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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아내로 취업합니다-28화 (28/240)

28화

"저기, 하인즈 양? 뭘 그리시는 건가요?"

옆에서 구경하던 다이애나가 무슨 일인지 안절부절 못하며 물었다. 나는 완성된 그림을 그녀에게 보여 줬다.

“그냥 이블린이라고 부르세요. 이건 고양이예요.”

"풋, 미쳤나 봐 어린애도 아니고 그게 무슨 어설픈 그림이람?“

빨강 머리 카밀라가 대놓고 비웃었다. 그녀는 자신의 수들을 앞으로 내밀며 깔보는 시선으로 나를 봤다.

"동물을 수놓으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

카밀라의 손수건엔 파랑새 한 마리가 완벽한 실사체로 수놓아져 있었다.

미친 새인지 장미 가시에 가슴을 박고 있었는데, 거기서 흘러나온 피로 하얀 장미가 붉게 물드는 중이었다. 새의 까만 눈동자가 유독 번들거려서 더 무서워 보였다.

‘저걸 남에게 줄 생각인가.'

흐린 눈으로 쳐다보는 나를 단단히 오해한 카밀라가 턱을 치켜들었다.

“지금이라도 포기하지 그래? 형편없는 자수로 다른 사람까지 망신시키지 말고.”

“아, 고마워요. 저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영혼 없이 대답한 나는 수틀에 천을 끼웠다. 카밀라는 코웃음을 쳤지만 더 이상 입을 열진 않았다. 대신 다이애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저기 제가 그림을 조금 손봐 드릴까요?"

정말 걱정하는 얼굴에 나는 내 그림을 다시 확인했다. 고양이를 단순하게 표현한 아주 평범한 그림이었다.

‘어, 설마 여긴 캐릭터풍 그림이 없는 건가? 전부 실사체인 거야?'

어쩐지 내가 그림을 그릴 때마다 시녀장이 아주 미묘한 얼굴을 하더라니.

잠시 고민하던 나는 바늘을 집어 들었다. 얼마나 귀여운지 내가 만들어서 보여 주지, 뭐.

“고마워요, 해밀턴 양. 그런데 전 이렇게 단순한 그림을 좋아해서요.”

“저, 저도 다이애나라고 불러 주세요.”

"네, 다이애나."

순순히 불러 주자 다이애나는 혼자 얼굴이 빨개져서 좋아했다. 그러다 내 그림을 보고 다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다람쥐를 닮아서인지 행동 하나하나가 귀여운 소녀였다.

나는 빨리 끝내 버리자는 생각으로 바늘에 집중했다.

고양이 크기가 내 손가락 두 마디 정도라 얼마 걸리지 않았다. 연회색 설로 고양이 털을 수놓고, 하얀 실로 양말을 강조하고, 검은 실로 동그란 눈과 새침한 입을 만들자 꽤 그럴듯해 보였다. 마지막으로 고양이의 분홍 똥꼬를 X자로 새겨 넣었다

세상에서 제일 하찮고 게을러 보이는 고양이가 완성 됐다.

"귀, 귀여워!"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다이애나가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자수를 보고 있었다.

"진짜 진짜 귀여워요. 처음엔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보다 보니까 너무 귀여워요 . 저도 가지고 싶어요.“

“어, 고마워요.”

너무 과도한 칭찬에 민망해질 정도였다. 홀린 듯이 고양이룰 보던 다이애나가 내 소매를 붙잡고 말했다.

“이거 아무도 안 가져가면 제가 가져가도 되나요? 네?"

“······아무도 안 가져가면 제가 너무 슬플 것 같은데요.”

그런 불길한 소리는 제발 하지 말아 줘.

“그게 뭐가 귀엽다고. 유치하긴.”

맞은편의 카밀라가 요란하게 코웃음을 쳤다.

그래. 내 고양이엔 피와 죽음이 없어서 네 마음에 안 들겠지.

나는 안쓰러움을 듬뿍 담아 그녀를 쳐다봤다. 내 시선을 느낀 카밀라가 발칵 화를 냈다.

“뭐야, 왜 그런 눈으로 나를 보는 거야?"

“세상 살기 힘드실 것 같아서…….”

“뭐? 뭐?!”

취향이란 게 뭔지 한숨을 쉬며 고개를 흔들자 카밀라의 얼굴이 머리 색처럼 빨개졌다.

“너, 네가 감히 날 모욕해?”

“네? 제가 언제요? 그보다 서두르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전 이미 다 했는데.”

보란 듯이 손수건을 눈짓하자 카밀라가 으득 이를 갈았다.

"두고 봐. 네가 만든 조잡한 손수건 따위 아무도 선택하지 않을 테니까.”

“아, 예.”

콧김을 씩씩 뿜던 카밀라가 입을 앙다물고 다시 수를 놓기 시작했다.

여유가 생긴 나는 다른 사람들도 훑어봤다.

카밀라 옆에 앉은 마리아는 세상 슬픈 얼굴로 수를 놓고 있었다. 억울한 일이 있었다고 동네방네 광고하는 분위기였다 시녀장이 올 때까지 저러고 있을 생각인 것 같았다.

‘세상 참 피곤하게 산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며 시선을 돌렸다.

앤은 피로에 찌든 직장인 같은 얼굴이었고, 벨라는 불안하게 눈을 굴리고 있었다. 둘 다 쉽게 마음을 열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다이애나에게 말을 걸었다.

“다이애나, 원래 수놓을 때는 아무 말도 안 하나요?"

"예? 아, 아뇨. 원래는 이런저런 재미있는 이야기도 하는데........"

말끝을 흐린 다이애나가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봤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고개를 갸웃했다.

“오늘은 재미있는 이야기가 없나 봐요?"

“그게······."

그때, 카밀라가 툭 끼어들었다.

“이봐, 듣고 싶으면 너부터 해. 은근슬쩍 염탐하려 하지 말고.”

잔뜩 날이 선 눈이 경계하는 살쾡이 같았다.

뭐, 그렇게 나와 주면 나야 고맙지.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염탐이라뇨. 전 그저 제가 알고 있는 이야기를 이든 양도 알고 있는지 궁금했을 뿐인데요?"

“뭐?"

“흐음-하긴, 이든 양은 너무 어려서 아직 못 들었을 수도 있겠네요.”

그럴 만하다는 표정으로 훑어봐 주자 카밀라가 발끈했다.

“나 너랑 같은 나이거든?!"

“그래요? 그럼 이든 양도 들으셨겠네요. 부인 이야기.”

내가 큰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으스대자 카밀라가 멈칫했다. 바쁘게 굴러가는 눈동자가 J부인이 누구인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고민하지 마라 내가 방금 지어낸 거니까.

“저, 저기. J부인이 누구인가요?"

자존심 때문에 끙끙 앓는 카밀라와 달리 다이애나는 솔직하게 물어 왔다. 나는 깜짝 놀란 척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이애나도 몰라요?"

”······네.”

“그런 사람이 진짜 있기는 해요?"

마리아가 슬픈 척하는 것도 잊었는지 차갑게 말을 던졌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 모르시는 것도 이해는 돼요. 이건 저희 나이대가 알기엔 좀 위험한 이야기니까.”

너희는 아직 어려서 모르지만 나는 다 알고 있어. 그런 뜻으로 웃어 주자 소녀들이 저마다 발끈하는 표정을 지었다.

마리아가 거의 따지듯이 물었다.

“그래서 대체 뭐 하는 사람인데요?”

"J부인은 말이죠.”

나는 손짓으로 소녀들을 가까이 불러 모은 후 속삭였다.

“젊은 시절에 잃어버린 친딸을 자기가 키운 의붓아들과 결혼시킨 사람이랍니다. 딸을 자기 며느리로 들인 거죠.”

내가 너희에게 K-막장 드라마의 참맛을 알려 주마.

“헉!”

“세상에!”

“어쩌다 그렇게 된 거야?”

경악하는 소녀들의 얼굴에선 거부할 수 없는 막장에 대한 호기심이 보였다. 핫하, 낚였구나!

“저도 전해들은 거라 자세히는 모르는데 일이 어떻게 된 거냐면…….”

나는 파닥거리는 물고기들을 다독이며 천천히 이야기 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결국 친부도 알게 된 거죠. J부인의 며느리가 자신의 딸이라는 것을요.”

나는 이야기의 클라이맥스로 나아가기 위해 목소리에 힘을 줬다.

순간 바짝 마른 목에서 콜록 기침이 튀어나왔다. 카밀라가 즉시 빈 잔에 차를 따라 내 앞에 쓱 밀어 줬다. 나는 눈짓으로 감사를 표한 후 허겁지겁 차를 마셨다.

전혀 우아하지 못한 동작이었지만 아무도 나를 탓하지 않았다. 오히려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이야기를 이어 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크, 이것이 K-막장의 중독성이지.

“그래서요? 그 뒤는 어떻게 됩니까?"

굵직한 목소리에 놀라 돌아보자 기사 둘이 내 뒤에 서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아니, 너희는 언제 왔어? 그보다 지금 산성한 근무시간 아니야?

황당한 얼굴로 기사들을 쳐다보던 나는 재촉하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흠흠, 친부는 기절할 것처럼 놀랐어요. 당연하죠. 있는지도 몰랐던 친딸이 자기 엄마의 며느리가 되어서 살고 있잖아요. 친부는 J부인을 비난하며 딸에게 모든 사실을 밝혀 버리겠다고 협박했죠.”

“어떡해.”

다이애나가 옆에 앉은 앤의 팔을 쥐어뜯었다. 나는 좀 더 목소리를 높였다.

"J부인은 그런 짓을 하면 자긴 죽어 버릴 거라고 했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어요. 결국 J부인은 딸의 친부에게 감춰 왔던 일들을 털어놨죠. 젊은 시절 가문의 반대로 그들이 강제로 헤어져야 했던 것과, 그로 인한 충격으로 기억을 잃었던 걸 밝힌 것이죠.”

벨라가 작게 훌쩍거리는 소리를 냈다. 의외로 슬픈 로맨스를 좋아하는 모양이다.

"친부는 자신의 어머니가 그런 못된 짓을 했다는 사실에 놀라죠. 그리고 J부인에 대한 미안함과 딸을 보호 하려는 마음으로 결단을 내려요. 바로 J부인과 재혼을 하겠다고요.”

“아니, 그럼 문제가 더 심각해지잖아. 친부가 시아버지가 되는 거 아냐?”

카밀라가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이 끼어들었다. 다른 소녀들도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바로 그거라는 듯이 테이블을 탁 때렸다.

“그렇죠! 하지만 친부는 비밀이 밝혀지기 전에 J부인과 딸을 데려오고 싶었던 거예요. 그런데 이 계획을 J부인의 시어머니가 그만 눈치채서······.”

“이블린, 지금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가요?"

날카로운 목소리가 내 말을 끊었다. 나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언제 왔는지 피오나가 굳은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났다.

“시, 시녀장님!"

다른 사람들도 우르르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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