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실례지만 이 물건들은 아가씨께서 직접 고르셨습니까?”
할아버지가 뭔가를 시험하듯이 물었다. 나는 어떻게 답해야 트집잡히지 않을지 머리를 굴리며 말했다.
“네. 시녀장과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 골랐어요. 무난하면서도 마음에 안 들면 돈으로 바꿀 수 있는 것으로요.”
“호오, 돈으로 바꾼다고요?"
“제 선물이 모든 사람의 취향에 맞을 수는 없으니까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할아버지가 다시금 질문을 던졌다.
“똑같은 선물을 나눠 주면 차별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텐데요?"
“그래서 직책 에 따라 상중하로 나눴어요. 중급은 은식기 세트를 추가하고, 상급은 거기에 비단한 필을 더해서 나눠 줄 생각이에요.”
그것 때문에 돈이 엄청나게 깨졌지. 큽.
특히 기사들 대부분이 상급과 중급이라는 게 아주 치명적이었다.
“이것 말씀이지요?"
할아버지가 두 개의 상자를 테이블 위에 놓았다. 안에는 반짝반짝한 은식기 세트와 곱게 포장된 비단이 들어 있었다.
아니, 다 알면서 왜 물어본 거야?
떨떠름해진 나를 본 할아버지가 허허 웃었다.
"참으로 정성스러운 선물입니다. 프리지어 궁을 방 문한 손님에게도 같은 선물을 드리면 좋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으음, 얼핏 듣기엔 칭찬 같은데 진한 함정의 냄새가 난다 나는 신중하게 생각한 뒤에 말했다.
“제가 준비한 물건들은 실용적인 것들이잖아요. 하지만 여길 방문하시는 분들은 실용적인 게 별로 중요하지 않으실 것 같은데요.”
“그렇군요. 그럼 어떤 물건이 좋을까요?"
“귀한손님 이라면 맞춤선물을 드리면 될 것 같고요. 일반 방문객이라면······."
나는 돈지랄을 한껏 할 수 있는 물건들을 늘어놨다.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듣던 할아버지가 재차 웃음을 터트렸다.
"참으로 총명하십니다.”
하, 합격인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수염을 쓰다듬던 할아버지가 입
을 열었다.
“귀한 지혜를 얻었으니 보답을 드려야겠지요. 리드 부인,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예, 저희 쪽은 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
시녀장이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고개를 끄덕인 할아버지가 테이블 종을 흔들자, 문이 열리며 시종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품에는 모두 얇고 길쭉한 상자를 안고 있었다.
시종들은 내 앞에서 조심스럽게 상지를-열고 내용물을 보여 주었다.
"17 개의 에메랄드와 다이아몬드로 장식한 목걸이입니다."
“옐로 다이아몬드를 세팅한 목걸이와 귀걸이, 반지 세트입니다."
“오팔과 금, 다이아몬드를 세공한 헤어피스와 허리띠입니다.”
보기만 해도 질릴 정도로 번쩍번쩍 빛나는 장신구들 이었다. 시종들은 끝도 없이 상자를 날랐고, 시녀장과 시녀들이 그것을 척척 받아 확인하고 기록했다.
나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할아버지를 쳐다봤다.
"할아버지, 이게 다 뭐예요?"
“캐서린 공주 전하께서 아가씨께 남긴 유산입니다.”
네? 그게 누구죠?
어리동절한내 표정을 본 할아버지가 웃으며 설명했다.
“전하의 모친이십니다. 카스티야 왕국의 공주셨지요.”
아, 세스의 엄마가 공주님이었구나. 정말 놀라울 정도로 놀랍지 않네.
"공주 전하께서는 둘째 아드님을 신전으로 보내기 싫어하셨습니다. 부군의 고집을 꺾기 위해 이런 것들 까지 준비해 두셨지요.”
그러고 보니 세스는 어릴 때부터 성직의 길을 걸었다고 들었다.
하지만 세스의 엄마는 거기 반대했던 모양이다. 내 아들은 꼭 결혼시키겠다며 혼수품을 바리바리 싸 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시집오실 때 가져온 카스티야 왕실의 보석 135점과 개인적으로 소장하셨던 장신구 170 점, 토지와 휴양지의 저택, 수도에 있는 가게들입니다 이제 모두 아가 씨의 것입니다.”
“컥!"
안 돼 이건 사약이다. 이거 먹으면 난 죽어!
나는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진심을 다해 호소했다.
"할아버지, 전 이런 거 필요 없어요. 공작님이 주신 걸로도 충분해요.”
“허허 리드 부인, 아가씨의 말이 사실입니까?"
할아버지는 내 말을 농담처럼 받아넘기며 시녀장에게 물었다 . 후다닥 달려온 시녀장이 무슨 헛소리 나는 얼굴로 말했다.
“전혀 충분하지 않습니다. 전하께서 주신 것으로 기 본은 갖췄지만,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그런데 내가 살펴보니 별궁의 예산이 나가지 않고 그대로 쌓이고 있더군요.”
“아가씨께서 너무 검소하셔서 상단을 부르는 걸 꺼리십니다. 심지어 겨우 갖춰 둔 드레스도 다 없애 버리는 상황이라…….”
시녀장이 미쳐 버리겠다는 얼굴로 한숨을 푹푹 쉬었다. 그에 나는 서둘러 변명했다.
“할아버지, 제 드레스는 지금도 충분히 많아요. 하루에 5번씩 갈아입어도 계절이 바뀌기 전까지 다 못 입을 정도예요. 드레스는 유행을 심하게 타서 1 년만 지나도 못 입잖아요. 그래서 제가 꼭 입을 것들만 빼고 주변에 나눠 준 거예요.”
내 취향대로 산 것도 아니고, 세스가 사서 쌓아 둔 드레스였다.
키우는 강아지에게 이 옷도 입혀 보고, 저 옷도 입혀 보고 싶은 게 주인의 마음이라지만 세스는 좀 심각했다. 매일 쌓이는 옷으로 드레스 룸이 터질 것 같았다.
보다 못한 나는 날을 잡아 옷을 싹 정리해 시녀들에게 나눠 줘 버렸다. 한 번도 안 입고 버려지는 것보단 누군가가 예쁘게 입어 주는 편이 더 좋으니까.
지극히 합리적인 내 설명을 들은 할아버지가 배를 잡고 껄껄 웃었다.
“시녀들이 별궁에서 일하려고 멱살을 잡고 싸운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시녀장이 부끄럽다는 듯이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쳐다봤다. 뭐 가잘못된 거야?
겨우 웃음을 멈춘 할아버지가 다정하게 말했다.
"공주 전하의 유산도 그리하시면 됩니다. 마음에 드는 것은 가지시고, 마음에 안 드는 것은 팔거나 나누어 주시지요.”
타국 왕실 보석 팔았다가 무슨 꼴을 당하려고!
심호흡으로 마음을 진정시킨 나는 차분하게 설득했다.
"할아버지, 다시 생각해 주세요. 제가공작님의 약혼녀가 되었다고 해서 이걸 받는 건 좀 아닌 것 같아요.”
“아가씨께서 받지 못하신다면 누구도 자격이 없겠지요.”
아이고, 제발 나 좀 살려 주라.
울 것 같은 얼굴로 쳐다보자 할아버지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리드 부인, 잠시 사람들을 물려주시겠습니까.”
“저는 아가씨를 모셔야 합니다."
“부인께선 남아 있으셔도 됩니다.”
고개를 끄덕인 시녀장이 나머지 사람들을 내보냈다. 그사이 몸을 일으킨 할아버지가 황금 상자 하나를 찾아서 들고 왔다.
“이걸 열어 보시면 제 말을 이해하실 겁니다.”
잠시 머뭇거리던 나는 상지를 열었다. 안에는 금박과 보석으로 치장된 집시가 들어 있었다. 웬 접시?
"공주 전하께서 마거릿 공녀님을 출산하신 기념으로 만든 초상 접시랍니다.”
자세히 살펴보자 접시의 한가운데 가족 초상화 같은 그림이 있었다.
“이분이 캐서린 공주 전하십니다.”
할아버지가 아기를 안고 있는 갈색 머리 여자를 가리켰다.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 같은 가냘픈 미인이었는데, 섬세한 이목구비가 세스와 꽤 비슷했다.
“그리고 선대 공작 전하와 첫째 아드님이신 아서 경, 막내딸이신 마거릿 공녀님입니다.”
내가 미쳤다고 욕했던 세스의 아빠는 검은 머리에 신경질적인 인상의 미남이었다. 세스의 형은 아버지를 닮았는데도 성격이 좋아 보였고, 여동생은 그냥 강보에 싸인 갓난아기였다.
‘여동생이 있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공주님 뒤에 반쯤 숨어 있는 아이를 가리켰다.
“이 아이가 공작님이에요?"
‘예, 그렇습니다. 역시 바로 알아보시는군요.”
······여기에서 은발인게 얘밖에 없는데요. 하지만 못 알아볼 거라 생각하는 것도 이해는 갔다.
어린 세스는 마치 설탕으로 빚은 아기 천사 같았다. 엄마의 치마를 꼭 쥔 손이 하도 앙증맞아서 토끼 인형이라도 쥐여 주고 싶었다.
‘이런 천사가 커서 성능 좋은 에어컨 같은 사람이 되다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상자를 열면 알 거라고 했는데 오히려 궁금증만 늘어났다.
쓸쓸한 눈으로 접시를 바라보던 할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선대 공작 전하는 뛰어난 동생 때문에 아주 힘들게 공작 작위를 물려받으셨습니다. 그 때문인지 첫째 아드님은 자신과 같은 고통을 겪지 않길 바라셨죠. 그래서 둘째 아드님이 태어나시자마자 심하게 차별하며 키우셨습니다.”
할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세스의 아버지는 세스를 아주아주 싫어했단다.
그래도 아내가 살아 있을 때는 눈치라도 봤는데, 막내를 출산한 공주님이 몸이 약해져 세상을 떠나자 대놓고 구박하기 시작한 모양이다.
결국 세스는 쫓겨나듯 신전에 들어갔고, 어머니의 기일이 아니면 집에 돌아오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11년 전, 공주 전하의 기일에 그 일이 일어났지요.”
그날 밤, 공작저에 불이 났다.
아직 어린 세스의 동생은 저택의 별채에서 머물렀는데, 바로 그곳이 화마에 휩쓸린 것이다.
동생이 별채에서 나오지 못했다는 것을 확인한 세스는 불타는 건물로 뛰어들었다. 뒤늦게 그것을 안 세스의 형이 동생들을 구하기 위해 따라 들어갔고…… 세스만 살아서 구출되었다.
나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어쩐지 공기가 무거워서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그 일로 전하께선 악의적인 비난에 시달리셨습니다.”
후계자가 되기 위해 형을 죽였다, 여동생을 죽이고 그걸 감추기 위해 불을 질렀다, 형의 여자를 노리고 살인을 계획했다 등등. 끔찍한 소문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다들 아무런 근거도 없이 전하를 헐뜯고 깎아내리기 바빴지요.”
할아버지는 무겁게 한숨을 쉬었다. 흐느끼는 소리에 돌아보니 시녀장이 눈물을 닦고 있었다. 나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공작님의 아버지도 그러셨나요?"
“그분이 가장 심하셨지요.”
할아버지는 경멸을 담은 얼굴로 말했다.