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예상은 했지만 씁쓸해졌다.
편애하던 첫째가 죽고 미운 둘째가 후계자가 됐을 때 세스의 아버지가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그리고 세 스는 어떤 마음으로 그걸 견뎠을지. 상상하는 것조차 괴로워서 애써 머리를 비웠다.
“그 후로 전하께선 모든 일에 마음을 닫아 버리신 것 같았습니다. 누구도 믿지 않고. 누구도 아끼지 않고, 그저 살아가야 하기에 살아 있을 뿐인 사람으로 변하셨지요. 그런데 마치 구원의 빛처럼 아가씨께서 나타 나신 겁니다.”
······어, 잠깐 이 흐름으로 가면 안 될 것 같은데.
“아가씨를 만난 후 전하는 예전의 모습을 되찾으셨습니다. 그렇게 행복하게 웃는 전하의 모습을 보게 될 줄은……. 이 늙은이가 꿈에서도 감히 바라지 못한 일 이었습니다.”
눈물을 글썽 이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엄청나게 부담스러웠다.
진정하세요, 할아버지 . 그건 그냥 애니멀 테라피예요. 진작 지나가는 강아지 한 마리 안겨 줬으면 끝날 문제였다고요.
나는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모든 일엔 다 때가 있는 법이에요. 공작님도 이제 좀 마음의 문을 열어 볼까 생각하신 거겠죠. 딱히 저 때문에 그렇게 된 게 아니에요.”
“허허, 그렇군요. 저도 이제 공주 전하의 유산을 아 가씨에게 드릴 때라고 생각한답니다.”
이 능구렁이 할아버지, 정말 귀찮네. 차가운 눈으로 쳐다보자 할아버지가 나를 달래듯이 웃었다.
“공주 전하께서도 제 말에 동의하실 겁니다. 소중한 아드님을 행복하게 해 줄 사람. 전하의 유산을 물려받는데 그보다 더 중요한 자격은 없을 테니까요.”
“하하, 그러게요. 그게 제가 아니면 딱 맞을 것 같네요.”
"허허, 아가씨께 딱 맞는 거지요.”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우리를 보던 시녀장이 말했다.
“그럼 전하께 여쭤보시지요.”
“네?”
“아가씨께서 전하를-행복하게 해 드리는지 여쭤보면 끝날 문제 같군요.”
“네?!”
지금 세스는 ‘약혼녀를 너무 사랑해서 집착하는 공작님'을 연기 중이다. 그런 사람에게 ‘약혼녀 때문에 행복하신가요?' 라고 물어보면 무슨 답이 나올지는 뻔했다.
“그리고 아가씨. 주제넘지만 이 말씀은 꼭 올려야 할 것 같습니다. 공주 전하께서는 아가씨의 웃어른이십니다. 웃어른이 물려주신 것을 이렇게 거절하는 건 결례겠지요?"
시녀장이 눈을 번뜩였다. 여기서 더 거절했다간 나를 가만히 두지 않을 것 같은 표정이었다.
나는 훌쩍이며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할아버지가 껄껄 웃는 소리가 몹시 거슬렸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 * *
결국 반강제로 공주님의 유산을 떠맡게 된 나는 세스에게 보고하러 갔다.
호달달 떨면서 ‘주인아, 내가 이걸 받으려고 한 게 아니고 말이야.’ 하고 설명하는 나를 세스는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 사람, 혹시 줄기는 것 아닌가 의심할 때쯤 세스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뭐가 문제인지 잘 모르겠는데.”
"네? 모든 것이 다 문제인데요?"
“나도 당신이 유산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아니, 그건 좀 아니죠. 어머니가 남겨 주신 소중한 물건이잖아요.”
그런 귀한 걸 2년 계약 멍멍이에게 줘서 어쩔 생각 이야? 펄쩍 뛰는 나를 본 세스가 작게 웃었다.
"소중하니까 당신이 아닌 사람에겐 주고 싶지 않아. 총관도 나와 같은 생각일 테고.”
엄마의 유품을 남에게 주느니 강아지 목에 걸어 주겠다는 건가.
이해할 수 없는 감성이지만 본인이 그렇다니 존중할 수밖에 .
“그럼 깨끗하게 쓰고 퇴직할 때 돌려드릴게요.”
안 그래도 공식적인 자리에서 착용할 보석이 부족하다고 시녀장이 그랬으니까. 장신구만 빌려 쓰는 정도 면 왕도 내가 딴마음을 품었다고 오해하지 않을 것이다.
“······퇴직이라니?"
“아, 제가 대역을 그만둘 때요. 2년 뒤엔 제 역할도 끝나니까요."
“내가 그렇게 말했었나?"
세스가 처음 듣는 소리라는 듯이 물었다.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2년 안에 모든 문제가 정리될 거라고 하셨잖아요?"
“그래. 잘 기억하고 있군.”
세스가 눈을 둥글게 휘며 웃었다. 엄청 틀리게 말한 것도 아닌데 되게 눈치 준다. 나는 속으로 투덜대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그때 다 돌려드릴게요.”
“아니, 그건 이제 당신 거야"
“네? 왜죠?"
“당신에게 해 준 게 없는 것 같아서. 그동안 밀린 보상이라고 생각하고 받아 줘.”
혹시 세스의 성은 호구인가? 나는 진지한 의심을 품으며 말했다.
“제가 먹고 입는 거랑 제 동생 학비까지 전부 다 공작님이 주시는데요?"
“이비, 그걸 줬다고 말하면 내가 너무 치졸해지잖아."
사실인데 왜 치졸해지지?
어리동절해하는 나를 본 세스가 씁쓸한 얼굴을 했다.
“내가 얼마나 무심했는지 알 것 같군. 설마 돌아가신 어머니께 밀릴 줄은 몰랐는데.”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 그가 손을 뻗었다.
"손 줘 봐.”
나는 망설임 없이 손을 내밀었다. 내 손을 잡고 가만히 바라보던 세스가 품에서 반지를 꺼냈다. 가운데 장미 문양이 들어간 금반지였다. 세스는 그걸 내 왼쪽 새끼손가락에 끼웠다.
“보석은 아니지만 이걸 줄게.”
나는 눈을 깜빡이며 반지를 바라봤다. 끼울 때는 좀 큰 것 같았는데 순식간에 줄어들어 내 손가락에 딱 맞게 변했다.
“이게 뭐예요?”
“인장 반지야 갖고 싶은 게 있으면 그걸 찍으면 돼.”
찍으라는 거 보면 도장인가?
“갖고 싶은 물건에 이걸 찍어서 내 거라고 표시하는 건가요?"
내 말에 세스가 작게 웃었다.
“그것도 좋은 생각이군.”
한쪽 장갑을 벗은 그가 손등을 내밀었다. 남자다우면서도 우아한 손이 절로 시선을 사로잡았다.
“여기 찍어 볼래?"
“그냥 찍으면 돼요?”
“응.”
인주가 없는데 괜찮나? 잠시 망설이던 나는 반지를 세스의 손등에 살짝 눌렀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붉은장미 문양이 콕 찍혔다. 세스가 만족스러운 눈으로 손등의 문양을 바라봤다.
아니, 그걸 그렇게 보면 내가 영역 표시라도 한 것 같잖아. 괜히 부끄러워진 나는 세스를 재촉했다.
"원래는 어떻게 쓰는 건데요?"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돈을 내는 대신 이걸 계산서에 찍으면 돼.”
아, 신용 카드 같은 거구나.
나는 반지의 문양을 만지작거렸다. 신기하게도 손에 아무것도 묻어나지 않았다. 필요할 때만 찍히는 도장 인모양이다.
“사고 싶은 건 뭐든 사. 한도는 없으니 가격은 신경 쓰지 말고.”
꼭 재벌이 애인에게 카드 주면서 할 것 같은 대사였다. 나는 유독 반짝거리는 반지를 내려다보다가 물었다.
“저, 궁금한 게 있는데요. 이걸로 뭔가 사면 돈은 누가 내는 거죠?”
"글쎄 누군지 몰라도 평생 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사람일 것 같군.”
그 쓸데없이 돈 많은 사람은 세스인 모양이다. 나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공작님, 저 이거 안 받으면 안 될까요?“
”……왜?“
“너무 많이 받아서요. 이거까지 받으면 안 될 것 같아요.”
나는 반지를 잡아당겼다. 그냥 쑥 배서 돌려주고 싶은데 이상하게 빠지질 않았다. 껑껑거리는 내 손을 세스가 잡아 멈추게 했다.
“거절하지 마. 이건 당신이 당연히 받아야 할 몫이야."
그러다가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니까? 난 욕심 없이 오래오래 살고 싶다고!
“그걸 받으면 주제넘고 탐욕스럽다고 손가락질 받을 거예요. 그럼 전 공작님 옆에 있을 수 없게 될지도 몰라요."
“······."
세스가 처음 보는 얼굴로 나를 봤다. 화가 나거나 일러진 표정은 아니었다. 분명 평온한 얼굴인데도 이 상하게 머리끝이 쭈뼛 섰다.
“이비 그게 누구든, 당신이 원하지 않는데 나를 당신 옆에서 떼어 놓을 수는 없어 절대로.”
아주 부드럽고 무서운 목소리였다.
뻣뻣하게 굳어진 내 쪽으로 고개를 살짝 기울인 세스가 속삭였다.
“이해했어?"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떡였다. 반지는 그냥 가져가서 구석에 처박아 놔야겠다.
* * *
시녀장은 내가 받아 온 반지를 보고 굉장히 기뻐했다.
"총관 어르신의 인정과 인장 반지까지 얻으셨으니, 엘마이어 가문의 안주인이나 다름없으십니다.”
시어머니에게서 곳간 열쇠를 받아 온 분위기였다. 시녀장은 좋은 일이 또 있다며 뭔가를 가져왔다. 내가 이사 떡을 사기 위해 내놓았던 돈주머니였다.
"총관 어르신이 아가씨께 돌려드리라 했습니다. 선물 비용은 별도로 처리했으니 이건 잘 갖고 계시다가 나중에 필요할 때 쓰시라고요.”
“······.”
너의 자그마한 돼지 저금통은 잘 간직했다가 과자나 사 먹으라는 것처럼 들렸다.
나는 조용히 주머니를 받았다. 더 묵직해진 느낌에 열어 보니 백금화가 20개 정도 더 들어 있었다.
공작가 스케일 정말 무섭다.
말없이 서 있는 나를 보고 시녀장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가씨? 왜 그러십니까?”
“아뇨. 제가 너무 과분한 대우를 받고 있는 것 같아서요.”
“아가씨는 가문의 안주인이시니 이런 예우는 당연한 일입니다.”
시녀장이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리드 부인 저한테 왜 이렇게 잘해 주세요?"
“예?”
“전 출신도 별 볼 일 없고, 가진 것도 없고, 공작님께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잖아요 . 그런데도 싫은 기색 하나 없이 잘 돌봐 주시니까 이상해서요.”
그냥 모른 척할 수도 있지만 물어보고 싶었다. 어쩌면 대역으로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는 죄책감 때문일지도 모른다. 시녀장이 의무감이라든가 책임감 때문이라는 말을 해 주면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았다.
잠시 말이 없던 시녀장이 입을 열었다.
“아가씨, 머리를 빗겨 드릴까요?"
뜬금없는 소리였지만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떡였다. 왠지 얼굴을 마주 보고 하긴 힘든 이야기가 나올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