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네?"
어리둥절해 하던 나는 뒤늦게 무슨 뜻인지 깨닫고 눈을 부릅떴다.
“그럼 제 편지를…… 읽으신 거예요?"
“아니, 어떤 내용인지 보고받았지만 읽지는 않았어.”
결국 읽은 거나 마찬가지잖아.
시무룩해진 나를 보고 당황한 세스가 달래듯이 말했다.
“앞으로 당신의 편지는 손대지 말라고 해 뒀어.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야.”
엄밀히 말해서 이건 세스의 잘못이 아니었다. 일부러 내 편지를 훔쳐본 것도 아니고, 아래서 보고가 들어 온 것뿐이니까. 꽁해 있는 쪽이 더 이상했다.
“그때 말씀해 주시지 그랬어요.”
“당신이 기분 나빠할 것 같아서 숨기고 싶었어.”
세스가 솔직하게 답했다. 그랬다니 할 말은 없는데 그래도 조금은 얄밉다.
입을 삐죽이던 나는 이상하게 수상쩍던 전령의 태도를 떠올렸다.
“그럼 폐하도 제 편지가 비밀이 아닌 거 알고 계세요?"
"……응.”
“진짜요?”
세스는 묵묵히 고개를 끄떡였다.
으아악. 갑자기 창피함이 밀려온 나는 얼굴을 가리고 몸부림쳤다.
“이비?"
내 이상 행동에 놀란 세스가 나를 번쩍 안아 올렸다. 내가 충격을 받았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연신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사과했다.
“미안, 정말 미안해. 진정해 봐. 옹?"
”으우으, 너무 창피해서 죽을 것 같아요.”
나는 훌쩍거리며 세스의 어깨에 기댔다. 창피함은 창피함이고, 세스가 쓰다듬어 주는 것은 기분 좋았기 때문이다. 전에도 생각했지만 역시 세스를 내 쓰다듬 노예로 임명해야겠다. 더 쓰다듬어라, 노예야.
한참 동안 날 다독이던 그가 속삭였다.
"좀 진정했어?"
“아, 아뇨?"
거짓말인 게 티가 났는지 세스가 웃었다. 괜히 부끄러워진 나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세스는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난 당신이 그런 편지를 쓸 정도로 간절한지 몰랐어. 이미 포기했을 거라 생각했지. 오해해서 미안해.”
중간에 한 번 포기했었던 나는 속으로 찔끔했다.
"편지에 대해 아는 척할 수가 없어서 폐하께서 명령 하시면 그대로 따를 생각이었어. 이런 식으로 당신을 고생시킬 줄 알았다면 결코 가만히 있지는 않았을 거야."
조용한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는 세스의 목을 꼭 껴안고 소곤거렸다.
"저도 죄송해요. 몰래 편지 써서 수작 부린 거랑 또 소중한 물건을 잃어버린 것도요.”
“폐하께 도움을 청한 건 잘못이 아니고, 내게 소중한 물건이라고 당신에게도 같은 의미를 강요할 순 없으니 사과하지 않아도 돼.”
아니, 그렇게 말하면 내가 쓰레기가 되잖아. 나는 고개를 발딱 들고 항의했다.
"저한테도 소중한 물건이거든요?“
누가 들으면 내가 막 배지를 던지고 다닌 줄 알겠다. 기절만 안 했어도 안 잃어버렸거든?
입을 삐쭉 내민 나를 보고 눈을 둥글게 흰 세스가 물었다.
“그럼 이제 소중하게 간직해 줄 거야?"
"네 절대 안 잃어버릴 거예요.“
내가 진짜 더러워서 매일 끼고 다닌다. 투덜대는 순간 이마에 부드러운 것이 닿았다. 깃털속에 푹 파묻힌 것처럼 따뜻한 감정이 온몸을 감쌌다. 압도적인 감각에 멍해졌던 나는 눈을 깜빡였다.
“어?"
지금 세스가…… 나한테 뽀뽀한 건가?
얼떨떨하게 쳐다보자 세스도 나만큼이나 놀란 표정이었다.
“미안, 너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갑자기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세스는 분명 별생각 없었을 텐데. 그냥 귀여운 강아지한테 뽀뽀한 것뿐 인데, 나는 심장이 터질 것 같고 귀 안쪽까지 쿵쾅거렸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마음에 뇌를 거치지 않은 말이 툭 튀어 나갔다.
“제, 제가 좀 귀엽죠?!"
으악, 내가 지금 뭐라고 한 거야.
가출한 정신이 돌아오자 어마어마하게 부끄러워졌다. 나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세스의 어깨에 쿡 처박았다. 그에 세스가 낮게 웃었다
“응, 세상에서 제일 귀여워.”
부끄러우니까 그렇게 웃지 마. 제발.
내가 지금 죽으면 사인은 수치사다.
바들바들 떠는 나를 꼭 끌어안은 세스가 소곤거렸다.
“이비, 이대로 내 방까지 안고 가도 될까?"
기분 탓인지 굉장히 위험하게 들리는 말이었다.
"응? 씻고 같이 식사하고 싶은데, 안 돼?“
음란 마귀 , 내 귀에서 나가. 세스는 그냥 강아지 발 씻기고 밥이나 먹이겠다는 거라고.
정신을 차리려고 혀끝을 꾹 깨문 나는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저, 저 그냥 제 방으로 갈게요.”
심장이 계속 쿵쾅거리는 것을 보면 얼른 돌아가서 정신 통일올 해야 할 것 같았다. 세스가 준 크라바트에 새겨진 강아지 그림은 아주 효과가 좋았다.
“하긴 당신을 데려갔다간 시녀장이 나를 잡아먹을 것 같군.”
세스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나는 시녀장이 괜히 또 질책을 받을까 봐 열심히 변명했다.
“제가 모르는 게 많아서, 걱정이 돼서 그래요.”
시녀장은 냉정한 인상과 다르게 잔걱정이 많은 편이었다. 그녀는 매일 아침 내 머리를 빗겨 주며 신신당부 했다.
“미혼 여성에게 모든 남자는 적입니다. 결혼 전엔 공작님도 믿으시면 안 됩니다. 절대 단둘이 있지 마세요.”
2년 계약직 멍멍이에겐 필요 없는 충고였지만 꼭 엄마 같은 말이라 싫지는 않았다.
"평소에도 잘 챙겨 주시고, 모르는 것도 다 가르쳐 주시고. 나쁜 분이 아닌데…….“
주섬주섬 변명하며 눈치를 보자 세스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도 그녀와 너무 친해 지 진 마. 질투 나니까.”
뜬금없는 말에 풋 웃음이 터졌다. 왠지 새침해 보이는 세스가 진짜 강아지의 애정을 독점하려는 주인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얼른 그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사실 전 공작님이 제일 좋아요.”
간지러웠는지 세스의 어깨가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나는 세스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궁금해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세스의 입술이 내 이마에 닿는 것이 더 빨랐다.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수천 개의 꽃잎이 나를 간질이는 것만 같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느낌인데도 왠지 몸이 자꾸 움츠러들었다. 차오르는 감정이 벅차서 숨이 절로 가빠졌다. 할딱거리는 나를 다시 품에 기대게 한 세스가 물었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아뇨.”
나는 간신히 대답했다. 하지만 눈은 여전히 뜰 수가 없었다.
“안심해 방까지 얌전히 데려다줄 테니까.”
세스가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대답 대신 세스의 옷을 꼭 쥐었다.
내가 편하도록 고쳐 안은 세스가 걷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품에 기댄 채로 이마를 살짝 만지작거렸다. 몸 속 어딘가가 풍선으로 변해서 둥실둥실 떠다니는 것만 같았다.
* * *
태양 궁의 그늘 아래에서 시종들이 한가로이 떠들고 있었다.
"혹시 엘마이어 공작이 데려온 아가씨에 대한 소문 들었나?“
"야 시녀가 되라는 폐하의 명을 거부한 건방진 여자 말인가?“
팔자수염을 멋지게 기른 시종이 아는 척하며 끼어들었다. 그러자 이야기를 꺼낸 자가 쯧쯧 혀를 찼다.
“이 친구 소식이 좀 느리군. 폐하의 명을 거부한 게 그 아가씨가 아니라 공작이라는 것도 모르다니.”
"공작이 폐하의 명을 거부했다고?"
“그래. 폐하께 아가씨를 주기 싫어서 몰래 마차에 태워서 도망을 갔다더군. 왕의 시녀가 되면 결혼도 마음대로 할 수 없잖나.”
시종들은 몹시 놀라면서도 금세 납득했다. 제아무리 충성스러운 남자라도 미녀에겐 별수 없다는 생각 때문 이었다. 물론 쉽게 납득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폐하께서 그냥 두고 보실 리가 없지 않나. 제아무리 아끼는 조카라고 하나 그런 짓을 했는데도 벌을 주지 않는다고?”
팔자수염의 반격에, 먼저 말을 꺼낸 시종이 씩 웃었다.
“그럴 리가. 당연히 벌을 내리셨지.”
“무슨 벌?"
"공작에게 아가씨를 업고 연무장을 돌라고 명하셨다더군.“
“뭐?"
“아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이번엔 팔자수염이 입을 열기도 전에 다른 사람들이 난리였다. 시종은 이를 여유 있게 받아쳤다.
“내가 폐하의 전령인 브렛 경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 일세. 브렛 경이 두 눈으로 아주 똑똑히 목격했다더군."
“그럼 공작이 진짜 여자를 업고 연무장을 돌았단 말이야?"
“정확히 열 바퀴를 돌았다는 증언을 들었네."
“세상에, 살다 보니 별꼴을 다 보는군.”
시종들은 남자 망신이라며 일제히 혀를 찼다. 그때, 남들과는 다른 안목을 뽐내고 싶어 하는 팔자수염이 말했다.
“나는 그런 문제보다 공작의 여자가 대체 얼마만큼 미인인지가 궁금하군.”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시종들도 동조했다.
"공작의 약혼녀였던 클라멘스 백작 부인도 대단한 미녀였지 않나. 누가 더 미인일지 나도 좀 궁금해지는데.”
"브렛 경에게 들은 것 없나? 직접 봤을 것 아닌가.”
“아니, 이유는 모르겠지만 브렛 경은 그녀에 대해 말 하는 것을 꺼렸어.”
증언이 없으니 의견만 팽팽하게 대립했다.
백작 부인을 직접 봤던 자들은 이블린 하인즈가 더 아름다울 수는 없을 거라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백작 부인에게 차가웠던 공작이 이블린에겐 살살 녹는 것을 보면 이블린이 더 미인일 거라는 주장 도만만치 않았다.
계속되는 말다툼에 처음 이야기를 꺼냈던 시종이 결론을 내렸다.
“이러지 말고 직접 보면 되지 않나. 폐하께서 그녀를 시녀로 임명하셨다니 곧 입궁을 하겠지.”
그래서 시종들은 이블린이 입궁하는 날 구경을 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