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아이고. 여기까지 오는 길도 겨우 기억했는데.
속으로 한숨을 내쉰 나는 얼른 피오나의 뒤를 쫓아갔다. 다행히 피오나의 걸음은 그리 멀지 않은 방 앞에서 멈췄다.
”의상부 소속의 시녀들은 일올 끝낸 후에 이곳에서 대기합니다. 여기 있는 동안엔 잡무를 보거나 자수를 놓습니다."
“네? 자수요?"
“주로 왕실 기사들을 위한 손수건을 만들죠.”
거참, 돈도 많으면서 손수건 정도는 사서 쓰지. 투덜거리는 나를 향해 빙긋 웃은 피오나가 문을 열었다.
“그럼 들어갈까요. 다들 모여 있을 테니 소개하기도 좋겠군요.”
앗, 난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데! 하지만 머뭇거릴 틈도 없이 피오나가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방 안은 넓은 휴게실 같은 느낌이었다. 벽에 걸린 거대한 태피스트리 앞에 두 명의 왕실 기사가 서 있었다.
허리에 검을 달고 꼿꼿이 선 모습이 꽤 의젓해 보였지만 어린 티가 풀풀 났다. 기껏해야 16살이나, 많아도 18살 정도 되었을 것 같았다.
피오나를 본 기시들이 짧게 예를 표했다 가벼운 눈인사로 답한 피오나가 그들을 지나쳐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기사들의 시선이 슬그머니 내게 달라붙었다.
‘꼭 신기한 코알라 보듯이 쳐다보네.’
질 수 없다는 기분이 된 나는 똑같이 기사들을 위아래로 훑어봐 주었다. 3초 만에 얼굴이 벌게진 기시들이 눈을 피했다.
흥, 별것도 아닌게 까불고 있어.
의기양양해진 나는 기사들을 지나쳤다. 어쩐지 한숨을 쉴 것 같은 얼굴로 나를 쳐다보던 피오나가 손짓했다.
“빨리 이쪽으로 오세요.”
”네!”
나는 쪼르르 뛰어가 피오나의 옆에 섰다.
피오나의 맞은편에 다섯 명의 소녀가 서 있었다. 키가 큰 붉은 머리와 천사 같은 금발은 나와 나이가 비슷할 것 같았고, 나머지 셋은 확실하게 어렸다.
허리를 꼿꼿이 세운 자세만 봐도 좋은 집안에서 엄격하게 교육을 받은 티가 났다 낙하산인 내가 조금 미안해질 정도였다.
“이쪽은 앞으로 여러분과 함께 일할 이블린 하인즈 입니다. 폐하의 명령으로 중급 시녀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동료이니 결코 불미스러운 일은 없도록 하세요.”
피오나의 말이 끝나자마자 따가운 시선이 몸에 파파 박 꽂혔다. 갑자기 돌변한 소녀들의 눈빛에 내가 왕궁에 들어왔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그것참 짜릿짜릿하네. 전기 구이가 되겠어.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생글생글 웃었다. 그러자 나를 탐색하던 소녀들의 시선에도 변화 가생겼다.
제일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천사 같은 금발 소녀였다.
“안녕하세요, 저는 마리아 프림로즈예요. 프림로즈 후작가의 장녀죠. 마리아라고 불러 주세요.”
온화하게 웃는 얼굴이 그림으로 그린 듯했다. 이어서 붉은 머리 소녀가 차갑게 내뱉었다.
"카밀라 이든.“
“카밀라는 이든 백작가의 차녀에요. 저희 둘 다 중급 시녀죠.”
마리아가 상냥하게 덧붙였다. 나도 그에 지지 않을 만큼 환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만나서 반가워요. 두 분.”
나머지 세 사람은 하급 시녀로 앤과 다이애나, 벨라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셋 다 갈색 머리에 비슷한 외모라 좀 헷갈렸다. 나는 그들의 이름과 얼굴을 기억해 두려고 애썼다.
우리의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피오나가 말했다.
“이블린, 다른 사람들과 함께 손수건에 수를 놓도록 하세요. 마리아, 이블린이 천과 자수 실을 고르는 것을 도와줘요.”
“예, 시녀장님.”
마리아는 단 한 점의 귀찮음도 보이지 않고 웃었다. 기특해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피오나가 나중에 다시 오겠다며 밖으로 나섰다.
“천과 실은 이쪽에 있어요.”
마리아가 먼저 벽장 쪽으로 움직이며 설명했다. 여기까지 보면 정말 성격 좋고 착한 애인데, 이상하게 느낌이 별로였다. 이유가 뭘까 고민하던 나는 벽장문이 열리는 순간 멈칫했다.
“어머,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곤란한 듯 뺨에 손을 댄 마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벽장 안에 있는 천은 검은색과 회색뿐이었다. 자수 실은 검정색, 회색, 흰색만 들어 있었다. 무슨 초상집도 아니고, 이런 색만 남아 있는 것도 신기했다.
“담당 하녀가 천과 실을 보충하는 걸 잊었나 봐요. 그래도 하인즈 양에게 딱 어울리는 색만 남아 있네요. 다행이죠?"
마리아가 천사처럼 웃었다.
아하, 너 속이 꽤 까만 애구나?
내가 웃으며 대답하지 않자 마리아가 난처한 척하며 물었다
"설마 마음에 안 드세요? 여기 있는 천과 실은 전부 최고급품인데.”
요게 누굴 까다로운 사람으로 몰려고 들어?
“그럴 리가요. 저도 다른 분들처럼 흰색 천에 수를 놓고 싶은 것뿐이에요. 저 혼자만 너무 튀는 건 좋지 않잖아요?"
어깨를 으쓱하며 받아치자 마리아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어쩌죠. 지금 당장 새로운 천이나 실을 구하기는 힘들 것 같은데 아, 그래도 걱정하지 마세요. 시녀장님께는 흰색 천이 없어서 수를 놓지 못했다고 말씀드릴게요. 첫날이니 분명 이해해 주실 거예요.”
여기서 고개를 끄덕였다간 내가 첫날부터 파업했다고 온갖 소문이 다 돌 거다.
"더 좋은 방법은 없을까요? 다른 분들의 천이나 실을 빌려도 될 것 같은데.”
나는 뺨에 손을 대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내가 자기를 흉내 내고 있다는 걸 눈치챘는지 마리아의 눈이 험악해졌다.
“어머, 그건 곤란해요. 저희도 딱 필요한 만큼만 갖고 있거든요."
“흐음.”
나는 열심히 변명하는 마리아를 내버려 둔 채 다른 소녀들 쪽으로 걸어갔다.
빨강 머리 카밀라는 나를 노려봤고, 다이애나와 앤은 시선을 피했다. 마지막으로 벨라는 자수에만 코를 박고 있었다.
좋아, 대충 적과 내 편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겠다.
나는 일부러 테이블 주변을 한바퀴 빙 돈후에 말했다.
“마리아, 당신이 갖고 있는 분홍색 실이 마음에 들어요. 딱 이만큼만 저한테 주지 않을래요?"
나는 양손을 펴서 적당한 길이를 만들어 보였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빨강 머리 카밀라가 회를 냈다.
“이봐, 마리아 말 못 들었어? 여분이 없다고 하잖아!"
어라, 대놓고 반말인가? 뭐, 상관없지만.
나는 십 년을 써도 다 못 쓸 거 같은 분홍색 실 뭉치를 힐끗 쳐다보고 생굴생굴 웃었다.
“그래요? 그럼 시녀장님께는 친절한 마리아가 실 한 가닥도 빌려 주길 싫어해서 수를 놓지 못했다고 말씀 드릴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분명 이해해 주실 거예요.”
“뭐?”
카밀라가 눈을 부릅뜨고 나를 노려봤다. 그녀가 폭발하기 전에 안색이 창백해진 마리아가 끼어들었다.
“드릴게요. 그렇게까지 제 것을 빼앗고 싶어 하시니 어쩔 수 없네요. 가져가세요.”
”와, 빌려주신다고요? 고마워요. 마리아는 정말 친절하네요.”
나는 눈치없는 사람처럼 굴며 분홍색 실을 조금 가져왔다.
카밀라가 이를 갈며 나를 노려봤다. 마리아는 그녀를 말리는 척하며 은근히 나를 비웃었다. 분홍색 실 한 가닥으로는 아무것도 못 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천을 고르는 것에 집중했다.
“어디 보자- 어느 천이- 제일- 예쁘려나-”
잠시 고민하던 나는 회색 천을 골랐다. 색만 좀 칙칙 할 뿐, 손수건에 딱 맞는 크기로 잘라 끝부분까지 꼼꼼 하게 마감한 좋은 천이었다. 실과 나머지 도구까지 챙 긴 후 적당한 자리에 구겨 앉았다.
‘되도록 작게 수놓자. 모서리에 쪼그맣게 해야지.’
다른 사람들은 손수건 전체에 커다란 자수를 했지만 나는 그럴 생각이 요만큼도 없었다.
팔 것도 아니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주는 것도 아니고, 왜 그런 정성을 쏟아야 하지?
“저, 저기! 이거 쓰실래요?!"
그때 연필 모양의 초크가 불쑥 내밀어졌다. 갈색 머리에 다람쥐처럼 생긴 소녀가 온갖 용기를 쥐어짜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처, 천에 도안을 그려야 하는데, 자수용 펜이 없으신 것 같아서 저, 저는 다 썼으니까 필요하시다면 쓰세요.”
“아, 정말 고마워요. 마침 필요했는데.”
나는 반가워하며 초크를 받았다. 내 반응에 안심한 소녀가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이름이 아마 다이애나였지? 왕따에게도 말을 걸어 줄 만큼 착한아이였다.
나는 그녀에게 웃어 준 후 천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 했다 사실 천을 고를 때부터 뭘 그릴지 결정해 놓았다.
‘괜히 멋진 걸 하면 망한다. 어설픔까지 의도된 것 같은 귀여움으로 승부를 낸다!'
사실 내 자수 솜씨는 썩 뛰어나지 않았다. 시녀장이 억지로 가르쳐서 기본만 하는 정도였다.
대신 그림에는 꽤 자신이 있었다. 전생에서 만화 좀 그리겠다고 설친 결과였다.
‘제일 무난한 건 역시 강아지, 아니면 고양이지.'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것은 강아지였다. 하지만 근사한 손수건 대신 내 것을 선택하게 만들려면 코어 팬이 많은 고양이가 나았다. 그래서 나는 옆으로 벌러덩 드러누운 고양이를 그렸다.
네 다리를 제멋대로 뻗고 배를 툭 내민 세상에서 제일 하찮은 포즈였다. 고양이의 분홍색 똥꼬는 마리아가 준 실로 수놓을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