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편지를 다 읽은 시녀장은 할 말을 잃었다. 침묵하는 그녀에게 왕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어때?"
“격식이라고는 조금도 없군요.”
“그리고?"
“앞으로 가르칠 게 많겠군요.”
한숨을 쉰 시녀장이 편지를 접었다.
공작 몰래 편지를 보내겠다니, 이 얼마나 천진난만 한 생각인지.
봉투에 찍힌 공작의 문장만 봐도 이블린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가르쳐야 할지도 모르겠군.' 눈
앞이 캄캄한 시녀장의 마음도 모르고 왕이 장난스레 웃었다.
“직접 가르치겠다는 건 이블린이 마음에 든다는 뜻이지?"
”……꼭 그렇게 확인을 받아야 좋으십니까."
시녀장이 찌릿 눈을 흘겼다. 어깨를 으쓱한 왕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공작가에 전령을 보내야겠군.”
“폐하, 정식으로 칙서를 내리심이 어떨지요?"
이블린을 들이기로 마음을 굳힌 시녀장이 적극적으로 권했다.
“이런 일로?"
"공작 부인이 될 사람이니 체면을 세워 주어도 나쁘지 않습니다.“
"흐음.“
이블린 같은 미혼 여성이 칙서를 받는 일은 몹시 드물었다. 왕이 칙서를 내렸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명예 가되리라.
고개를 끄떡인 왕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책상 위에 양피지를 펼쳐 놓은 시녀장이 물러섰다.
잠시 고민하던 왕이 이내 씩 웃고는 펜을 휘갈기기 시작했다.
[짐의 충실한 신하 , 이블린 하인즈는 들어라.
짐의 시녀가 되기 위해 밤낮으로 노력하고 있다니 참으로 기쁜 일이다. 이에 유향과 물약을 상으로 내리니, 기필코 연무장 열 바퀴를 돌아 짐을 향한 충성을 증명하도록 하라.]
* * *
"네 ?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겠어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뭔가 잘못들은 게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왕의 전령이 민망한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폐하께서 연무장 열 바퀴를 돌아 충성을 증명하라 하셨습니다. 믿기 힘들다면 직접 칙서를 읽어 보십시오.”
전령이 떠넘긴 두루마리를 펼치자 아까 들은 내용이 그대로 적혀 있었다.
왕님, 저한테 왜 이러세요.
도와 달라고 편지 썼다가 연무장 열 바퀴를 강제로 돌게 생겼다! 하필이면 세스가 외출 중이라 막아 줄 사람도 없었다. 나는 입이 바짝바짝 마르는 것을 느끼며 물었다.
"언제까지 뛰어야 한다고 정해진 건 아니죠?"
내년까지 시간을 준다면 진짜 열심히 연습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전령은 고개를 저어 내 마지막 희망을 박살냈다.
“아가씨가 임무를 완수하는 모습을 분고 오라 하셨습니다."
지금 당장 뛰라는 소리였다. 아이고!
내 최고 기록은 연무장 두 바퀴 반. 열 바퀴는 진짜 어림도 없었다. 왕도 그걸 뻔히 알고 있을 텐데 이런 명령을 내리다니. 꼭 나를 뛰게 하려고 작정한 사람 같은······.
“어라?"
왕은 나를 뛰게 하려는 건가?
나를 괴롭히고 싶은 거라면 이런 번거로운 방법을 쓸 필요가 없었다.
‘혹시 내가 꼭 뛰어야 하는 이유가 있나?'
안 돌아가는 머리를 억지로 쥐어짜고 있는데 옆에서 비명이 터졌다.
놀라 고개를 돌리자 전령의 멱살을 움켜쥔 사람이 보였다. 금사자 기사단장인 네빌 경이었다. 그는 성난 곰 같은 얼굴을 하고 전령을 윽박질렀다.
“이 자식이 감히 우리 아가씨께 연무장을 돌라고 협박해? 더 이상 살기가 싫냐?"
“께엑 저, 저는 그냥 칙서를 전하라·······.”
전령은 열심히 변명했지만 네빌 경의 귓등조차 스치지 못했다. 그때, 차가운 표정의 시녀장이 티스푼을 들고 그에게 다가갔다.
“꽉 잡으세요, 네빌 경. 아가씨의 흐트러진 모습을 보겠다는 저자의 눈을 파내야 하니까요.”
“리드 부인, 이럴 때는 주제도 모르는 혀부터 잘라야 합니다. 가위를 가져오죠.”
외알 안경을 쓱 밀어 올린 시종장이 참견했다.
“아악! 살려 주세요!"
전령의 얼굴이 완전히 푸르죽죽해졌다. 나는 다 죽어 가는 그를 보다 못해 말했다.
"여러분, 그 사람은 그냥 전령일 뿐이에요. 괴롭혀도 소용없으니 어서 놓아주세요.”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사람들이 물러났다. 네빌 경 역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손을 놓았다. 마치 세스가 명령했을 때 같았다. 가문의 안주인이 나 다름없다는 말은 이런 뜻이었던 모양이다.
죽다가 살아난 전령이 후다닥 뛰어와 내 뒤에 숨었다.
”으흐혹, 전 그냥 칙서를 전하러 온 것뿐인데…….”
구슬픈 울음소리를 들으니 나도 울고 싶었다.
연무장 열 바퀴. 진짜 어떻게 돌지.
풀이 죽은 나를 총관 할아버지가 위로했다.
“아가씨,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하께서 돌아오신 뒤 정식으로 항의를 올리면 됩니다. 아가씨는 엘마이어 가문의 안주인이신 분. 아무리 국왕 폐하라 해도 이렇게 부당한 명령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대역인 내가 공작가의 안주인임을 내세워 봤자 왕에게 먹힐 리가 없었다. 주제를 모른다고 벌이나 받지 않으면 다행이다. 하지만 세스가 항의를 하지 않으면 ‘사랑받는 공작 부인’이라는 설정에서 어긋나버린다.
그래서 결론이 뭐냐 하면…… 세스가 돌아오기 전에 연무장 열 바퀴를 다 돌아야 한다는 것이다. 으아아, 난 왜 행복할 수가 없어!
머리를 쥐어듣고 싶은 것을 꾹 참은 나는 애써 웃는 얼굴을 했다.
“아뇨. 항의할 필요 없어요. 전 폐하의 명령을 기꺼이 따를 테니까요.”
“아가씨!"
“아가씨, 안 됩니다!”
사람들이 기겁을 하며 나를 말렸다.
혹혹 나도 하기 싫어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단 말이야.
나는 꾸깃꾸깃해진 두루마리를 꼭 끌어안으며 정말 기쁜 것처럼 연기했다.
“이번 일은 폐하께서 제게 은혜를 베푸신 거예요. 생각해 보세요. 폐하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거나 힘들 게 일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런데 저는 겨우 뛰는 것만으로 충성을 다할 기회를 얻었잖아요. 공작가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열심히 뛰어야지요.”
내가 반드시 뛰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기 위한 아무 말 대잔치였다. 그런데 내 말을 들은 사람들이 갑자기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공작가를 위해 그렇게까지 하시다니.”
"몸도 약하신 분이 자기를 희생해서…….”
"크흡, 지켜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어, 이게 아닌데?
점점 이상해지는 분위기 에 당황한 나는 재빨리 몸을 뒤로 뺐다.
“그럼 전 옷 갈아입고 올게요.”
“아, 아가씨. 저도 데려가 주세...... 옵읍!"
뒤에서 따라오던 전령의 목소리가 아련하게 사라졌다.
* * *
시간 좀 끌다가 돌아오면 다들 진정하겠지.
······라고 생각한 내가 바보였다.
“아가씨이!"
“우리 아가씨, 어떡해.”
연무장은 눈물바다였다. 아까의 세 배는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몰려나와 울먹이고 있었다.
‘원래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이사 떡 효과인가?'
그대로 도망치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연무장으로 들어서자 다들 열정적으로 소리쳤다.
“아가씨, 응원할게요!"
“힘내세요!"
연무장을 뛰는 게 아니라 나라라도 구하러 가는 분위기였다.
“읍읍!”
그리고 의자에 묶인 전령은 한쪽 구석에 놓여 있었다.
눈을 가릴 수는 없으니 입이라도 틀어막았는지 아주 불쌍한 모습이었다. 풀어 주고 싶었지만 그러면 내가 안 보는 사이 거꾸로 매달릴 것 같았다.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해. 내 코가 석자인데.'
이내 나는 포기하고 달리기 시작했다. 내 달리기 코치인 네빌 경이 옆에 서 함께 뛰며 소리쳤다.
“자, 후하-후하! 호흡을 조절하시면서! 잘하고 계십니다!"
순간 이곳에서 사라지고 싶은 기분이 들었지만 곧 아무래도 상관없어졌다.
머리 위로 깽깽 내리쬐는 햇볕이 여유를 뺏어 갔다. 그냥 힘들다는 생각만 들었다.
“혁혁!"
긴장 때문인지 평소보다 더 빨리 지치는 것 같았다. 관지놀이가 팔딱팔딱 뛰고 속이 울렁거렸다. 토할 것 같은 느낌을 참으며 겨우겨우 세 바퀴를 뛰었다. 내 최고 기록이었다.
“아가씨, 벌써 세 바퀴나 도셨습니다!”
네빌 경이 무척 기뻐하며 소리쳤다.
하지만 아직 일곱 바퀴가 남아 있었다. 당장 주저앉고 싶은데 그럴 수 없어서 더 괴로웠다.
문득 세상이 엿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일을 시킨 왕도 밉고, 하필 열 바퀴를 말한 세스도 밉고, 멍청한 나도 미웠다.
’와, 남은 힘들어 죽겠는데 혼자 편하게 앉아 있네?'
조금 전엔 불쌍하다고 생각했던 전령까지 얄밉게 느껴졌다.
심보를 고약하게 먹은 탓일까. 돌부리에 발이 턱 걸렸다. 나는 아차 할 틈도 없이 앞으로 꼬꾸라졌다.
“아가씨!"
"안 돼!"
사람들의 비명 속에서 누가 나를 잡아 주었다. 땀투성이로 바닥을 구를 뻔했던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잡아 줘서 정말 고마워요!"
당연히 네빌 경이라고 생각하며 인사했는데, 고개를 들자 엄청나게 잘생긴 얼굴이 보였다.
“고, 공작님?!"
“다행히 늦지 않았군.”
놀라 펄쩍 뛰는 나를 본 세스가 싱긋 웃었다. 멋진 미소였지만 나한테는 도깨비가 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왜 왜 왜 이렇게 빨리 돌아오셨어요?"
“당신이 위험하다는 소식을 받았지.”
"네?"
누가 그런 쓸데없는 짓을? 반사적으로 범인을 찾던 나는 정신을 차렸다.
지금 중요한 건 누가 그랬냐가 아니다. 그보단 이 상황을 어떻게든 수습해야 한다.
하지만 내가 그럴싸한 변명을 짜내기도 전에 네빌 경이 냉큼 일러바쳤다.
“주군! 폐하께서 아가씨께 연무장 열 바퀴를 돌라는 칙서를 내리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