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그런 식으로 도망가면 쫓아가고 싶어지는데.”
“네?”
“아니. 지금은 몰라도 괜찮아."
뭐지. 왜 불안해지지? 꾸물꾸물 몸을 일으킨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여기는 어디예요?"
“당신 상태가 좋지 않아서 중간에 마치를 세웠어.”
“어, 전 괜찮은데요. 잠깐 악몽을 꿨을 뿐이고······."
“몸에 이상이 있을 수도 있어 만약을 대비해 성수를 마셨지만 당장 움직이는 건 위험해.”
그냥가위 눌린 것 같은데 정말 별일 아닌 것 같았지만 세스의 분위기가 너무 심각해서 움직이면 안 될 것 같았다. 다시 슬그머니 세스의 품에 기댄 나는 발을 꼼지락거리다 물었다.
“그럼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해요?"
“당신 주치의인 켄트 박사가 도착할 때까지.”
세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말울음 소리와 나 죽는다는 비명이 들려왔다. 깜짝 놀란 나와 달리 세스는 덤덤하게 설명했다.
"박사는 예전에 낙마한 뒤로 말 타는 걸 무서워하거든. “
…… 납치당한 주치의에게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다.
공작가의 주치의는 꼿꼿한 의사의 표본 같은 사람이었다. 머리가 헝클어져 엉망이 된 모습이었지만 평소처럼 침착한 태도로 나를 진찰했다.
결과는 예상대로 이상 없음. 평소보다 피로가 약간 쌓인 정도라고 했다.
진단을 들은 세스가 언짢은 기색을 드러냈다.
“이상이 없다고? 제대로 본 것이 맞나?"
“성수를 두 병이나 드셨는데 이상이 있을 리가요. 신성력의 반작용으로 체력이 좀 떨어졌지만 곧 회복될 수준입니다."
맛없는 음료라고 생각했던 성수는 사실 만병통치약 같은 거였던 모양이다. 주치의의 눈빛에서 그런 귀한 것을 낭비했다는 아쉬움이 느껴졌다.
세스가 무똑똑하게 말했다.
“어깨를 흔들고 이름을 불러도 잠에서 깨어나지 못 했다."
“몸이 피로하거나 환경이 변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증세입니다.”
세스는 여전히 납득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주치의가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
“전하와 달리 아가씨는 몸이 무척 약하십니다. 이상이 없는데 왜 이러는 거냐고 물으셔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냥 약하신 거니까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잘 드시고 잘 쉬시고 무리를 하지 않으셔야지요. 항상 몸이 약하다는 것을 염두에 두셔야 일상적인 생활이 가능할겁니다.”
어? 나 그렇게 위험한 상태야?
깜짝 놀란 나를 보고 주치의가 손을 내저었다.
“당장 어떻게 될 정도로 심각한 상태라는 건 아닙니다. 그저 무리하지 말고 몸을 잘 돌보셔야 한다는 뜻입니다.”
나는 저도 모르게 세스의 눈치를 살폈다. 무리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으니 당장 시녀 일을 그만두라고 할 것 같았다.
잠시 말이 없던 세스가 물었다.
“약속할 수 있어?”
“네?”
“잘 먹고 잘 쉬고 무리하지 않겠다고.”
“네! 네! 약속할게요!"
나는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떨떠름한 얼굴이 된 주치의가 당부했다.
“정말 조심하셔야 합니다. 보통 몸이 약하면 거기에 맞춰서 움직이는데, 아가씨는 자신이 건강한 사람인 것처럼 무리를 하시더군요.”
순간 가슴이 뜨끔했다. 나도 모르게 전생의 기억대로 몸을 움직였던 모양이다.
"진짜 조심할게요."
내 대답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인 주치의가 세스에게 말했다.
“당분간 아가씨께 성수를 주시면 안 됩니다. 성수는 병과 상처를 치유하지만 그만큼 체력을 갉아먹습니다. 몸이 약한 아가씨께는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명심하지.”
세스가 무겁게 답했다. 나를 보는 눈이 꼭 수술실에 실려 들어가는 강아지를 보는 듯했다.
안타까운 시선을 견디다 못한 나는 헛기침을 했다.
“그럼 저 이제 집에 가도 되나요?"
"물론입니다 돌아가셔서 폭 쉬시는 게 건강에도 좋을 겁니다.”
웃으며 말하던 주치의의 얼굴이 점점 흐려졌다. 아무래도 말을 타고 돌아갈 일이 걱정인 듯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권했다.
"박사님도 저희와 같이 마차를 타고 가시면…….”
“안 돼.”
단번에 내 말을 끊은 세스가 싸늘한 눈으로 주치의를 바라봤다.
“환자가 편히 쉴 수 있게 배려해 줬으면 좋겠군. 원 한다면 마부석을 내주지.”
“마부석으로 충분합니다. 감사합니다, 전하.”
주치의는 도망치듯 마차에서 내렸다. 황당한 얼굴로 세스를 쳐다보자 그는 오히려 태연스레 내게 팔을 내 밀었다.
“이비, 이쪽으로 와.”
"저 이제 괜찮은데요. 박사님도 이상 없다고 하셨고.”
“조심 하기로 약속했잖아.”
그렇다고 품에 안겨 있겠다고 약속한 적은 없는데. 나는 입을 삐죽이면서도 꾸물꾸물 세스의 품에 기어 들어갔다.
그러자 푹 한숨을 쉰 세스가 나를 꼭 껴안았다. 나는 그가 무척 놀랐다는 것을 깨닫고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자면 안 돼.”
“아, 안 잤어요!"
잠깐 감상에 빠졌을 뿐인데 억울하다. 내 손을 붙잡은 세스가 다시 한번 ‘자지 마.’ 하고 속삭였다. 불안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세스는 눈앞에서 가족을 잃었다고 했다. 어쩌면 아무리 불러도 깨어나지 않는 내 모습이 그때의 상처를 건드렸는지도 모른다.
‘나도 세스를 위로해 주고 싶은데'
세스가 그랬듯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약속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겐 그런 힘도, 자격도 없었다. 고작 2년짜리 대역일 뿐이니까.
쓴웃음을 삼킨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말했다.
"안 잘 거예요. 지금 자면 밤에 못 자잖아요. 또 숙제도 해야 돼요.”
"숙제?"
“내일까지 ‘올바른 레이디의 규범'을 열 번 써 가야 하거든요.”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보던 세스가 작게 웃었다.
“그건 숙제보다는 벌인 것 같은데?"
헉. 귀신인가. 어떻게 알았지 깜짝 놀라는 내게 세스가 제안했다.
“열 번이나 쓰려면 힘들겠군. 도와줄까?”
"네? 어떻게요?"
"둘이서 같이 쓰면 더 빨리 끝나겠지.”
“공작님이랑 저랑 글씨체 완전히 다르잖아요.”
“내 특기가 필체 위조거든 당신 글씨와 똑같이 쓸 수 있어.”
아니, 그런 엄청난 특기가!
눈을 동그랗게 뜬 나를 향해 세스가 마치 유혹하듯 웃었다.
“어때? 같이할까?"
“그, 그렇지만 바쁘실 텐데.”
“아내 숙제도 못 도와줄 만큼 바쁘진 않아.”
나는 갈등했다. 스스로 어른이룰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반, 세스를 귀찮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반이었다.
고민하는 나를 눈치 챈 세스가 덧붙였다.
“대신 나중에 내 부탁을 하나들어 줬으면 좋겠어.”
“무슨 부탁이요?"
“그때 말할게 듣고 싫으면 거절해도 돼.”
그렇다면야 뭐 나는 고민을 접고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절대 안 들키게 해 주세요.”
완전 범죄를 꿈꾸는 내 속삭임에 세스가 웃었다. 그는 내 손을 들어 손등에 정중하게 입을 맞췄다.
“절대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부인.”
* * *
“흐음, J부인 이야기라.”
왕이 흥미로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백합 궁의 시녀장인 피오나가 차갑게 말했다.
"들을 가치도 없는 저속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다들 뒷이야기가 궁금해서 어쩔 줄을 모르는 것 같은데.”
“그건······. "
무어라 말하려던 피오나가 한숨을 쉬었다.
근무를 서던 기사들을·통해 퍼져 나간 J부인 이야기는 순식간에 궁을 점령했다. 어딜 가나 J부인 이야기가 들려서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동시에 피오나를 애원하듯 바라보는 시선도 늘어났다. 하필 제일 흥미로운 순간에 이야기가 딱 끊겨 버린 터라 다들 궁금해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피오나, 그냥 이블린에게 뒷이야기를 풀라고 해.”
"절대 안 됩니다.”
피오나가 단호한 얼굴을 하자 왕이 난감하게 뺨을 긁적였다.
“어쩐지 이블린의 일은 예상대로 흘러가질 않는군.”
“그것도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피오나가 지끈거리는 관지놀이를 꾹꾹 눌렀다. 이블린을 잘 가르쳐서 그럴듯한 귀부인으로 만들려던 그녀의 계획이 초반부터 휘청거리고 있었다.
“하여튼 특이한 녀석이라니까.”
투덜거리는 왕의 얼굴엔 미소가 걸려 있었다. 낯선 환경에 던져 놓으면 기가 죽을 거라 예상했는데, 이블린은 아주 이상한 방법으로 자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마리아 프림로즈까지 거기 휘둘릴 줄은 몰랐지만.’
자존심만 강한 카밀라 이든과 달리, 마리아 프림로즈는 꽤 음흉한 성격이었다. 이블린을 괴롭히려다 제 이미지만 왕창 깎였으니 이를 갈고 있을 터였다.
‘빨리 왕실 보고를 열어야겠군.’
이블린에게 몸을 지킬 보물을 달아 놔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고민하던 왕은 해독과 방어 마법이 걸려 있는 반지를 이블린에게 주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이왕이면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서 보내 볼까. 세스 녀석의 반응이 궁금한데.'
왕은 다소 심술궂게 생각했다.
해독과 방어 마법이 걸린 반지는 왕실에도 셋밖에 없는 보물이었다. 공작이 아무리 화가 나도 필요 없다고 내치지는 못할 것이다.
고작 대역이 착용하기엔 과분한 물건이지만, 이블린 때문에 속이 탈 라리사 모어를 생각하니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문득 라리사 모어에게 생각이 닿은 왕이 물었다.
"라리사 모어는 아직 움직임이 없나?"
“이블린에 대한 헛소문을 퍼트린 뒤엔 잠잠합니다."
"절대 가만히 있을 여자가 아니야 뭔가를 꾸미고 있을 테니 좀 더 자세히 알아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