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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아내로 취업합니다-25화 (25/240)

25화

***

왕궁에 입궁하기 위해선 총 세 개의 문을 거쳐야 한다.

우선 가장 바깥에 정문인 ‘지혜의 문’이 있었다.

하급 귀족과 왕궁에서 근무하는 자들은 여기서 마차 에서 내려 걸어갔다.

그리고 광장을 가로지르면 궁의 정면에 긴 회랑이 나오는데, 이것을 명예의 문’이라고 부르며 백작 이하의 귀족들이 마차에서 내려서 걸어갔다.

마지막으로 궁의 내부로 통하는 형광의 문’이 있었다. 이곳까지 마치를 타고 들어갈 수 있는 이는 왕족과 공신들뿐이었다.

시종들은 정문 앞에서 이블린을 기다렸다.

“여기서 내리는 것 맞나? 두 번째 문에서 기다려야 하는 거 아니야?"

“원래 어느 집안 출신인지도 모를 여자 아닌가. 어떻게 두 번째 문에서 내리겠나.”

“하긴, 그것도 그렇지.”

정문 앞에는 평소보다 인파가 많았다. 대부분은 시종들처럼 구경을 나온 사람들이었다. 마차가 설  때마다 연신 기웃기웃하며 낯선 얼굴을 찾고 있었다.

“엇, 저가 공작가의 마차다!"

그때, 누군가의 외침이 시선을 끌어모았다.

멀리서 말을 탄 기사들과 화려한 마차가 다가오고 있었다. 기다리던 사람들이 용성거리며 모여들기 시작 했다.

그러자 가장 앞에서 공작가의 깃발을 들고 있던 기 수가벌칙 화를 냈다.

“감히 누구의 마차를 가로막는 것이냐! 물러서라!"

당장 검을 뽑아 휘두를 것 같은 모습에 사람들이 주춤했다. 정문을 지키던 왕궁 기사들이 황급히 달려왔다.

“멈추십시오! 왕궁 앞에서 싸우는 것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럼 이 주제도 모르는 것들을 당장 물러서게 하시오.”

기수가 성난 얼굴로 말했다. 공작가의 깃발을 가로 막는 것은 공작의 앞을 가로막는 것이나 다름없는 무례였기 때문이다.

기시들은 두말 않고 사람들을 멀리 쫓아냈다. 이윽고 돌아온 왕궁 기사가 식은땀을 뻘뻘 홀리며 입을 열었다.

“대단히 실례했습니다. 어떤 분을 수행 중이신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나의 주군이신 엘마이어 공작 전하께서 약혼녀인 이블린 아가씨를 모시고 입궁하는 중이오. 여기 국왕 폐하께서 아가씨께 내린 칙서가 있으니 확인하시오.”

기수는 몹시 자랑스럽게 양피지를 꺼내 내밀었다. 그는 처음 아가씨를 수행한다는 사실로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너무 흥분해서 공작이 아가씨를 ‘모시고’ 왔다는 말실수를 할 정도였다.

하지만 아무도, 심지어 마차 안에서 듣고 있는 공작도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다.

공손히 양피지를 받아 확인한 왕궁 기사가 동료들에게 손짓했다. 이를 본 기사들은 즉시 정문을 활짝 열었다.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영광의 문까지 바로 통과하실 수 있도록 조치하겠습니다.”

“고맙소."

양피지를 받아 품에 챙겨 넣은 기수가 다시 행렬을 이끌었다 마차는 순식간에 정문을 지났다.

이블린의 얼굴을 평가하려고 기다리던 시종들은 마차가 일으킨 먼지만 잔뜩 들이마셨다.

“쳇, 고작 시녀가 입궁하는데 공작이 따라온단 말인가?"

"얼마나 미인인지 몰라도 아주 건방지고 오만한 여자인 게 틀림없어."

그들은 공작가의 사람들에게 들릴세라 아주 조그맣게 욕을 했다.

* * *

멈추지 않고 내달린 마차는 마지막 영광의 문 앞에 멈춰 섰다.

말에서 내린 기사들이 질서정연하게 늘어섰다. 공작가의 상징과 기사단을 나타내 는 색색의 깃발이 바람에 나부꼈다.

시종들은 마차 앞에 발 받침대를 놓고, 붉은 카펫을 까느라 부지런히 움직였다.

거창한 그들의 행동은 ‘왕이 이블린에게 내린 명령’이 아주 불쾌했다는 항의를 담고 있었다.

먼저 나와 그 꼴을 지켜보던 왕이 재미있다는 듯이 말했다.

“내 시녀 중에 이렇게 요란하게 입궁한 자가 있던가?”

"국왕께서 직접 시녀를 맞이하는 것 역시 전에 없었던 일입니다.”

백합 궁의 시녀장인 피오나가 냉정하게 답했다. 하 지만 왕은 여전히 즐거운 얼굴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모시러 가야할분위기군.”

왕은 주저 없이 계단을 내려가 붉은 카펫을 가로질렀다. 왕이 다가가자 정중히 예를 표한 시종이 마차의 문을 열었다.

이블린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기대하던 왕은 멈칫했다. 어두운 마차 안에선 공작의 어깨에 기댄 이블린이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베개가 된 공작이 손가락 하나를 입 앞에 세웠다.

반사적으로 입을 다문 왕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대로 있다간 이블린이 깨어날 때까지 꼼짝없이 서 있어야 할 판이었다. 왕은 즉각 소리쳤다.

”이블린!”

”흐악!“

잠든 이블린이 펄쩍 뛰며 깨어났다. 왕은 일부러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당장 마차에서 내려라.”

“헉! 네!"

놀란 이블린은 곧바로 마차에서 뛰어내리려 했다. 그런 그녀를 붙잡은 공작이 아주 불손한 눈으로 왕을 쳐다봤다.

“지금 내릴 테니 비켜 주십시오.”

이블린이 허둥거리는 모습을 좀 더 보고 싶었던 왕 은 입을 삐죽이며 비켜섰다.

잠시 후, 이블린을 품에 감싼 공작이 마차에서 내렸다. 대기 중이던 공작가의 시녀장이 이블린을 받아 안았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옷부터 정돈하셔야지요.”

“어, 하지만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신데…….”

"단정치 못한 차림으로 폐하 앞에 나서는 게 더 실례 입니다."

시녀장은 옷솔까지 꺼내 들고 이블린의 옷을 정리했다. 다른 시녀들까지 달라붙어 구겨진 곳을 편다며 한 참이나 수선을 피웠다. 손길 하나하나에 ‘우리 아가씨가 이렇게 귀한 분이시거든?!’라는 말이 들리는 듯했다.

왕은 이들이 왜 이러는지 알고 있었다. 공작가의 안 주인이 될 사람을 연무장에서 굴린 것이 너무하다는 항의였다.

귀족 아가씨에게 연무장 열 바퀴를 돌라는 명령은 굉장히 비상식적인 것이었다. 세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일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냥 악질적인 괴롭힘이다. 공작가의 사람들이 발작하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왕의 명령은 이블린에 대한배려였다.

이블린이 달리는 시늉만 하더라도 왕에게 불충하다는 말은 사라질 것이다. 그 뒤에 왕명을 따르지 못했다는 핑계로 시녀로 데려올 생각이었다.

설마 이블린이 열 바퀴를 다 뛰겠다고 덤벼들 줄은, 또 꾸역꾸역 뛰다가 쓰러질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미련한 것. 누가 그렇게 무리를 하라고 했어.'

씁쓸해하던 왕은 문독 깨달았다.

‘잠깐, 연무장 이야기를 처음 꺼낸 사람은 내가 아닌 저놈이잖아?'

왕은 뻔뻔하게 입을 다물고 있는 공작을 노려봤다. 무슨 뜻인지 알면서도 시침을 뚝 떼는 모습이 얄미웠다.

‘저 자식이 그동안 내 목숨 구한 공로만 없었어도······.'

왕은 공작에게 진 빚이 꽤 많았다. 7년 동안 이어진 전쟁에서 목숨을 구원받은 일이 수십 번이었다. 게다가 불운한 과거까지 얽혀 있으니 선을 좀 넘는다고 해도 눈감아 줄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군.’

왕은 공작가의 건방진 태도를 못 본 척 넘기기로 했다.

그때 종종거리며 다가온 이블린이 절을 올렸다.

"국왕 폐하께 이블린 하인즈가 인사 올립니다. 늦어서 대단히 송구하옵니다.”

왕은잠시 고민했다.

‘이 녀석은 왜 이렇게 귀여운 거지?'

평균보다 키가 큰 왕에 비해 이블린은 정말 작았다.

타고나길 그런 건지, 아니면 못 먹고 자랐는지 전체적으로 쪼끄맸다. 살짝 숙인 동그란 머리를 움켜잡으면 한 손에 쏙 들어올 것 같았다.

“폐하.”

피오나의 속삭임에 퍼뜩 정신을 차린 왕이 헛기침을 했다.

"흠흠. 내 궁에 온 것을 환영한다.”

“폐하의 부름을 받아 영광, 또 영광이옵니다.”

이블린이 정중하게 말했다. 분명 예법에 맞는 대답인데 이상하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녀석은 제멋대로 까불까불 떠들 때가 제일 귀여운데.’

한 마리 자유로운 새처럼 재잘거리는 이블린이 좋았던 왕은 무척이나 아쉬웠다. 그래서 조금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여전히 예법이 서툴구나. 듣기 퍽 거북하다.”

"소, 송구하옵니다. 앞으로 더 노력하여…….”

“어색한 짓 하지 말고 평소대로 말하도록 해라. 짐이 너에게만은 궁정 예법을 적용하지 않겠다.”

“네?"

이블린이 깜짝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커다란 눈을 데굴데굴 굴리는 모습이 꼭 토끼 같았다.

”폐하!“

날카로운 공작의 목소리에 왕은 움찔했다. 어느새 앞으로 나간 손이 이블린의 뺨을 꼬집고 있었다.

‘아니 , 이게 왜 여기에 가 있지?'

온몸에 꽂히는 따가운 시선을 느낀 왕은 얼른 손을 댔다. 말랑말랑한 볼의 감촉이 손끝에 선명하게 남았다.

"흠. 어쨌든 앞으로는 편하게 말해라. 짐의 귀가 괴로운 것보단 그게 나올 것 같구나.”

“네에.”

왕이 진심이라는 것을 깨달은 이블린이 배시시 웃었다. 그러자 하얀 뺨에 찍힌 붉은 자국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왕은 좀 민망해졌다.

‘내가 저렇게 세게 꼬집었나?'

공작이 이를 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반면 꼬집힌 당사자인 이블린은 아무 생각도 없어 보였다.

‘아프면 싫은 티라도 낼 것이지. 미련하긴.'

괜히 미안해진 왕은 손을 들어 왕실 서기관을 불렀다.

“왕명으로 이블린 하인즈에게 영광의 문까지 마차를 탈수 있는 권리를 내린다.”

“폐하?"

“폐하, 다시 생각해 주십시오!"

왕실 서기관과 왕을 수행하는 자들이 당황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궁정 예법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으로도 파격 적인 대우인대 이젠 공신만 받을 수 있는 권리까지 안겨 줬다. 전례가 없는 해괴한 일이었다.

‘무슨 애첩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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