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잔뜩 꾸며 놓은 머리를 하나하나 푼 시녀장이 천천히 빗질을 했다. 부드럽고 섬세한 손길에 절로 잠이 올 것 같았다.
“오래전 유모 대선 제가 잠깐 어린 전하를 돌봐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의 전하는 아주 수줍음이 많고 조용한 아이셨지요.”
시녀장은 담담한 목소리로 예전 이아기를 꺼냈다. 어린 세스가 얼마나 착하고 귀여웠는지, 그런 아이가 강제로 신전으로 내쫓겼을 때 얼마나 슬프고 괴로웠는지.
“저는 전하께서 가족을 잃고 힘들어하실 때도, 오명을 뒤집어쓰고 괴로워하실 때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최소한 그분의 선택을 믿고 지지 하자고 생각했습니다.”
“······.”
“전하께서 아가씨를 선택한 순간부터 저는 아가씨의 편입니다. 저분만이 아니라 이곳의 모든 사람들이 아가씨를 지지할 겁니다.”
빗질을 끝낸 시녀장이 내 앞에 섰다 그녀는 처음 보는 다정한 눈을 하고 있었다.
“전하를 행복하게 해 주십시오. 제가 바라는 것은 그 것뿐입니다.“
나는 묻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세스가 행복해질 수 있을지.
세스가 내게 마음을 열면 그래서 나를 좋아하게 되면, 그를 행복하게 해 주는 게 될까?
세스는 분명 나를 좋아한다. 하지만 그건 귀여운 강아지를 아끼는 마음이나 별다를 게 없었다.
내가 어머니의 유산을 받았다고 말했을 때 세스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내 과거에 대해 들었냐고, 오해라고도 말하지 않았다. 내가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전혀 궁금해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도 그의 과거를 들었다고, 어떤 마음이었다고 말하지 못했다.
그때 깨달았다. 내 존재는 세스에게 잠깐의 위안을 줄 수는 있어도, 행복하게 만들 수는 없다는 것을.
‘애초에 난 대역이고, 2년 뒤엔 사라질 존재인걸.’
나는 공작가의 사람들이 바라는 것을 이루어 줄 수 없었다. 대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내일부터 연무장을 돌아야겠네.’
반짝거리는 반지를 내려다본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역시 놀고먹는 직장 생활은 불가능한 것 같다.
* * *
라리사 클라멘스 백작 부인.
한때 공작의 약혼녀였으나, 왕자와 결혼한 여자.
왕국 제일의 미인이라 불리는 그녀는 지금 화장대 앞에 앉아있었다.
반짝이는 금발에 둘러싸인 얼굴은 천사처럼 아름다웠다. 커다란 갈색 눈은 당장 눈물이라도 홀릴 듯이 촉 촉했고, 작은 입술은 장미처럼 붉었다.
하지만 거울을 보는 라리사의 눈은 얼음처럼 냉정했다. 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상품처럼 꼼꼼히 뜯어보며 확인하는 중이었다.
그때, 작은 노크 소리와 함께 시녀가 들어왔다. 가장 중요한 시간을 방해받은 라리사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겁먹은 시녀가 들고 있던 것을 공손히 내밀었다.
"말씀하신 초상화를 가져왔습니다."
라리사는 심드렁한 얼굴로 시녀가 건네준 것을 받았다. 하지만 초상화를 들여다보는 눈은 전에 없이 날이 서있었다
초상화를 낱낱이 살핀 라리사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이게 공작이 데려온 천것이라고?"
“······예.”
“별것도 아니군. 태워 버려.”
짧게 코웃음을 친 라리사가 초상화를 바닥에 내던졌다. 급히 몸을 굽힌 시녀가 바닥에 떨어진 그림을 주워들었다.
초상화는 활짝 웃는 여자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바람에 휘날리는 분홍색 머리와 꾸밈없는 웃음이 인상적 이었다.
좋은 가문에서 교육받은 아가씨라면 이렇게 이를 드러내고 웃지 않는다. 고개를 숙이고 수줍게 웃거나, 웃는 듯 마는 듯 살짝 미소 짓는 것이 미덕이니까. 하지만 해바라기처럼 환하게 웃는 얼굴에는 싱그러운 매력이 있었다.
화가는 특히 여자의 눈을 강조했다. 동그란 눈과 끝이 살짝 올라간 눈매가 묘하게 시선을 잡아끌었다. 라리사 같은 전형적인 미인은 아니지만, 눈을 뗄 수 없는 뭔가가 있었다.
목석이라 불리던 공작을 사로잡은 아름다운 아가씨.
까다로운 왕도 그녀를 보자 시녀로 삼으려 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라리사도 그걸 듣고 초상화를 구해 오라 닦달하지 않았던가.
‘한번 보고 던질 거면 왜 그렇게 재촉한 거야?'
초상화를 구하느라 고생했던 시녀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라리사는 약혼자였던 공작에게 이상한 집착을 가지고 있었다. 왕자와 결혼한 뒤에도 공작을 제 것처럼 생각했고, 그에게 접근하는 여자들을 미워했다.
한때 공작을 사모해 쫓아다녔던 나사우 공녀는 끔찍한 일을 당하고 고국으로 돌아갔다. 시녀는 나사우 공녀에게 손을 쓴 게 라리사일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때, 거울로 눈을 돌린 라리사가 물었다.
“네 언니가 백합 궁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지?"
"예? 예, 그렇습니다.”
화들짝 놀란 시녀가 서둘러 답했다. 라리사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잘됐네. 거기서 소문을 좀 내라고 해.”
“어, 어떤 소문을?"
“천것이 주제도 모르고 폐하의 시녀 되기를 거부했다고. 공작의 총애만 믿고 폐하 앞에서도 더없이 방자하게 굴더라고.”
"······.“
“이미 그런 말이 돌고 있겠지만 좀 더 부추겨 보란 말이지. 약간의 과장과 거짓을 더해서.”
시녀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확실히 라리사의 말 그대로였다. 자신의 언니만 해도 ‘건방진 천것'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고 있었으니까. 조금만 부추겨도 악의 가득한 소문이 사방에 퍼질 것이다.
하지만 이건 매우 위험한 짓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왕의 자존심을 긁는 내용이니까. 어쩌면 입을 잘 못 놀린 죄로 궁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
망설이는 시녀를 돌아본 라리사가 달콤하게 덧붙였다.
"잘하면 네 언니뿐만 아니라 네 혼처도 알아봐줄 테니까. 알겠지?"
“······.”
시녀는 이것이 거부할 수 없는 명령임을 깨닫고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 * *
궁에 퍼진 불쾌한 소문은 곧 왕의 귀에도 들어갔다. 백합 궁의 시녀장인 피오나는 서둘러 입을 놀린 자들을 처벌했다. 하지만 이미 퍼져 나간 소문까지는 어쩌지 못했다.
‘라리사, 그 여자가 또 말썽이군.’
시녀장은 이번 일올 꾸민 사람이 라리사 클라멘스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하지만 시녀의 증언만으로 라리사를 벌줄 수는 없었다. 어쨌든 왕자의 아내이니, 대역죄가 아니라면 건드리기 어려웠다. 결국 이대로 넘어가는 게 최선이었다.
‘폐하께서 또 불같이 화를 내시겠구나.'
시녀장은 무거운 마음으로 왕의 처소를 찾았다.
“폐하, 피오나입니다.”
“들어와!”
뜻밖에도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녀장은 속으로 의아해하며 문을 열었다.
왕은 긴 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편지를 읽고 있었다. 무슨 내용인지 낄낄거리는 소리와 함께 의자 밖으로 삐져나온 다리가 가볍게 흔들렸다.
시녀장은 왕의 품위 없는 모습에 잔소리를 하려다 꾹 참았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왕을 굳이 자극할 필요는 없었다.
그때 왕이 편지에서 눈을 떼며 물었다.
“갔던 일은 어떻게 됐지?"
“범인은 예상대로 라리사 클라멘스였습니다. 공작의 약혼녀가 꽤 거슬린 모양이더군요.”
"놀랍지도 않군.”
"관련자를 처벌했지만 소문이 쉽게 가라앉진 않을 겁니다. 공작의 약혼녀를 질투하는 이들이 많으니까요.”
라리사는 사람의 악의를 교묘히 이용했다.
그녀의 수법은 조잡하고 허술했지만, 벗어나기 쉽지 않았다. 이는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시녀장의 걱정에 왕은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별것도 아닌 소문 따위, 사교 시즌이 시작되면 금방 사라질 데지.”
“이번에는 그렇게 되지 않을 겁니다. 공작께서 약혼녀를 너무 감쌌습니다. 그게 못마땅한 자들은· 폐하의 이름을 놓아주지 않을 겁니다.”
유일한 트집거리를 끝까지 물고 뜯을 거라는 소리였다.
시녀장은 무겁게 말했다.
“이블린 하인즈를 시녀로 들이는 건 포기하십시오. 독보다는 실이 큽니다.”
“홈, 그건 싫은데.”
"······폐하.“
“피오나, 우선 이것부터 읽어 보도록 해.”
몸을 일으킨 왕이 읽고 있던 편지를 내밀었다. 시녀장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편지를 받았다. 뜯겨 나간 봉인엔 두 마리의 사자와 방패가 찍혀 있었다.
“이건 공작가의 문양이군요. 공작께서 편지를 보내셨습니까?"
“아나 이건 공작의 약혼녀인 이블린 하인즈가 보낸 거다.”
왕이 조금 심술궂은 얼굴로 웃었다. 의아해하던 시녀장은 편지를 펼쳐 읽기 시작했다.
[폐하, 안녕하세요!
저는 지금 공작가의 별채에 있어요. 별채는 아주 화려하고 예쁜 성이에요. 그런데 너무 반짝거려서 복도를 지나갈 때마다 눈물을 글썽거릴 각오를 해야 합니다.
(엉성한그림)
이건 눈에 힘을 준 제 모습이에요.
공작님은 저를 계속 여기에 둘 생각인 것 같아요.
참고로 제 방은 2층이에요. 계가 방을 어떻게 꾸몄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엉성한그림)
저는 지금 창가에 놓인 카우치에 앉아서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창밖으로 호수가 보이는데 아주 아름다워요. 폐하께도 이 풍경을 보여 드리고 싶어요.
그런데 폐하! 공작님은 우리의 근사한 계획에 찬성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저한테 폐하의 시녀가 되고 싶으면 연무장 열 바퀴를 돌라고 하지 뭐예요.
연무장은 호수 옆에 있는데 너무 넓어서 보기만 해도 현기중이 납니다. 저처럼 숨쉬기 운동밖에 모르는 사람에게 이건 너무 가혹한 일입니다.
공작님께 연무장 다섯 바퀴로 깎아달라고 부탁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결국 급하게 달리기 코치를 구할 수밖에 없었어요.
코치는 제 달리기 실력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대로 매일매일 노력한다면 내년쯤엔 열 바퀴도 뛸 수 있을 거란 말을 들었어요. 하지만 내년은 너무 늦습니다!
폐하, 공작님에게 연무장 세 바퀴로 바꾸라고 말씀 해주시면 안 될까요?
저는 지금 연무장을 두 바퀴나 뛸 수 있답니다. 조금 무리하면 세 바퀴도 가능할 거예요. 그러니 꼭 세 바퀴로 하라고 해 주세요. 전 자비로우신 폐하만 믿습니다!
아, 참. 폐하, 궁에서 이렇게 생긴 배지를 보지 못하셨나요?
(엉성한그림)
제게 아주 소중한 물건인데, 드레스와 함께 잃어버렸답니다. 보지 못하셨다면 재가 궁에 가서 찾아봐도 될까요?
이 이야기는 공작님께 비밀로 해 주세요. 제가 배지를 잃어버린 걸 알면 분명 속상하실 거예요. 들키기 전에 얼른 찾아서 달고 다니는 게 제 계획입니다.
이런, 시녀장이 어서 점심을 먹으라고 부르고 있어요. 혼나기 전에 어서 가야겠어요.
그럼 폐하, 다음엔 궁에서 인사드릴게요.
이블린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