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
“그럼 내일 봐요!"
다이애나는 활기차게 손을 흔들었다. 나는 다이애나가 탄 마차가 사라질 때까지 마주 손을 흔들어 주었다.
내 옆에서 조용히 서 있던 세느가 말했다.
“귀 여운 아가씨군.”
“그, 그렇죠?”
순간 뜨끔한 나는 말을 더듬었다. 나도 다이애나가 귀엽다고 생각했는데 세스가 그런 말을 하자 기분이 좀 이상했다.
어, 뭐야 진짜 왜 이런 기분이 들지?
괜히 손을 꼼지락거리던 나는 세스를 바라보았다.
“다이애나는 정말 다정하고 좋은 친구예요.”
“그래?”
"귀엽기도 하지만 예쁘기도 하고요.”
세스는 별 반박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뚱하게 그를 노려봤다. 평소엔 눈치 빠른 남자가 이럴 땐 곰이 따로 없었다. 한숨을 푹 쉰 나는 점잖게 세스를 타일렀다.
"공작님, 이럴 땐 ‘아니야, 네가 더 귀엽고 예뻐!’라고 말해 주는 거예요.”
눈을 크게 뜬 세스가 나를 돌아봤다. 나는 빨리 말하라는 뜻으로 흠흠 헛기침을 했다. 그러자 작은 웃음소리를 낸 세스가 나를 꼭 끌어안았다.
“미안. 당신이 더 귀엽고 예뻐.”
"실수했을 땐 두 번씩 말해 주는 거고요.”
“진심으로 말하는 거야. 당신이 더 귀엽고 예뻐.”
좀 부족하지만 이 정도로 해 둘까. 나는 관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그렇게 웃긴지 어깨를 들썩이던 세스가 속삭였다.
“사실은 그녀를 질투했어. 당신이 처음 본 사람을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아서.”
생각지도 못한 말에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아주 잠깐이지만, 당신을 아무도 못 보는 곳에 가둬 놓고 싶다고도 생각했고.”
장난스런 목소리와 달리 세스의 눈은 진지했다.
그는 내가 겁을 먹고 도망치길 바라는 것 같았고. 동시에 아무렇지도 않게 웃어 주길 바라는 것 같기도 했다. 어느 쪽이 진심인지는 세스 자신도 모르지 않을까.
나는 그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멈칫한 세스가 고개를 숙여 주었다. 뺨에 닿자마자 부드럽게 밀려드는 감정에 살짝 웃음이 나왔다.
가두긴 뭘 가둬 내가 상처받을까 봐 이렇게 조심하는 주제에.
세스가 초조한 얼굴로 물었다.
“내가 무섭지 않아?"
“전혀요. 절 해치지 않으실 거잖아요.”
배시시 웃는 나를 본 세스가 한숨을 쉬었다.
"당신을 어쩌면 좋을까.”
한탄하듯 중얼거린 그가 나를 안아 올렸다. 나는 그의 목을 꼭 끌어안고 속삭였다.
"공작님, 저한테 친구가 아무리 많이 생겨도 제일 중요한 사람은 공작님이에요. 제일 좋아하는 사람도 공작님이고요.”
“······응.”
속닥속닥 말하자 굳어 있던 세스의 얼굴이 스르르 풀어졌다 좋아, 잘 먹힌 것 같다.
만족하며 고개를 돌린 나는 낯익은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예전에 나와 같이 노예 상인을 두들겨 팼던 아련한 추억 속의 선배님이었다.
어색하게 고개를 돌린 선배님이 흠흠 헛기침을 했다.
으악, 들었나 봐. 어떡해!
갑자기 엄청나게 창피해진 나는 세스의 어깨에 이마를 푹 파묻었다. 서늘한 옷감이 닿자 뺨에 열이 올랐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행히 세스는 마차에 오를 때까지 나를 떼어놓지 않았다.
나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공작님?"
조금 전까지 몸을 감싸고 있던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싸늘한 냉기와 역겨운 곰팡이 냄새가 났다. 내겐 너무나 익숙한 냄새였다. 어느새 나는 지하실로 돌아와 있었다.
‘뭐지, 꿈?'
꿈이라기엔 너무 생생했다. 떨리는 손으로 뺨을 꼬집자 아픔이 느껴졌다.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몇 번 더 뺨을 꼬집어 봤지만 아프기만 할 뿐이었다.
'진짜라고? 그럼 지금까지의 일들이 전부 꿈이었던 거야?'
나는 기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갈라진 벽을 짚으며 정확히 세 걸음을 내딛자 반대편 벽에 몸이 닿았다. 더듬거리며 손을 위로 뻗으니 거슬거슬 녹이 슨 창살이 만져졌다.
환기를 위해 뚫려 있는 아주 작은 창. 그곳이 내가 세상을 볼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나는 창살에 매달려 밖을 내다봤다. 어두컴컴한 밤하늘에 달이 박혀 있었다. 아름다운 달빛이 창살에 매 달린 나를 비웃는 것 같았다.
너는 영원히 이곳에 갇혀 있을 거라고. 누구도 너를 구해 줄 수 없다고.
"······아.”
정말로 꿈이었구나. 누군가에게 구해지고, 소중하게 보호받고,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게 전 부 꿈이 라서 가능했던 거였다.
“그래 , 그런 일이 있을 리가 없잖아.”
발밑이 푹 꺼지는 것 같았다. 아니, 바닥이 와르르 무너지고 있었다. 창살을 붙잡고 버티려고 했지만 몸이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이비!
그때, 단단한 팔이 추락하는 나를 붙들었다. 다음 순간 나는 번쩍 눈을 떴다.
”······공작님?"
하얗게 질린 세스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머리 뒤로 마차의 천장이 보였다.
“정신이 들어?"
“네?"
“아픈 곳은?"
“괘, 괜찮아요.”
나는 어리둥절한 채로 대답했다. 그러자 세스가 나를 꽉 껴안았다. 단단한 팔이 가늘게 떨리고 있어서 기분이 좀 이상했다.
혹시 이것도 꿈인가? 뺨을 꼬집으려는 내 손을 세스가 가로막았다. 그는 전에 없이 딱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 하는 거지?"
“어, 꿈인 것 같아서 확인하려고요?"
내 대답에 세스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그는 마차의 문을 두드린 후에 밖을 향해 말했다.
“한 병 더 가져와, 빨리!"
잠시 후 창문을 통해 유리병 하나가 들어왔다. 급하게 뚜껑을 딴 세스가 병을 내 입가에 대 주었다.
“어서 마셔.”
별생각 없이 한 모금 마신 나는 인상을 썼다. 병에 든 것은 물이 아니라 단맛과 짠맛이 이상하게 섞인 액체였다. 너무 맛이 없어서 이게 꿈이라면 바로 캘 것 같았다.
"공작님, 저 이거 안 먹으면 안 돼요?“
“안 돼 마셔야 해.”
세스는 단호하게 병을 들이댔다. 불쌍한 척해 봤지만 전혀 통하지 않았다. 결국 나는 한 병을 억지로 다 마셔야했다. 입을 틀어막고 몸서리를 치는 내 등을 세스가 위로하듯 토닥거렸다.
“우으으, 이거 진짜 뭐예요?"
“성수.”
성수? 그거 먹어도 되는 거 맞아?
의심스러워하는 나를 토닥인 세스가 속삭였다.
“아무리 불러도 눈을 안 떠서 놀랐어.”
“네? 제가요?"
나는 어리동절해서 물었다. 세스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기억을 더듬었다. 세스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다가 꾸벅꾸벅 졸았던 게 생각났다. 세스가 나를 끌어당겨 더 편하게 기댈 수 있게 해 줬던 것 같다. 그 뒤에는…….
"꿈을 꿨어요.”
"꿈?"
“지하실에 갇혀 있는 꿈이요. 가끔 어두운 곳에서 눈을 뜨면 여기가 어딘지 헷갈릴 때가 있거든요. 내가 예전에 살던 지하실에 있는 건지, 아니면 다른 곳에 있는 건지 그런데 꿈에서 나온 건 처음이네요.”
기억을 더듬으며 말하는데 창문을 가린 커튼이 촤악 젖혀졌다. 갑자기 쏟아져 들어온 빛에 나는 악 소리를 내며 눈을 가렸다.
“미안, 계속 말해 줘.”
팔을 들어 내 얼굴에 그늘을 만든 세스가 속삭였다. 응? 벌써 다 말했는데.
고민하던 나는 지하실이 얼마나 좁고 추웠는지 이야기했다. 배가 고파서 잠들 수가 없었던 겨울밤. 창살에 매달려야 간신히 볼 수 있었던 좁은 하늘과 밤새도록 바라봤던 달. 그리고 그걸 보는 것이 그때의 내게 얼마 나중요했는지도.
묵묵히 내 이야기를 듣던 세스가 말했다.
“힘들었겠군.”
그다운 감상에 나는 작게 웃었다.
사실은 무서웠다. 세스가 내 과거를 별것도 아닌 일로 취급할까 봐. 아니면 너무 무거운 이야기에 부담스러워할까 봐 하지만 세스의 반응은 어느 쪽도 아니었다.
그저 힘들었겠다고 말해 줬다. 특별한 말은 아니었지만 그게 사실이었기에 위로가 되었다.
“왜 웃지?"
세스가 당황한 듯이 물었다. 심각한 분위기에서 헤실헤실 웃는 내가 이해가 안 되는 듯했다.
“그렇게 힘들었는데 지금은 행복하구나 싶어서요.”
과거가 아무리 힘들었어도 나는 지금을 살고 있었다. 그것도 꿈이 라고 생각할 정도로 행복한 순간을.
내 대답에 세스가 입을 꾹 다물었다. 뭔가를 억누르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과거를 바꿀 순 없지만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야. 약속할게.”
"······."
평소처럼 정말 좋은 사장님이라고 감탄해야 하는데. 이재 감금당하는 일은 없겠다고 기뻐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건 절대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내가 세스에게 뭔가를 기대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니까.
가질 수 없는 것에 욕심내지 말기.
나는 대역을 시작한 순간부터 다짐했던 것을 되새기며 주먹을 꽉 쥐었다. 다행히 답답한 기분은 금방 가라앉았다.
"공작님, 저는 정말 공작님께 감사드리고 있어요. 지금 제 행복은 전부 공작님이 주신 거니까요. 그러니까 저한테 뭔가 더 주려고 하지 않으셔도 돼요. 이미 충분해요.”
나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지금까지 쌓인 은혜도 감당이 안 되는데, 더 이상 받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것이 깃털처럼 가볍고 의미 없는 약속이라고 해도 말이다.
나를 뻔히 쳐다보던 세스가 웃었다.
“그런 식으로 도망가면 쫓아가고 싶어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