦으면 두고 간다."
“헉! 지금 갑니다!"
나는 서둘러 왕의 뒤를 쫓았다. 입구를 통과한 순간 얇은 막 같은 것이 얼굴을 스쳤다. 하지만 너무 순식간 이라 제대로 느낀 건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구멍의 안쪽은 끝없이 이어진 복도였다. 희미한 불빛이 복도를 어렴풋이 밝히고 있었다. 하지만 먼저 들어간 왕은 보이지 않았다.
”폐하?“
“여기다.”
귓가에서 왕의 목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옆으로 비켜서던 나는 구석에 놓인 갑옷과 충돌할 뻔했다. 왕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어허, 조심해야지. 여기 있는 물건을 부쉈다간 평생 왕실의 노예로 일해야 한다.”
“헉!"
“뭐, 생각해 보니 그것도 나쁘진 않겠구나. 하나 부숴 볼 테냐?"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신 왕이 다시 앞서서 걷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으려고 애쓰며 왕의 뒤를 쫓았다.
길고 긴 복도 양쪽에는 방으로 보이는 공간이 가득 했다. 어두워서 안쪽까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비단과 금화, 금빛으로 빛나는 갑옷 같은 것이 복도까지 흘러 나와 있었다. 먼지와 뒤엉킨 금화를 본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이곳을 정리하라고 절 데려오신 건가요?"
나 혼자서는 청소 다 못 할 것 같은데. 불안함에 떠는 나를 힐끗 본 왕이 말했다.
"여긴 진짜 보고가 아니라 침입자를 막기 위한 함정이다. 여기 있는 물건들은 모두 고대의 저주가 걸려 있으니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해라."
"……네.”
“사실 저주를 풀지 못한 물건만 남겨 둔 건데 그걸 건드리는 멍청이들이 있어서 말이야. 그 뒤로 자연스럽게 함정이 됐지.”
나는 조용히 복도 한가운데를 걸으며 울먹였다. 세스가 보고 싶었다.
“이곳이 진짜 왕실 보고다.”
앞서 가던 왕이 우뚝 멈추더니 방 하나를 가리켰다. 이제까지 지나친 방과 하나도 다룰 것이 없는 곳이었다. 나는 왕이 농담을 하는지 아닌지 몰라 눈만 깜빡였다.
그때 왕이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블린 그란, 짐이 약속하마. 네가 보고의 문을 통과한다면 저 안에 있는 어떤 보물이라도 내주겠다.”
“네?”
"보고 안에 있는 보물들은 모두 오랜 역사와 가치, 신비를 간직한 것이다. 네가 무엇을 고르든 결코 손해는 아닐 거다."
마치 유혹하는 것 같은 말이었다. 나는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눈을 깜빡였다. 내 안에서 불안에 가독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짓말인 거 아냐? 진짜 보고의 문은 다른 곳에 있고 나를 가짜 문에 밀어 넣으려는 건지도 몰라.
확실히 나를 제거하기엔 이보다 좋은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만약 왕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럼 내가 간절히 바라던 기회를 손에 넣은 건지도 모른다. 눈치를 보던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폐하, 보물 대신 다른 것을 받으면 안 될까요?"
“다른 것?"
"예, 보물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을 받고 싶습니다.”
어찌 보면 건방지기 짝이 없는 소리였다. 말하면서도 왕이 화를 낼까 봐 조마조마했다. 다행히 왕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저 안에 있는 보물들 중엔 고대로부터 내려온 귀중한 물건도 있다. 그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라? 너무 욕심을 부리는 게 아니냐?”
"폐하껜 아무런 가치도 없지만 제겐 무엇보다 소중한 것입니다.“
“그게 뭐지?”
나는 떨리는 손을 가슴 위에 올리며 말했다.
“제 목숨입니다.”
뜻밖의 말이었는지 왕이 침묵했다. 나는 왕이 불쾌 하게 여기지 않길 빌면서 말을 이었다.
“딱 한 번만, 나중에 제가 거슬려서 죽이고 싶으셔도 딱 한 번만 살려 주시면 안 될까요?"
"······."
그동안 나는 삶에 딱히 미련이 없다고 생각했다. 죽는 것은 아프니까 굳이 죽을 생각은 없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살아야겠다는 절박함도 없었다.
하지만 세스가 내 이마에 입 맞췄을 때. 내 과거를 진지하게 들어 줬을 때 그리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거라고 약속했을 때.
나는 좀 더 오래 살고 싶다고, 이 사람이 날 필요로 하지 않을 때까지 함께 있고 싶다고. 그렇게 생각하게 됐다.
그러나 생각뿐이었다. 내 목숨은 아무 가치도 없어서 누군가가 거슬린다고 생각하면 바로 사라질 운명이었다. 그 누군가가 세스라면 괜찮지만, 다른 사람이라면 무척 슬플 것 같았다.
세스도 내가 갑자기 사라지면 슬퍼할 것이다. 어쩌면 펫로스에 걸릴지도 모른다. 그런 비극을 막기 위해서라도 여기서 왕을 설득할 필요가 있었다.
“내가 너를 죽일 거라고 생각하느냐?"
왕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서 바로 ‘네!’라고 대답하면 안 되겠지. 나는 열심히 머리를 굴려 적당한 대답을 찾아냈다.
"폐하께서 그러고 싶지 않으셔도, 그래야만 하는 순간이 올수도 있으니까요.”
“그때 살려 달라?"
”네!”
나는 두 손을 모으고 간절히 왕을 올려다봤다. 한쪽 입 꼬리를 쓱 밀어 올린 왕이 말했다.
”과연 보물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소원이구나. 네 말대로라면 국익보다 네 목숨을 우선시해 달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