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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아내로 취업합니다-29화 (29/240)

29화

피오나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소녀들과 기사들을 훑어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다들 이곳이 왕궁임을 잊고 있는 것 같군요.”

모두가 기죽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기사들을 제 자리로 돌려보낸 피오나가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이블린, 이곳에서 그런 저속한 이야기를 해선 안 됩니다. 두 번 다시 입 밖으로 꺼내지 마세요.”

“죄송합니다."

저속한 이야기라고 하니 조금 슬퍼졌지만 얌전히 사죄했다. 다행히 피오나는 더 이상 나를 혼내지 않고 말을 돌렸다.

"좋아요. 이제 자수를 확인할까요. 완성한 사람부터 가져오세요.”

그런데 자수를 완성한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게 문제였다. 나는 머뭇거리며 손수건을 가져가 내밀었다. 피오나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뭘 수놓은 거죠?"

“고양이입니다.”

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카밀라가 킥킥 웃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이런 작은 자수라면 여러 개를 수놓으세요. 그리고 왜 회색 천을 골랐죠?"

“그 색이 저한테 잘 어울릴 거라고 권해 줬습니다.”

피오나는 누가 권했는지 묻지 않았다. 대신 마리아를 반히 쳐다봤을 뿐이다. 움찔한 마리아가 뒤늦게 불쌍한 척했지만 소용없었다.

내 손수건을 받아 든 피오나가 냉정하게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들도 오늘 내로 제출하도록 하세요. 그리고 이블린, 내일까지 ‘올바른 레이디의 규범'을 열 번 필사해 오세요.”

“네?!”

“왕궁에서 저속한 이야기를 한 벌입니다."

"······네.”

첫날부터 반성문을 쓰게 된 나는 매우 우울해졌다. 오늘은 이만 퇴근해도 좋다는 말을 들어도 전혀 기쁘지 않았다.

터덜터덜 걷는 내 옆으로 다가온 다이애나가 위로의 말을 건냈다.

“저도 올바른 레이디의 규범을 써 본 적이 있는데요. 열 번 정도는 금방 다 쓸 수 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정말요?"

“이봐, 해밀턴!"

그때 커다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뒤를 돌아보자 카밀라가 도도한 얼굴로 서 있었다.

“뭐 하고 있어? 빨리 이쪽으로 와.”

카밀라의 뒤로 다른 소녀들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대놓고 편 가르기를 하겠다는 모양새에 다이애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나는 얼른 다이애나의 등을 떠밀었다.

“어서 가 봐요.”

괜히 나랑 같이 있다가 따돌림당할 필요는 없잖아.

살짝 웃어 주자 다이애나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나와 카밀라를 번갈아 쳐다보던 다이애나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죄송해요. 저는 이블린과 같이 가겠습니다."

”뭐?”

깜짝 놀라는 것도 잠시, 카밀라가 이내 표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좋아. 후회하지 마"

몸을 핵 돌린 그녀가 반대쪽으로 걸어갔다. 다른 사람들도 말없이 카밀라의 뒤를 따랐다. 그저 앤만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이애나를 쳐다봤을 뿐이었다.

“지 , 진짜 무서웠어요!"

그들이 사라지자마자 다이애나가 날 붙잡고 바들바들 떨었다. 나는 그녀의 등을 다독이며 물었다.

“그렇게 무서워하면서 왜 제 옆에 남았어요?"

“제가 가면 이블린만 혼자 남잖아요.”

“저 때문에 괴롭힘당할 수도 있는데요?"

“사실 이든 양은 저를 별로 안 좋아해요. 그쪽으로 가도 무시당했을 거예요."

다이애나가 쑥스러워하며 말했다.

이런 의리 있는 아이 같으니. 감동한 나는 그녀의 소매를 꼭 붙잡았다.

“옆에 있어 줘서 고마워요. 다이애나까지 그쪽으로 가 버렸으면 외로웠을 거예요.”

“역시 그렇죠?"

다이애나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우리는 수다를 떨며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밖으로 나가려던 다이애나가 갑자기 기겁하며 내 팔을 잡아당겼다.

“지금 나가면 안 될 것 같아요!"

"네? 왜요?"

“바, 밖에 무서운 사람들이 잔뜩 있어요.”

음, 무서운 사람들이라 왜 누군지 알 것 같지? 나는 안 된다고 말리는 다이애나를 다독이며 밖을 내다봤다. 예상대로 검은 옷을 입은 기시들이 정원을 어두운 분위기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들 한가운데서 서늘한 기운을 뿜어내던 세스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들켰나 봐요 . 어떡해요.”

다이애나가 나를 꽉 붙잡고 소곤거렸다. 나는 뭐라고 설명할지 고민하다가 그냥 세스에게 손을 흔들었다.

“공작님!"

그러자 세스가 내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눈이 동그래진 다이애나가 나를 놓아주었다. 나는 사랑받는 약혼녀답게 쪼르르 달려가 세스의 품에 폭 안겼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아니.”

아닌데. 코트가 차가운데.

걱정스럽게 올려다보니 똑같은 눈으로 나를 살피던 세스가 물었다.

"괴롭히는 사람은?“

“네? 아뇨. 다들 친절했어요.”

괴롭히려고 시도한 사람은 있었지만 성공한 사람은 없었지. 부듯한 미소를 짓자 세스가 마주 웃었다

“다행이군. 이제 갈까?"

“앗, 잠깐만요. 제 친구를 소개해 드릴게요.”

"친구?"

“오늘 새 친구를 사귀었거든요.”

나는 세스의 품에서 벗어나 다이애나를 데리러 갔다. 입구 쪽 벽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다이애나가 겁먹은 햄스터 같은 눈으로 나를 봤다.

“다이애나. 저희 집 공작님을 소개시켜 드려도 될까요?"

“네? 저한테요?"

다이애나가 심장마비에 걸릴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나는 어색하게 뺨을 긁적였다.

“강요하는 건 아니에요. 다이애나에게 제 약혼자를 소개해 주고 싶었어요. 곤란하다면 못 들은 걸로 해 주세요.”

"야 아뇨. 이블린의 약혼자시면 제, 제가 인사를 드려야죠.“

다이애나는 휘청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나는 이렇게 무서워할 일인가 생각하면서도 그녀를 부축했다.

세스는 약간 곤란해하는 눈으로 우리를 보고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어깨를 움츠린 다이애나가 바들바들 떨었다.

나는 저도 모르게 세스를 확인했다. 에어컨 꺼져 있는데?

그냥 빨리 소개를 끝내자고 결심한 나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공작님, 제 친구인 다이애나 해밀턴 양이에요. 다이애나, 제 약혼자이신 세스 엘마이어 공작님이세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해밀턴 양.”

세스가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러자 새파랗게 질린 다이애나가 딸꾹질을 했다.

"처, 처음 뵙겠습니다. 힉!"

“예, 아내를 잘 부탁드립니다.”

“네?! 네? 네······.”

왠지 대화가 가능한 상황이 아닌 것 같았다. 세스도 그걸 느꼈는지 내게 물었다.

“친구와 함께 마차에 탈래?"

"네. 그래야 할 것 같아요.”

“아, 아니 저, 저도, 제 마차가 있는데…….”

다이애나가 당장 여기에서 탈출하고 싶다는 얼굴로 더듬거렸다. 나는 그런 그녀를 다독이며 마차로 끌고 갔다.

“그럼 다이애나의 마차가 있는 곳까지만 타고 가요. 혼자 걸어가면 심심하잖아요.”

“아, 안 그러셔도 괜찮은데.”

다이애나는 반쯤 울먹이며 마차에 탔다. 나를 번쩍 안아 마차에 태운 세스가 문을 닫아 주었다 . 우리 둘만 남자 다이애나도 서서히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것 같았다.

“어, 어떡하죠. 공작 전하께 너무 실례되는 행동을 해 버렸어요.”

“괜찮아요. 공작님은 별로 신경 쓰지 않으실 거예요.”

분명 세스도 난감한 얼굴이었지만, 그건 발라당 뒤집힌 햄스터를 보고 당황하는 것에 가까웠다. 확신에 찬 내 대답에 조금 머뭇거리던 다이애나가 물었다.

“이블린은 공작 전하가 무섭지 않아요?"

"음, 전혀요. 사실 굉장히 다정한 분이거든요.”

좀 무서울 때도 있지만 안 그런 척해 두자. 내 대답에 다이애나가 감탄했다.

“정말 대단해요. 저는 전하를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무서웠거든요.”

우리 집 공작님은 안 무는데. 떨떠름한 내 기색을 느꼈는지 다이애나가 서둘러 변명했다.

“전하께선 전쟁 영웅이시잖아요. 그래선지 보통 사람하곤 분위기가 좀 다르시더라고요. 가까이 갈수록 머리가 꽉 눌리는 기분이랄까.”

"아. 맞아요. 위압감이 있으시죠.”

“그리고 눈이 마주치는 순간 목덜미에 칼날 같은 게 스윽 닿는 느낌이었어요. 진짜 죽는 줄 알았어요.”

부르르 몸을 떤 다이애나가 제 어깨를 감쌌다. 뭐지. 공포 특급인가? 어리둥절해하는 나를 보고 다이애나가 놀란 듯이 말했다.

“이블린은 그런 걸 못 느끼는 거군요.”

“음, 제가 좀 둔한 모양이에요.”

“다행이에요. 억지로 무섭지 않은 척하는 건 아닐까 걱정했거든요.”

다이애나가 안심한 얼굴로 웃었다. 나는 그녀가 진심으로 세스를 두려워한다는 것을 깨닫고 기분이 좀 묘해졌다. 내 시선을 느낀 다이애나가 어색하게 말했다.

"저 좀 한심하죠. 별것도 아닌 일에 이렇게 놀라고 호들갑을 떨고.”

“아뇨. 전 다이애나가 아주 다정하고 용감한 사람이 라고 생각해요.”

"네? 제, 제가요?"

“모두가 싫어하는 저한테 먼저 말을 걸어 줬잖아요. 절대 쉬운 일이 아닌 거 알고 있어요.”

내 말에 다이애나의 두뺨이 빨개졌다. 어쩔 줄 몰라 하며 손을 꼼지락거리던 그녀가 겨우 용기를 낸 것처럼 입을 열었다.

“저, 사실 이블린을 만났을 때 정말 놀랐어요. 저라면 분명 어쩔 줄 몰라 했을 상황도 아무렇지도 않게 넘겨 버려서 머, 멋지다고 생각했어요!"

“정말요? 좋게 봐줘서 고마워요.”

“그때부터 친해지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이블린이 약혼자에게 저를 친구라고 소개해 줘서 기뻤어요. 저, 전, 정말 이블린과 친구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다이애나의 꽉 움켜쥔 손이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나는 작게 웃었다.

“전 우리가 이미 친구라고 생각하는데요. 아니에요?“

다이애나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녀는 내 손을 꼭 붙잡고 정말 기쁘다고 몇 번이고 말했다. 맞닿은 손으로 부터 탄산수처럼 팡팡 튀는 감정이 전해졌다. 약간 간지러웠지만 아프지는 않았다.

‘이런 식으로 확인해서 정말 미안해요.’

나는 일부러 다이애나의 손을 피하지 않았다. 그녀가 진심인지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만약 다이애나가 악의를 갖고 내게 접근했다면 손을 대자마자 새카만 것들이 달라붙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이애나의 감정은 깨끗했다. 그녀는 순수하게 나와 친해지고 싶었을 뿐이다.

‘확인해야 했어 딴마음을 품은 사람을 옆에 둘 순 없으니까.’

스스로에게 변명했지만 환하게 웃는 다이애나를 보자 절로 마음이 무거워졌다.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앞으로 정말 좋은 친구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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