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으갸악!“
놀란 나머지 이상한 비명이 튀어나왔다. 네빌 경은 안 된다고 파닥거리는 나를 오해하고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
“있을 수 없는 일임에도 아가씨는 기꺼이 폐하의 명에 따르겠다고 하셨습니다. 공작가의 명예를 위해서! 폐하께서 공작가의 충심을 의심하실까 봐! 연약한 몸으로 고통을 감추며 지금껏 힘겹게 버티고 계셨습니다.”
아니, 제가 언제요.
나는 손발이 오그라드는 미화에 괴로워했다. 세스가 ‘호오, 그랬어?'하는 눈으로 쳐다봐서 더욱 고통스러웠다.
“그, 그런 거 아니에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세스는 절대 속일 수 없다.
세스가 내건 조건에 딱 맞춰서 왕이 연무장 열 바퀴를 돌라는 명령을 내렸으니까. 누가 봐도 내가 왕에게 일러바쳤다는 티가 팍팍 나는 상황이었다.
결국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진실을 밝혔다.
“이번 일은 제가 자초한 거예요. 사실 제가 폐하께 그런 명령을 해 달라고 부탁드렸어요.”
“아가씨! 왜 그렇게 폐하를 감싸십니까.”
그때 시녀장이 끼어들었다. 그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아가씨는 결코 이런 취급을 받으셔서는 안 되는 분이십니다. 폐하께 정식으로 항의를 해도 부족한 일을 어찌하여 거짓말로 덮으려 하십니까.”
“아니, 그, 거짓말이 아닌데.”
당황해 더듬거리는 내 어깨에 부드러운 손길이 닿았다. 어미 닭처럼 나를 감싼 세스가 시녀장을 날카롭게 응시했다.
“안주인의 말을 가로막다니, 내가 그런 방종을 허락 했던가?"
공기조차 얼려 버릴 것처럼 차가운 목소리였다.
“죄, 죄송합니다.”
흥분으로 벌겋던 시녀장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정선이 번쩍든 나는 빠르게 소리쳤다.
"공작님 ! 저 드릴 말씀이 있어욧!"
나를 위해서 화를 낸 시녀장이 질책 당하게 둘 수는 없었다.
시녀장을 압박하던 세스가 나를 힐끗 내려다봤다. 나는 두 눈을 부릅뜨고 그의 시선을 잡아 두려고 애썼다 차라리 나를 욕해라, 나를!
그러자 무서울 정도로 차갑던 세스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기가 생겼다.
“내 아내가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모양이군. 다들 물러가라.”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사람들이 하나둘 사라졌다.
이제 연무장에는 나와 세스, 그리고 의자에 묶인 전령뿐이었다.
"읍읍!"
전령이 자신을 봐 달라는 것처럼 버둥거렸지만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나는 무릎이 달달 떨리는 것을 느끼며 고백했다.
“사실은 제가 폐하께 편지를 썼어요. 폐하의 시녀가 되려면 연무장 열 바퀴를 돌라고 공작님이 시키셨는데, 폐하께서 세 바퀴로 깎아 주시면 안 되냐고요. 그렇다고 그런 명령을 내리실 줄은 몰랐지만 다 제 잘못 이에요. 정말 죄송합니다.”
나는 왕과 세스가 부딪치길 원하지 않았다. 다리가 부러지든 말든 열 바퀴를 뛰는 쎄 나았다. 지금 기분으로는 물구나무를 서서라도 돌 수 있을 것 같았다.
고백이 끝나자 죽음 같은 침묵이 흘렀다. 나는 숨을 죽인 채 세스가 화내길 기다렸다.
“이비, 정말 폐하의 시녀가 되고 싶어?"
예상과 달리 세스는 화내지 않았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물을 뿐이었다. 눈치를 보던 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세스가 겁을 주듯이 말했다.
“그건 당신 생각보다 더 어렵고 힘든 일이야. 어쩌면 상처받고 다칠 수도 있어."
“상관없어요.”
다치는 것보다 세스에게 아무런 도움도 못 되는 게 더 무서웠다. 잔뜩 비장해진 나를 보고 작게 웃은 세스가 겉옷을 벗어 내게 걸쳐 주었다.
"몸이 식으면 감기 걸려.”
더워서 땀이 날 정도였지만 시키는 대로 얌전히 입고 있기로 했다. 옷을 추스르는 나를 잠시 기다려 준 세스가 물었다.
“그럼 업히는 게 좋아, 아니면 안기는 게 좋아?"
“네?"
“왕명을 어길 수는 없으니 내가 당신을 업고서라도 열 바퀴를 돌아야지.”
나는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것을 느끼며 소리쳤다.
“아뇨, 제가 바닥을 기어서라도 열 바퀴를 돌겠습니다!"
사장님 등에 업혀서 연무장 열 바퀴를 도느니 자살 한다!
내 필사적인 외침에 세스가 싱긋 웃었다.
“한 가지만 답해 주면 당신 뜻대로 해 줄게."
“네 ! 뭐든 물어보세요!"
“지금 당신이 입고 있는 건 누구 옷이지? 수련 기사 복으로 보이는데 왜 내 아내가 다른 남자의 옷을 입고 있는지, 그 용감한 남자의 이름이 뭔지 말해 주겠어?"
······한 가지가 아니잖아. 결국 아무 대답도 못 한 나는 얌전히 센스의 등에 업혀야 했다. 세스는 나를 업고도 아주 가볍게 연무장 열 바퀴를 돌았다.
* * *
“정말 감사합니다, 아가씨.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의자에서 풀려난 전령이 은혜 갚는 까치 같은 얼굴로 말했다.
세스 옆에 서 있기만 했던 나는 머쓱해졌다.
"풀어 드린 건 공작님인데요.”
“하하, 아가씨가 풀어 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다면 죽을 때까지 묶여 있었을 겁니다.”
“하하, 농담도.”
"농담 아닙니다.”
전령이 정색했다. 그는 한껏 목소리를 낮춰 소곤거렸다.
“폐하의 명령을 갖고 와서 아가씨를 고생시켰잖습니까, 만약 제가 사라져서 시체도 찾지 못한다면 범인은 바로······.”
전령의 시선을 따라 돌아보자 세스가 서 있었다.
세스는 전령이 묶여 있던 의자를 보며 뭔가를 생각 하는 듯했다 얼핏 보면 오늘 누구 하나 묻어 버릴까 고민하는 표정 같았다. 정말오해받기 쉬운 사람이다.
"공작님은 그런 분 아니에요. 보기엔 무섭지만-아니, 실제로도 좀 무섭지만 다정한 면도 있으시거든요.”
“아가씨, 사기당하시는 건 아닌지 잘 생각해 보십시오.”
전령이 대놓고 코웃음을 쳤다. 그에 나는 입을 삐쭉 내밀었다
“절 업고 연무장을 뛰는 걸 보셨잖아요. 제가 잘못한 일인데도 화내지 않으셨고요.”
"누구에게나 예외가 있지요.”
"잘 알고 있군.”
바로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나는 깜짝 놀랐다. 언제 왔는지 세스가 무표정한 얼굴로 전령을 보고 있었다.
“자신이 그 예외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 테고.”
“저, 잘 절 없애면 폐하께서 아주 노여워하실 겁니다."
전령이 주춤주춤 물러서며 말했다. 가슴 앞에 모은 두 손이 애처롭게 떨렸다.
아니, 저렇게 겁먹을 거면서 왜 그런 말을 한 거야?
“무슨 소리예요. 공작님이 그런 짓을 하실 리가 없잖아요.”
도와 달라는 뜻으로 쳐다보자 세스가 싱긋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그렇지 본인을 없애는 것보다 가족을 없애는 편이 더 쉽고 효율적이니까.”
“컥!”
눈을 부릅뜬 전령이 그대로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황당해하는 내 시선을 받은 세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농담이야.“
아니 , 이 상황에 무슨 그런 농담을!
흙바닥을 나됭구는 전령의 얼굴에 보얀 먼지가 내려앉았다.
대체 이걸 어떻게 수습하지?
심장 마비가 온 걸까 봐 걱정했던 전령은 다행히 금방 깨어났다.
깨어나자마자 세스를 보고 비명을 질렀지만, 내가 농담이라는 말을 스무 번 정도 반복하자 그제야 진정했다.
전령은 십 년은 더 늙어 버린 얼굴로 양피지 한 장을 내밀었다.
“여기, 폐하의 시녀로 임명한다는 칙서입니다. 입궁 할 때 꼭 가지고 오셔야 합니다.”
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양피지를 받았다. 연무장 열 바퀴를 돌라는 명령서와 합격증을 같이 가져오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폐하께서는 제가 성공할 거라고 생각하신 건가요?"
“그거야 당연히······.“
세스 쪽을 힐끗 쳐다본 전령이 아주 부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당연히 아가씨를 믿고 그런 명령을 내리신 게 아니겠습니까.”
뭔가 있군.
전령은 의심스러워하는 내 시선을 피하며 빠르게 말했다.
"입궁은 일주일 뒤입니다. 준비할 것과 주의할 점은 따로 안내받으실 겁니다. 그럼 전 이만.”
“아, 차라도 한 잔…….”
“아닙니다! 몹시 아쉽지만 다음 기회에 마시죠!”
내 권유를 뿌리친 전령이 맹수에게 쫓기는 토끼처럼 달아났다.
손을 흔들어 그를 배웅한 나는 세스를 뻔히 올려다 보았다. 내 시선을 느낀 세스가 싱긋 웃으며 물었다.
“당선 방으로 돌아가려면 오래 걸릴 텐데, 내 방에서 씻고 같이 식사할까?"
흐음, 너무 보송보송한 미소라 오히려 수상한데?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추궁했다.
“그렇게 말하면 제가 엄청 부끄러워하면서 그대로 넘어갈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죠?"
"응?"
무슨 소리나는 듯이 시침을 뚝 떼던 세스가 한숨을 쉬었다.
"남들은 잘 속던데, 왜 당신에겐 안 통하는 거지?“
"공작님의 패턴은 이미 다 파악했거든요.”
어깨를 으쓱으쓱하는 날 보고 쓴웃음을 지온 세스가 품속에서 뭔가를 꺼냈다.
“이것도?"
“혁!"
세스가 내민 것은 바로 내가 궁에서 잃어버린 못생긴 사자 배지였다. 몰래 찾아와서 안 잃어버린 척하려고 했는데, 저게 왜 세스한테 있지?
“어, 그게 사실은요.”
“이비, 내가 먼저 말하게 해 줘 ”
심각한 얼굴의 세스가 내 변명을 막아 버렸다.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는 나는 얌전히 고개를 끄떡였다.
먼저 말하겠다고 한 것치고는 한참 망설인 끝에 세스가 입을 열었다.
“여기서 보내는 편지는 보안을 위해서 모두 검열을 거처 가문의 정보를 빼돌리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잡아내지 당신이 폐하께 쓴 편지 역시 검열을 거쳐서 내게 올라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